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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WRITER Jan 20. 2021

'잘생김' 빼고 정우성을 말하기

금기어: 잘생김, 미남, 짜릿해

잠시 잊어버립시다, 쉽진 않겠지만


지난 주말 SBS '날아라 개천용'이라는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은 조금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을 것이다. 다소 후줄근한 점퍼를 입고, 정리되지 않은 헤어스타일을 한 채 시청자 앞에 나타난 '박기자'가 지나치게 미남으로 변모해 있던 순간. "뭔가 달라진 것 같"고 갑자기 "얼굴이 상당히 좋아보이"는 '박기자' 역을 새롭게 소화 중인 이는 다름 아닌 '잘생김'의 아이콘, 배우 정우성이다. 드라마를 쭉 시청해 온 이들은 이번 배우 교체의 배경과 당위를 모두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전혀 다른 이미지의 배우가 연기해 온 배역에 갑작스럽게 투입된 '미남 레전드' 정우성의 등장은 어쩔 수없이 우리 모두를 시험에 들게 한다.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정우성이라는 배우의 '잘생김'을 잠시 잊어버려야만 하는 미션에 봉착했다. 


오늘 나는 정우성이라는 배우에 대해 이야기하되 그의 '잘생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아마도 쉽지 않은 일일 테지만,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한다. '잘생김' '조각' '미남' '피지컬' '비주얼' '황홀함' '짜릿해' '늘 새로워' '잘생긴 게 최고야' '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까지 모두 금기어로 지정해 본다. 그래서야 할 말이 얼마나 있겠냐고? 무슨 소리. 사실 당연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진리는 말해지지 않아도 힘이 세다.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에 대해선 가끔 그냥 잊어버려보자. 말로 하지 않아도 그는 매일, 짜릿하게, 새롭게, 잘생겼을 테니까. 드라마를 핑계 삼아, 정우성이라는 배우가 가진 외모 바깥의 매력, 그리고 나를 사로잡았던 그의 작품들을 떠올려본다. 


출처: (페이지 상단 이미지 및 본 이미지) KBS 2TV '연예가중계' 화면 캡처


눈빛 너머 몸짓


배우 정우성과 1초 이상 아이컨택을 한 뒤에도 심장이 제 속도로 뛰는 사람이 있을지 궁금하다. 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감독 이재한, 2004)나 <러브>(감독 이장수, 1999), 전설의 <비트>(감독 김성수, 1997)에서 보여줬던 그 눈빛 말이다. 애처롭고, 처연하고, 따뜻하고, 때로 로맨틱한. 눈빛은 눈에서 나오고, 눈이 잘생겨서 눈빛도 좋은 거고, 그건 결국 '잘생김'에 대한 얘기라고? 당신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그렇다면 영화계를 든든하게 이끄는 허리급 중견 배우로서의 존재감은 어떤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감독 김지운, 2008, 이하 놈놈놈)의 스크립터였던 이윤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나를 잊지 말아요>(감독 이윤정, 2016)에 제작자로서, 주연 배우로서 참여하며 물심양면 지원했던 일이 함께 떠오른다. 국제기구의 친선대사로 난민 문제에 두 팔을 걷어부쳐 온 소신도 마찬가지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JTBC '뉴스룸'에 출연해 개봉작 이야기는 뒤로 하고 난민들을 향한 도움을 호소하는 이야기만 풀어놨던 그다. 우연히 만난 팬들에게 '소맥'을 타주는 상상초월 팬서비스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고, 말하고 싶고, 늘상 감탄하는 정우성의 제1특기는 따로 있다. 바로, 액션이다.


출처: 왼쪽부터 차례대로 우노필름-삼성영상사업단(영화 <비트> 공식 포스터), CJ엔터테인먼트(<무사> 공식 스틸컷), 쇼박스(<신의 한 수> 공식 포스터>)


액션 배우 정우성


타고난 얼굴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아 온, '액션 배우'로서 그의 기질과 역량에 대해 말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라다. 이것은 내가 정우성이라는 배우를 영화 <비트>를 통해 처음 알았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어느 늦여름 밤 아마도 아빠가 비디오가게에서 빌려 두었을 빨간 딱지의 비디오를 두근두근 플레이하고, 모임에 간 부모님이 부디 넉넉한 수다를 즐기고 오시길 염원하던 두어 시간. 정우성의 액션은 아빠의 최애(코미디파) 성룡, 엄마의 원픽(무협파) 이연걸, 큰이모부의 클래식(당시 비디오 가게 사장님) 브루스 윌리스의 액션과는 또 다른 기운의 몸놀림이었다. 민(정우성 분)과 로미(고소영 분)의 아련한 사랑에 마음을 빼앗긴다거나, 잔상으로 남을 법한 자극적인 장면들에 놀랐을 법도 한데, 여전히 <비트>에 대한 기억은 '날아다니는 정우성'으로 점철돼있다. 거친데 우아하고, 날 것 같은데 멋이 스며있는. 


<비트>에서의 액션이 외롭고 서러운 잉여의 청춘을 은유했다면, 이후 정우성의 액션은 프로페셔널의 옷을 입고 보다 본격적으로 진화한다. 고려의 호위 무사 여솔 역을 맡아 대역 없이 모든 액션을 스스로 소화해낸 <무사>(감독 김성수, 2001)에선 창술 액션으로 동서양 영화인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중국의 거장 장이머우 감독이 <무사>의 정우성을 보고 <영웅>의 견자단에게 창을 쥐어주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감독상에 빛나는 올리버 스톤 감독이 <알렉산더>를 찍기 전 모든 스태프들에게 <무사>를 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잘 알려져있다. <놈놈놈>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마상 총술은 직접 낸 아이디어로 탄생한 액션 신이다. <감시자들>(감독 조의석, 김병서, 2013)에선 서늘한 중량감으로 악역의 엣지를 근사하게 보여줬고, <신의 한 수>(감독 조범구, 2014)에선 타고난 액션 감각에 성실함까지 갖춘 배우만이 완성할 수 있는 완벽한 액션 시퀀스를 그려낸다. <아수라>(감독 김성수, 2016)의 끈적일만큼 처절한 액션도 잊을 수 없다. 


출처: 쇼박스(<신의 한 수> 스틸컷)


털어봤다, 외장하드를


내가 <비트> 다음으로 좋아하는 정우성의 액션 연기가 바로 <신의 한 수>에 있다. 운 좋게도, 외장하드에서 영화 <신의 한 수>의 지난 자료들을 찾을 수 있었다.(성덕...) 영화 속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활:삶과 죽음의 갈림길' 파트의 액션 신을, 공개된 적 없는 스틸(<신의 한 수> 스틸의 저작권은 '쇼박스'에 있으며, 무단 전재 및 상업적 사용을 금함) 몇 장과 함께 짧게 소개한다. 


<신의 한 수>는 목숨을 건 내기 바둑에 뛰어드는 프로 바둑기사 '태석'의 이야기다. 선량한 바둑 기사였던 '태석'은 위험천만한 내기 바둑판에서 희생된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필사의 준비에 돌입한다. 조력자들과 함께 일련의 장애물들을 뛰어넘은 그는 마침내 최종 빌런의 소굴로 뚜벅 뚜벅 걸어 들어간다. 사활의 대결로 향하는 '태석'의 표정은 의연하다. 차려 입은 새하얀 수트는 복수라는 거대한 바둑판 속 전의를 다지는 '백돌' 같기도, 법도 윤리도 없는 공간에 당도한 '최소한의 인간성' 같기도 하다. <비트> 속 임창정의 명대사 '17:1'이 절로 떠오르는, 아니 필시 17명 이상일 것으로 보이는 숱한 덩치들을 절박하지만 유연한 액션으로 하나둘씩 쳐낸다. 흰 수트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낭자한 피로 물들며 제 역할을 다한다. 혈흔은 근사한 무늬처럼도 보인다. 


출처: 쇼박스(<신의 한 수> 스틸컷) / 위 이미지들의 저작권은 '쇼박스'에 있으며, 무단 전재 및 상업적 사용을 금함)


외장하드엔 (개봉 당시) 정우성의 데뷔 20주년을 축하하는 동료들의 메시지도 남아 있었는데, 그 중 정우성과 <본투킬>(감독 장현수, 1996)부터 <비트>, <태양은 없다>(감독 김성수, 1999), <무사>, <놈놈놈> 등 다수의 작품들을 함께 했던 정두홍 무술 감독의 인터뷰에 특히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역시 일부를 공유한다.


"액션 배우로서 '퍼펙트'한 배우. 모든 액션들을 창의적으로 소화하는 배우다. 무술 감독이 짜놓은 액션대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소화해야만 하는 어떤 부분들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디어도 많다. 스타일리시하게 창조해내는 힘이 강한 배우이고, 액션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배우다."


"굉장히 연습량이 많고 성실한 배우다. 액션에 매우 성실하게 임하는, 보기 드문 배우들 중 한 사람이다. 액션이 몸으로 이야기하는 작업이라면, 정우성은 그런 표현력이 굉장히 뛰어나다. 액션의 기본 베이스는 무술 감독으로서 만들어 두지만, 배우의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어떻게 하고 싶어?' '어떤 감정을 가지고 하고 싶어?'라고 물어보곤 한다. 그러다보면 배우가 독특하게 살리고 싶어하는 포인트들이 있다. 정우성은 쉽게 말해 그 '맥'을 잘 짚어주는 배우다. 그래서 편안하게 그의 액션을 두드러지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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