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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라 Nov 11. 2023

열역학 제3법칙 (완)

<김자라 단편소설>

* 열역학 법칙은 제0법칙 ~ 제3법칙 총 4편으로 연재됩니다.



그 해 여름의 더위를 보상하려는 듯이 가을은 순식 간에 자취를 감추고 한파가 기승을 부렸다. 그에 따라 우리는 수능을 맞이했다. '수능 한파'라는 마법의 지팡이 같은 단어는 또 어김없이 성공적인 마법을 부렸다.


보충학습에서 물리 2 수업을 듣는 학생은 꽤 있었지만 수능에서 물리 2를 선택한 학생은 나를 포함한 단 두 명이었다. 아쉽게도 다른 한 명은 유나가 아니라 잘 모르는 학생이었다. 전교 1등이라고 했나, 그랬던 것 같다.



수능이 끝나고, 논술과 면접이 이어지고, 어느덧 3년간 같은 공간 안에 있던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질 경로가 정해졌다. 비단 지리적인 경로뿐만 아니라 인생의 길로까지 말이다. 어쩌면 앞으로 살면서 한 번도 더 보지 못할 친구들까지도 흩어질 미래를 모른 척 제쳐두며 졸업까지의 시간을 어우러져 보냈다.


대부분의 수업 시간에는 자습이라는 이름의 자율시간을 받거나 밖에서 축구 아니면 눈싸움을 하거나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개중에는 교과서 외 수업을 계속 이어나가는 선생님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물리 선생이었다.


열역학 제3법칙


"에.. 여러분 교과서에는 안 나오지마는, 열역학 제3법칙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엔트로피는 고립계에서 증가하기만 한다고 했지만요,에.. 절대 영도(* 모든 원자, 분자 등의 움직임이 멈추는 이론적으로 가장 낮은 온도)에서는 엔트로피가 0이 될 수 있습니다.에.. 절대 영도에서는 모든 입자가 움직이지 않는 '정지' 상태가 되니까 무질서도를 측정할 수 없게 되는 거죠."


물리 선생은 입시가 끝난 후에도 본인이 사랑하다 못한 물리 수업을 이어갔다. 우리 반에는 전교 일 등도, 유나도 없었으니 수업을 듣는 사람은 나 포함 0.5명이었다. 나도 반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선생이 설명하는 열역학 법칙과 내 안의 열기관에 대해 동시에 생각했다.


유나와 나는 함께 바다에 간 이후로 나와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물론 같은 학교에 다니니 때때로 복도에서 만나면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곤 하지만 단둘이 마주 볼 기회는 없었다. 어쩌면 유나도 물리적 호기심 이외에는 나에게 별 볼일이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슬펐다.





졸업여행은 대관령 근처에 있는 스키 리조트였다. 햇볕은 쨍쨍한데 기온은 낮은 것이, 딱 스키 타다가 빙판에 미끄러지기 좋은 날씨였다. 대회 시즌이 끝나고 온 하준이는 본인의 스노보드 실력을 보여주겠다며 버스에서부터 난리였다. 하준은 처음에 몇 번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넘어지긴 했지만 이내 감을 잡고 폼 나게 보드를 타기 시작했다. 그 스피드를 따라가려던 나는 빙판에 잘못 넘어져서 발목을 접질리고 말았다.


"심하게 붓진 않았는데 오늘은 쉬어야겠는걸."


담임 선생님이 발목에 파스를 넘치도록 뿌려주며 말했다. 심지어 서있을 때도 파스 냄새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하는 수없이 숙소 쪽으로 돌아가 정원 돌계단에 앉았다. 날이 추워서 잠바 속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 했지만 저녁 시간까지 혼자 방 안에 죽치고 앉아 있는 건 더 우울했다.


"어? 지원아?"


익숙한 하이톤의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맞네! 여기서 혼자 뭐해?"


그 애였다. 유나는 스키나 스노보드를 탈 줄 몰라 눈썰매장으로 갔었는데, 그마저도 금방 질려서 돌아왔다고 했다. 발목을 접질려서 오늘은 아무것도 못 탄다고 하니 내가 앉은 돌계단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발목은 이제 괜찮아?"


유나가 파스 냄새를 물씬 풍기는 오른발목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응, 괜찮아.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렇겠다. 나는 원래 놀이 기구도 잘 못 타고 그래서 별로 아쉽진 않거든."


아주 편견 가득한 시선이지만 유나처럼 사교적이고 잘 노는 아이가 놀이 기구를 잘 못 탄다고 하니 놀랐다.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유나가 멋쩍어 하면서 말을 이었다.


"사실 산도 싫어하고 계곡도 싫어해서 친구들이나 가족들이랑은 항상 바다에 놀러 가. 지난여름에는 입시 때문에 바빠서 못 갈 뻔했지만..."


유나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고마웠어. 바다 같이 가자고 해줘서."


나는 유나의 시선을 받으며 또다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몇 개월 만의 열기관 작동인가.


알 수 없는 열감을 조금이라도 쫓아내기 위해 일부러 입을 열었다.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어?"


유나는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 이유, 저 이유, 이런저런 이유가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고 내린 결론은,


"시야가 탁 트여 있으니까. 내가 보고 싶은 바람, 맞고 싶은 바람을 가로막는 것 하나 없이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디로 떠나고 싶은데?"


유나는 다시 내 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새빨갛게 익은 내 얼굴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온 사방에 덮인 눈과 살을 에는 듯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너는 여름이었다. 나는 너 때문에 뜨거웠다. 너는 어디로 떠나고 싶은 걸까. 하지만 어디로 떠나든 다시 제자리로 온전히 돌아올 것이라는, 근거가 없는 믿음이 생겼다. 너는 여름이니까. 





단상에 선 교장 선생님이 마지막 말을 맺었다. 평소답지 않게 짧았던 훈화 말씀에는 억누른 슬픔과 자랑스러움이 공존했다.


우리는 마지막 교가를 불렀다. 그다지 엄숙하지도, 그렇다고 장난을 지침도 않는 어딘가 붕 뜬 기분이었다. 3년간 가사도 신경 쓰지 않고 대충 불렀던 교가가 낯설게 느껴졌다. "자라 산 정기"는 아직도 받아보지 못했고, "세계로 나가는" 일은 두려웠다. 그래도 "자라 고등학교"까지 부르면 우리는 졸업이었다.


졸업식 후에는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었다. 교실이며 운동장이며 꽃다발을 든 학생들과 사진을 찍는 가족들로 인산인해였다. 나는 하준이와 사진을 가장 먼저 찍고 운동장에서 마주치는 친구들과 번갈아 가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오늘 하늘이 가을 하늘처럼 높고 푸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찰칵!


셔터 음과 함께 필름 카메라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찡그린 눈꺼풀 너머로 사진을 찍은 사람의 눈부신 잔상이 보였다. 그 애였다.


"포즈 잡고 있길래 사진 찍어봤어! 졸업 축하해!"


유나는 카메라를 들고 싱긋 웃었다. 나중에 인화하면 전해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유나야 우리랑도 사진 찍자!"


"아, 알았어 금방 갈게!"


유나는 친구의 부름에 카메라와 꽃다발을 들고 뛰어갔다. 나에게는 단 한 마디 말만 남기고.


"금방 올게!"


유나가 떠나자 엄마가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초리로 물었다.


"저 여자애는 누구야?"


"어.." 나는 그 짧은 순간 우리 관계성에 대한 복잡한 고민을 하고 명료하게 결론을 내렸다.


"하준이 친구야."


나는 그날 유나가 찍었던 단 한 장의 사진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5년 뒤, 10년 뒤, 20년 뒤에도 나는 이 해의 타오를 듯 뜨거웠던 여름을 잊지 못한다. 물론 그때의 그 열기는 가을과 시간의 바람이 천천히 식혀 주었고, 겨울의 이별이 식혀주었고, 또 새로운 봄과 여름의 열기로 뒤덮였다. 하지만, 설령 그 풋풋했던 열기관의 온도가 아주 차가워진다고 해도, 절대 영도에 도달하지 않는 한 나의 엔트로피는 0이 되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
너무나 많은 골목길과 너무나 많은 산책과 너무나 많은 저녁이 우리를 찾아오리라.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으리라.
<너무나 많은 여름이> p.281, 김연수


Fin.





* 소설 진행의 원활함을 위해 열역학에 대한 설명은 축소/과장되었을 수 있습니다.


열역학 제0법칙. 어떤 계의 물체 A와 B가 열적 평형상태에 있고, B와 C가 열적 평형상태에 있으면, A와 C도 열평형상태에 있다.


열역학 제1법칙.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다.


열역학 제2법칙. 고립된 시스템에서 엔트로피(무질서도)는 점점 증가한다.


열역학 제3법칙. 절대 영도에서 엔트로피는 0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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