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인 아무 말 대잔치
최근에 저는 안경의 김서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정확히는, 따뜻한 커피를 들고 있다가
렌즈가 순식간에 뿌옇게 변해버린 순간
세상이 왠지 모르게 너무 인식론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인식론은 우리에게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식 가능한 형태로만 받아들인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안경 김서림 상태에서의 세계는 무엇인가?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수증기지만
내적 구조를 뜯어보면
렌즈(매개) – 수증기(왜곡) – 시야(결과)
라는 꽤 정교한 인식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건 마치
현실이 아니라 ‘필터링된 세계’를 보는 구조다.
물론 제가 칸트를 잘 아는 건 아니다.
그냥 그런 느낌이 그렇다.
김이 서린 렌즈를 유심히 보면
사물의 경계가 흐려지고
형태는 유지되지만
디테일은 완전히 사라진다.
사람의 얼굴도
간판의 글자도
전부 비슷한 덩어리로 보인다.
이건 어쩌면
세계의 ‘해상도’가 낮아진 상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보통
명확하게 보이는 것을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이 서린 상태에서도
세계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명함은 진실의 조건이 아니라
단지 ‘편의 기능’에 불과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안경을 벗어 닦았다.
그런데 닦은 직후에
다시 김이 서렸고
나는 방금 닦은 행동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했다.
이건 일종의
노동의 무의미성이다.
나는 다시 닦았고
다시 김이 서렸다.
여기서 나는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물리 현상이 아니라
반복 구조를 가진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닦음 – 김서림 – 닦음 – 김서림
이건 거의
삶의 축소판이다.
나는 그것을 보며
세상도 안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뭔가를 명확하게 보려고 노력하지만
상황은 계속 흐려지고,
결국 우리는
대충 윤곽만 이해한 채 살아간다.
그런데 그때
앞에서 누가 손을 흔들었고
나는 그게 인사인지 위협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단 같이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가까이 와서 보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방금
잘못된 인식에 기반한
사회적 상호작용을 수행한 셈이다.
나는 그것을 보며
인식이란 생각보다 위험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튼 결론은 하나다.
안경에 김이 서렸을 땐
아는 척을 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