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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도훈 Dec 24. 2020

[직업인터뷰]워킹 홀리데이 전문가, 한용석 이야기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라! 포기는 어머니가 김장할 때 쓰는 배추다!


워킹 홀리데이 전문가, 유학 전문 컨설턴트인 전 「타임 스터디」 대표이자 현재 요양원을 운영하는 한용석 대표는 ‘호주에서 홀로서기’와 ‘필리핀에서 홀로서기’라는 워킹 홀리데이, 유학 안내서를 쓴 저자입니다. 이 책들은 본인이 직접 체험한 워킹 홀리데이와 유학 전문 컨설턴트가 되기까지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진 경험 안내서인데요. 한 대표는 한 때 호주에서 Daum에 파랑새의 꿈이라는 워킹홀리데이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었죠.


한용석 대표는 6살 때부터 태권도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태권도 체육특기생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가지만 해도 선수로 성공할 수 있다는 목표가 삶의 전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2학년 당시 연습 중에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됩니다. 결국 그는 태권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태권도 선수로서 성공하겠다는 목표가 부상으로 사라지고 나니 한동안 정신적인 방황을 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나왔으나 현실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입대 전처럼 집안은 여전히 가난했고 비빌 언덕조차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한 번도 새 옷을 사 입어 본 기억은 없었지만 가난 때문에 삶이 불행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대학에서 보일러 관리원으로 일하셨습니다. 박봉인 아버지는 일 년에 두 차례씩 동네 노인들에게 음식을 장만해서 대접하시곤 했던 베풀 줄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가난해도 이웃 노인들에게 나누실 줄 아는 아버지는 한용석 대표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분입니다.


아버지의 선행을 보고 자란 그는 가난하고 깜깜한 현실 속에서도 꿋꿋하게 새로운 희망을 찾는 긍정 마인드가 작동했는지도 모릅니다. 제대 후, 우연히 워킹홀리데이가 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해외에서 일하고 경험도 쌓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워킹홀리데이, 순간 그래 이거다! 하고 호주로 갈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수중에 있는 돈은 아끼고 아껴서 모아둔 2백만원이 전부였습니다. 2백만원으로는 호주에 가기에는 많이 부족한 액수였습니다. 워킹홀리데이만이 자신이 살길이라는 생각이 들자 모자란 돈은 돈을 벌어서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직업은 쉽게 구해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 동네의 선배 형이 자기하고 일하자는 제안을 해왔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미아리 대지극장 근처의 나이트클럽 웨이터 보조 업무였습니다. 그렇게 6개월간 일해서 모은 돈이 5백만원이 되었습니다. 한용석 대표가 밤잠 안자고 번 땀과 눈물의 5백만원이 훗날 그의 인생을 바꿔놓게 되는 종자돈이 될 줄은 본인 자신도 몰랐을 겁니다. 한용석 대표는 어떻게 자신의 암담한 청춘을 변화시켰을까요? 인터뷰 들어갑니다.


q) 어떤 계기로 호주로 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나요?

한 :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대를 갔다. 군대를 갔다 오고 나니까 나의 코앞에 닥친 것은 냉엄한 현실의 사회였다. 학벌도 부족하고, 집안도 어려워서 뭔가를 해나기가 너무 힘들었다. 막막한 심정에서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밖에 없었다. 너무 힘들다 보니 나 자신을 최악의 한계상황으로 밀어 넣어 그 한계 상황을 이겨내 보고 싶었다. 그러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는 용기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마음에서 호주로 가게 됐다. 호주로 가게 될 당시 호주에 대한 정보도 없었고 호주라는 나라이름 말고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물론 영어도 못했다. 호주를 간다니까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해주셨는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무작정 도전했다. 다들 무모한 짓이라고 했지만 내가 만약 살아남는다면 호주 다녀와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가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거기서 내 인생을 포기하자! 죽기 살기로 도전하자! 그런 극한 상황에서 갔기 때문에 호주가서도 힘들었지만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공할 수 있었다.


q) 호주에 어떤 연고가 있었나요?

한 : 없었다. 그래서 갔다.


q) 미국, 캐나다, 일본도 있는데 왜 하필 호주였나요?

한 : 우선은 제가 호주라는 나라를 너무 몰랐었고, 합법적으로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됐던 나라가 당시에는 호주밖에 없었다. 그 때가 99년도 였는데 미국도 캐나다도 워킹홀리데이 비자 발급 자체가 안됐다. 아무래도 저는 갈 때 돈이 없었기 때문에 가서 돈을 벌어서 생활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q) 그 때만 하더라도 외국에 나간다는 게 수월한 시절이 아니었을 텐데 어디서 어떤 정보를 얻으셨나요?

한 : 다음(Daum) 카페가 생긴 것이 99년 5, 6월이었는데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는 게 쉽지 않았다. 서점에 가서 책을 통해 정보를 얻었다. 사실 맨 처음 가려고 했던 곳은 일본이었다. 사업하는 게 꿈이었기 때문이다. 태권도를 포기할 때부터... 전역 후 너무나 이전이 없었기 때문에 인생이 많이 우울했다. 일본은 우리하고 지리적으로 가깝고 비슷한 문화권이라 사업 아이템을 찾는 것이 비교적 유리할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 알아보다가 일본에 가서 합법적으로 일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일본은 포기하고 호주가 적극적인 도전 대상이 되었다.


q) 노숙자를 친구로 사귀면서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면서요.

한 : 시내에서 친구들을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 때 한 노숙자가 다가왔다. 담배 한 개 피를 달라고 하는 거였다. 호주는 담뱃값이 비싸다. 그 비싼 담배 한 개피를 줬더니 많이 고마워했다. 한 개피 담배가 계기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대화로 이어졌고, 한 40여분간 대화를 한 것 같다. 물론 노숙자도 영어를 잘한다. 그 이후로 무언지 모르게 영어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이 생기는 게 느껴졌다. 거리낌 없이 다가갈 수만 있다면 나에겐 노숙자가 영어회화 연습의 최고의 선생님들이었다. 그 다음부터 심심하면 노숙자들이 있는 거리로 가서 담배를 권하면서 그들과 이야기를 했다. 두 세 시간씩 대화를 나누곤 했다. 개인 강습료가 담배 두 세 개피면 충분했다. 물론 냄새가 많이 나고 발음도 안 좋기는 했다. 그리고 노숙자 대부분이 술에 취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친구들 중에는 거지와 논다고 욕을 하는 친구도 더러 있었다. 그 때 카페 운영을 할 때였는데 주인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런데 노숙자들과 두 달 정도 생활하고 나니 사람들이 거지 주인장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두 세달 하다 보니 외국인데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한 나였는데... 내 스스로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영어 실력을 늘릴 수 있었고, 또 다른 나만의 영어 배우는 방법은 술집을 가는 거였다. 나는 원래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그렇지만 술 먹는 분위기는 참 좋아한다. 그래서 시내가 아닌 집 근처 외곽의 술집에 갔다. 그곳에 가면 매일 단골로 오는 알코올 중독성 아저씨들이 꽤 있었다. 술 마시면서 포켓볼 게임도 하면서 얘기를 나누는 것을 그들도 좋아했다. 물론 술에 취해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기는 하지만, 영어 실력을 키울 수 있다면 그런 호주 친구들과 지내는 것도 행복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술집에서 만난 아저씨가 자기 집에 초대했다. 거기서 놀기도 하면서 그 집 아들과 친해지니까 태권도를 가르쳐주고 하면서 호주 친구들과 사귀는 범위를 넓힐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의 경우는 한국친구나 일본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만약 내가 처음 갔을 때, 가자마자 중학생, 고등학생을 사귀려고 했다면 그들은 영어도 못하는 동양인인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 나름대로 노숙자와 술주정뱅이들과 대화하다보니 그 가족들과도 친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q) 영어교육은 우리나라에서 배운 게 전부인가요?

한 : 그렇다. 사실 중, 고등학교 때 정규수업시간에 영어교육을 받았다고 하지만 태권도 선수이다보니까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사실 영어를 거의 모르는 상황에서 호주를 간 것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a, b, c, d 정도 밖에는 몰랐다. 지금은 유학 관련 일을 하다보니까 외국학교 하고도 이메일을 주고받고 전화로 정보를 나누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는 되었다. 정보가 늘 새롭게 바뀌기 때문에 영어 공부는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다.


q) 처음 호주에 갈 때 5백만원으로 1년을 버틴다고 생각했다는데, 어땠나요?

한 : 그동안 어렵게 모은 돈이 한 2백만원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아무 경험도 없이 할 수 있었던 게 나이트클럽 웨이터 보조일 이었습니다. 그것도 선배의 소개로 들어가게 되었죠. 한 6개월 일해서 5백만원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5백만원이 내게는 전 재산이었지만 학비, 비행기 항공권 값, 하숙비를 내면 백만원도 채 남지 않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백만원도 채 안 되는 도가지고 살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많이 했죠. 그런데 막상가서 보니까 제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한심했습니다. 돈은 일하면 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현지농장, 한인식당, 면세점 등 아르바이트 할 곳은 많았습니다. 백만원을 가지고 1년을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1년 동안 무엇인가를 배우고 경험하고 깨닫고 오겠다는 생각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이라도 말도 안 통하는 아프리카 가서 1년동안 살아라 해도 살 자신이 있습니다.


q) 보통 사람이 다 한용석 대표와 같진 않을 겁니다. 다른 사람의 경우에도 효과적인 조언이 될 수 있을까요?

한 : 원하는 것이 크지 않다면 가서 사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농장에는 일손이 부족해서 일거리는 얼마든지 널려있습니다. 최소한 2주 정도 생활비만 있으면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봅니다. 그것보다도 어디에 있던 간에 삶의 목표를 확실하게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한 달 홈스테이가 끝나고 크리스마스 연휴 때 갔는데 농장에서 한 달 반 동안 일을 했습니다. 농장에서 만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면서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나름대로 생존이라면 자신감도 있었고 한국에서 제가 살던 쌍문동에서는 꽤나 튀는 존재였죠. 그 때 당시에는 고등학교만 나왔지만 그 동네 또래 중에서는 외국에 나 혼자만 나온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 농장에서 만난 친구들 경험담을 들으면서 제가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21, 22살 정도의 여학생들이 유럽이나 동남아등을 여행하다가 호주에 왔는데 농장에서 돈 벌어서 다시 여행을 다닌다는 얘길 듣는 순간 제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제 목표가 다양한 나라와 문화를 체험하는 쪽으로 바뀌게 된 겁니다.


q) 워킹 홀리데이에 대해 소개를 해주시죠?

한 :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만18세에서 30세 까지 받을 수 있는 비자입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각 나라별로 협정을 맺어서 문화체험과 함께 일을 하고 돈을 벌면서 여행을 할 수 있는 비자입니다. 그래서 이 비자는 1년 동안 협정 맺은 나라에 가서 일하면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q) 젊은이들이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주로 어떤 분야의 일을 합니까?

한 : 다양합니다. 자신이 어떤 능력과 재능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고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 그 분야에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웨이트리스, 웨이터, 농장일, 면세점, 선물가게, 리조트나 호텔 등에서도 일을 많이 합니다.


q) 여러 나라와 협의를 해서 비자를 발급한다고 했는데 어떤 나라들이 있나요?

한 : 우선 제일 많이 가는 곳이 호주입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나간 학생들이 5만명 정도 되는데 그 중에서 70~80%가 호주로 갑니다. 그 이유는 비자받기 쉽고 인터넷으로 언제든지 신청이 가능하고 인원 제한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캐나다, 일본, 뉴질랜드로도 많이 갑니다. 최근에는 독일, 스웨덴, 덴마크 등 유럽 쪽으로도 만이 가고 있습니다. 또한 홍콩이나 대만도 협정을 맺고 있는 나라입니다. 반대로 그 쪽 나라들의 학생들도 우리나라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q) 취업 시 취업할 곳을 미리 정하는지 가서 정하는지요? 근로지급은 또 어떻게 되는 지요?

한 : 가기 전에 결정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쉽게 말해서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업하고 싶을 때, 과연 한국에서 쉽게 일자리를 찾기는 힘들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외국에 가서 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고 언어가 되면 이력서를 만들어서 돌리는 형태가 되는 것이지요. 통상적으로 급여는 보통 주급이나 보름 단위로 지급 받게 됩니다.


q) 가기 전에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한 : 가기 전에 최소한 두 세달 정도는 충분히 준비를 해야 한다. 준비하는 방법들이 카페에서 체험기를 보거나 아니면 책을 보거나 강연을 통해 얻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준비는 성공한 사례들만 주로 얘기하다 보니까 실패사례에 대한 위험성을 무시하게 됩니다. 성공사례만 보다 보면 가서 열심히 하면 되겠구나. 일단가자! 누가 농장 가서 만불을 벌었대요. 아 그러면 나도 최소한 5천불은 벌겠지 하는 막연한 꿈을 가지게 되는 거죠.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어떻게 가서 생활하면 좋은지...갔다 온 분들의 얘기를 많이 듣고 특히 그 나라의 문화를 많이 배우는 것이 좋습니다. 문화를 모르고 가면 그 나라의 친구를 사귀는데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당시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고 문화를 모를 때는 친구 사귀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떠나기 전에 어학과 문화에 대해 공부하고 실질적인 생활 정보, 일자리 정보를 숙지하고 간다면 현지 적응이 훨씬 수월해 질 것입니다. 처음에는 홀로서기가 두렵지만, 1, 2년 생활하고 경험이 쌓이다보면 더 큰 도전정신, 강한 마인드, 넓은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생기게 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정도는 꼭 도전해 보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q) 워킹홀리데이를 가고자 했을 때 가장 먼저 고려할 점은 무엇입니까?

한 : 우선 가고자하는 나라를 결정할 때는 언어를 고려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환경, 분위기, 아르바이트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는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비자법 때문에 호주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캐나다의 경우 1년에 두 번을 신청할 수가 있습니다. 1년에 4천2백명을 워킹홀리데이 비자 신청을 받고 있는데 신청자가 4만명을 넘고 있습니다. 신청자가 많으니까 10% 정도만 받게 되는 거죠. 매년 7월과 11월에 신청할 수 있는데 안 되면 기다렸다 신청하고 또 안 되면 신청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일본은 7천2백명 정도 받을 수 있는데, 1년 중 4번 1월, 4월, 7월, 10월에 4번 신청이 가능합니다. 뉴질랜드는 천2백명 정도 밖에 안되고 하다보니까 비자신청이 제일 수월한 호주로 가는 경우가 많게 된 겁니다. 그래서 워킹홀리데이의 70-80%가 호주로 가는 학생입니다.


q) 워킹홀리데이를 가고자 할 때 반드시 명심해야 될 조언을 주신다면?

한 : 워킹홀리데이를 가는 목적 설정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리고 너무 환상을 갖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영어공부는 소통의 문제이기 때문에 반드시 충분한 공부를 해두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동남아 사람이 한국에 와서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언어의 장벽이 있기 때문에 일반 회사나 사무직에 취업이 안 되는 경우와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주로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은 거죠. 각 나라마다 자신들이 우선시하는 문화적 관습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홈스테이를 할 경우에 한국학생들은 늦게 자는 경우가 많고 저도 늦게 자는 편이었습니다. 호주인들은 보통 저녁 9시, 10시면 바로 자고 아침 5시면 일어납니다. 늦게까지 책을 보고 자기 전에 화장실에 가거나 물을 마시거나 하면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쾌한 일이 되는 거죠. 아침에 학교에 8시까지 간다면 그 사람들은 5시에 일어나서 분주하게 움직이니까 제가 굉장히 게으른 사람으로 보여 지는 겁니다. 그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맞춘다면 잘 융화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게 되면 계속 그 사람들의 눈 밖에 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언어와 문화에 대한 학습과 이해가 제일 중요하다고 봅니다.


q) 영어의 중요성을 언급했는데 어떻게 공부하는 게 좋을까요?

한 : 우리나라는 시험위주의 영어 학습이 주를 이루다보니 대화에는 서투릅니다. 그래서 대화를 위한 영어 공부를 해야 합니다. 대화는 학문이기 전에 언어적 기능이라고 봅니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특히 쉬운 단어 위주로 외우고 쉬운 단어는 하루 20개씩 외운다고 해도 3, 4시간이면 외울 수 있습니다. 두 달이면 1200개 정도의 단어를 외울 수 있다면 생활에 필요한 단어는 중요하다고 봅니다.


q) 영어를 가장 빨리 배우는 지름길은 친구를 사귀는 길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한 : 친구란 현지인이 아닌 외국친구. 영어를 배우러 온 다른 나라 학생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가서는 일본, 대만, 프랑스 등 여러 나라 학생 중 나하고 마음이 맞는 친구 한 명만 사귀면 됩니다. 저는 호주에 있을 때, 카페를 운영하다 보니까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 유명한 편이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지역에서는 유명세를 타기도 했습니다. 제가 영어 실력을 키울 수 이던 비결이라면 저와 제일 친한 친구가 일본 친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일본 친구와 같이 붙어 다녔습니다. 그 친구와 한국친구를 만나면 저는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 다시 그 친구에게 영어로 통역을 해주곤 했습니다. 친한 일본인 친구와 늘 붙어 다니니까 계속 영어를 사용할 수 있었고, 이 친구를 통해 다른 친구도 함께 사귈 수 있는 기회도 자연스럽게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외국친구를 사귀어야 여러모로 장정이 많습니다. 그렇게 3-4개월이 지나고 나면 생활이 조금 나태해집니다. 영어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영어의 필요성도 못 느끼게 되니까요. 이럴 때 자신을 추스르고 더 발전할 수 있도록 더욱 분발해야 됩니다.


처음에는 한 단어로 얘기했다가 일주일이 지나면 한 문장으로 얘기하고 2주 정도가 지나면 그 문장으로 얘기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3개월이 지나면 사용하는 문장이 줄어들게 됩니다. 말을 짧게 해야지 영어에 익숙한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아르바이트나 생활에 변화를 주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여행을 가거나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영어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더 느끼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영어가 익숙해졌을 때 비로소 그 나라친구를 사귈 수 있습니다.

q) 태권도 선수로 활동했다는데 실력은 어느 정도나 되시나요?

한 : 공인 4단입니다. 제가 6살 때부터 태권도를 시작했는데 가족모두가 태권도를 잘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4단부터 사범이 가능하고 호주에서는 3단부터 사범으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저는 결투식으로 배운 태권도라 현재의 레크레이션식 태권도와는 다르다고 자부합니다.

q) 호주에서 가장 큰 유학원에서 한용석 대포를 스카우트 했다면서요? 이유가 뭘까요?

한 : 처음 목표는 1년 동안 살아남자! 그런데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한 달 만에 목표가 바뀌었다. 돈 벌어서 호주 전역을 여행해보자! 그리고 뉴질랜드, 태국, 캄보디아, 필리핀, 중국을 여행하자! 살아남자에서 일을 하고, 영어를 배우고, 문화를 체험하고, 여행을 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영어는 늘었지만 생활영어 정도였다. 경험을 통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용기는 얻었지만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무식하니까 용기만 갖게 된 것이죠. 다시 공부 할 생각에서 학생비자로 호주에 가서 5개월 동안 체계적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그리고 유학원에 가서 상담을 받고 진학할 대학의 입학허가서도 받았다. 저는 나름대로 호주에서 이름이 알려졌던지라 제가 1년 동안 치열하게 살아왔던 모습을 지켜 본 유학원 사장님이 한 가지 제약을 해오셨다. 한국에 지점을 차리려고 하는데 한국지점장을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거였다. 그 때 고심 끝에 대학은 나중에 가도 된다. 그래서 호주에서 제일 큰 유학센터의 한국 지점장으로 부임하게 됐습니다.

q) 자신의 회사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한 : 사람을 상대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성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직원으로 일하다 보니 본사 정책에 무조건 따라야 하고 비즈니스 마인드도 많이 달랐기 때문에 힘들었죠. 그래서 작더라도 직접 회사를 차려서 제 철학대로 운영해보자고 해서 창업하게 됐습니다. 초기에는 유학원이 브로커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죠. 창업해서 2년 동안 힘들었는데 유학 컨설턴트로서 학생들에게 솔직한 상담을 해주다보니까 돈이 안 되는 일이 많았죠. 처음 2년은 적자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가 있었는데, 워킹홀리데이 다녀 온 학생들도 많아 지다보니까 소개가 많이 되었죠. “진실과 성실함은 통한다”가 2년이 지나니까 회사가 국내와 호주, 필리핀으로 커지게 된 것이죠.

q) 워킹홀리데이와 해외 유학 컨설턴팅을 통해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한 : 우리나라에서 생활해도 어려운 일은 생기지 않습니까? 하물며 외국 생활의 어려움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럴 때마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포기는 어머니가 김장할 때 쓰는 단어랍니다. 저는 어려움이 닥치면 두렵지만 피하지 않습니다. 지금 어렵다고 피하게 되면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또 피해야 합니다. 저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설 때 어려움은 극복되리라고 확신합니다.


q) 한용석 대표의 꿈은 무엇입니까?

한 : 어렸을 때 자라온 환경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불우한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위한 자립형 시설이나 나이 드신 분들의 노후를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요양원을 운영하고 싶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은 13평짜리 무허가 건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고아 2명을 데려다 키우셨죠.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면서 나도 크면 저렇게 해야겠다고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아원이나 요양원 같은 복지시설을 꼭 운영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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