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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원상 Dec 28. 2023

언젠가 죽어야 하는 존재로 산다는 것

말기 암 환자, 크리스마스 화재, 발더스 게이트3를 통해 고심한 후에..

며칠 전 늦은 심야 우연히 한 커뮤니티에서 수십 개 댓글이 달린 글 하나를 읽게 됐다. 제목은 “의사가 이제 거의 다 왔대요”였다. 몇 줄 안 되는 글을 보니 제목의 암시대로 시한부를 통보받은 30대 암환자였다. 그러나 짧은 글 하나에 느껴지는 사연이 기구해 보였다.


그는 수년 째 말기암 투병 생활 중이었고, 주변엔 가족도 없었다. 삶에 집착을 버릴 수 있었던 그는 오래 살아갈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받지 말고 돈에 연연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기도 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글, 그러나 글은 슬프면서도 산뜻하고 밝았다. 댓글에는 작성자가 좋은 사람인 것 같다며 응원하는 글이 많았다.


더 늦은 심야, 작성자의 이전 글을 살펴봤다. 많은 글이 있던 건 아니었다. 매년 평균 2~3개에 불과했고 글을 쓰지 않은 연도도 눈에 띄었다. 일상적은 고민을 적은 처음 몇 개를 제외하곤 그의 암 투병 과정에서 적은 글이었다.


시작은 2018년이었다. 알 수 없는 잦은 코피와 구토, 부어오르는 잇몸을 토로하면서 사람들에게 고민 상담차 원인을 물었다. 그해에 병원을 다니면서 암 선고를 받았다. 그는 현실을 믿지 못했지만 이윽고 이를 직시하고 차분하게 항암 치료를 받으며 주변을 정리하는 듯했다.


이듬해 그는 죽을 땐 죽더라도 한 번 죽지 두 번 죽느냐면서 씩씩하게 선언적인 의지를 보였다. 그동안 그는 울면서 죽는 날까지 함께하겠다는 여자친구를 연민과 책임감을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며 정리했었고, 20년 절친에게도 사실을 털어놓고 엉엉 우는 친구 모습에 괜히 털어놨다고 후회도 했었다고, 병원복도에서 딸아이가 많이 아파 울고 있는 어떤 아저씨를 달랜 경험을 글로 전했다. 그는 슬프면 울어도 된다며 나중에 뭐라도 이야기하고 싶으면 연락하라고 아저씨에게 연락처를 주면서 위로했다. 그리곤 그는 부모님이 보고 싶다고 적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일찍이 세상을 떠난 모양이었다. 자식 아픈 모습 안 보시게 되어 다행이라면서, 자기는 부모님 그리움으로 살면 되지만 자기 모습을 볼 부모님이 얼마나 힘드셨겠느냐면서 되레 복도에서 만난 부모로서의 아저씨의 고통에 공감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적은 글에선 그의 이야기와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왕왕 흘렸다.

어릴 때 엄마 아버지가 계실땐
안좋은 일이 있어도
아무리 힘든일이 있어도
나쁜일이 생겨도 나를 지켜 줄거라는 믿음
모든게 잘 될거라는 생각이 있었던거 같아요
지금은 모르겠네요
의지할때가 없는 느낌
나혼자 이겨내야 한다는 느낌
이런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가봐요
이런게 어른이라먄 왜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어 했는지..
나중에 이 세상이 끝나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영원한 이별인걸까
엄마 아버지
너무 보고 싶어요

그는 봉사 활동도 열심히 하면서, 좋아하는 영화도 보면서 지냈다. 2020년에는 암 전이가 잠시 멈췄다면서 1년을 보너스로 얻었다며 즐거워했다. 그리곤 2023년이 끝나가는 무렵에 “의사가 이제 거의 다 왔대요”라고 오랜만에 글을 썼다. 그는 자기 때문에 아파할 사람이 주변에 없어서 다행이라면서 혼자 버틴 스스로를 대견해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태어나 살아가다가 죽어갈 똑같은 삶의 경로를 따를 텐데, 왜 누구의 삶은 기구하고 누구는 평탄하고 누구는 난만할까.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말기 암 환자의 깨달음과 조언은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의 삶은 평생 고통 없이 평탄하게 사는 이들과는 무엇이 다를까.



영원할 것 같았던 극단 '학전'과 김민기

극단 ‘학전’이 문을 닫는다. 애당초 돈벌이가 아니라 훌륭한 예술인을 길러내고자 했던 음악인 김민기가 1991년 문을 연 곳이다. 그는 1971년 정치적인 이유로 압수된 첫 앨범 이후 처음으로 발표한 곡을 모아 시리즈 형식으로 앨범을 냈다. 소극장 재원 마련을 위해서였다. ‘학전’ 소극장에서는 후배들이 발돋움할 수 있는 뮤지컬과 공연이 올랐다. 또 문화 공백에 있는 청소년과 아동을 위해서 창작극을 올렸다. 모두 크게 돈 안 되는 일이었다.


12월 17일 공연을 앞두고 학전블루소극장 앞에서


그나마 흥행에 성공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2008년 4000회를 끝으로 중단됐다. 김민기는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돈만 벌다 보면 돈 안 되는 일을 못할 거 같아서”라고 말했다. 그는 서울대를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예술인의 본분이었고, 동시에 공장 노동자, 농사꾼, 막장 탄부로 살아왔다. 그는 '학전'을 통해 설경구, 김윤석, 황정민, 안내상 등 수많은 배우를 길러냈고, 김광석, 윤도현, 강산에, 들국화, 권진원 등 음악가들의 디딤돌이 되었다.


김민기의 투병과 ‘학전’의 재정난이 겹치며 결국 젊은 예술가의 못자리 명맥에 마침표가 찍힌다. 2024년 3월 폐관을 앞두고 ‘지하철 1호선’은 마지막이 될 공연을 올해 12월까지 올렸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모든 공연이 일찍이 매진됐다. 겨우 취소표를 구해 1998년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을 보고 왔다. 대학로 극단의 한 줄기가 된 무대가 역사 속에 사라진다. 매우 안타깝다. 그래도 다행인 건, 예술인 김민기는 필멸자의 운명을 짊어졌지만, 그의 정신과 꿈은 불멸할 것이라는 희망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비극

몇 년 만에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차갑지만 새하얀 세상이었던 그날 새벽. 눈을 뜨자마자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봉구에서 비극적인 뉴스가 들렸다.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났다는 소식이었다. 거기에 가족이 사는 친구에게도 안부를 전했다. 다행히 다른 동수였다.


그러나 그 화재로 2명이 숨졌다. 사망자 중 한 명은 두 아이를 둔 아빠였다. 부부는 복도로 대피하지 못하고 7개월, 2살짜리 아이를 한 명씩 안고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두 아이는 생명에 지장이 없으나 엄마는 어깨를 다쳤고 아빠는 머리를 크게 다쳐 결국 숨졌다. 너무 뜨겁고도 새까만 크리스마스다.


생명에는 어떤 가치가 있을까

2023년 올해의 게임(Game of the year)으로 등극한 '발더스 게이트3'가 처음으로 세일을 했다. 벼르고 있던 차에 이 기회에 게임을 구매했다. '발더스 게이트3'는 TRPG로 유명한 던전 앤 드래곤의 룰을 채용해 PC/비디오 게임으로 구현했다. 플레이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게임의 진행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우리네 인생처럼 하나하나에 큰 의미를 두기 시작하면 피곤해지고 권태에 빠지기 십상이다. 나는 그래서 수월한 진행과 게임적 쾌감을 위해 모든 갈림길에서 큰 고민 없이 재빠르게 판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게임 플레이 중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 있었다. 어떤 언데드 캐릭터를 조우하는 장면에서 이런저런 대화 속에서 그 죽은 자는 "필멸자 하나의 생명에는 어떤 가치가 있냐"라는 질문을 주인공에게 던졌다. 죽음을 초월한 이가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존재에게 묻는 질문인 동시에, 인간으로서 모든 생명에 대한 가치를 묻고 각 생명을 차별해야 하는지를 묻는 철학적 질문이었다. 보기는 6개가 있었지만 한참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모든 생명은 저마다 가치가 있어. 그래서 모든 걸 희생할 가치가 있는 거고"라는 항목을 골랐다. 그 언데드는 좋은 질문이라고 칭찬했지만, 이게 맞는 답인지 혹은 가장 합리적인 의견인지 알 순 없다.


생명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직관에 반하며 정의하기 매우 어렵다. 엄밀히 말하면, 생명을 구성하는 요소 중 살아있는 것은 없다. 미생물과 세포 단위로 가면 생명과 비생명의 구분은 더 모호해진다. 생명은 비생명과 다르게 특별한 물리법칙을 따르는 것도, 구별되는 물질로만 구성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살아있다는 것 하나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잘 알고, 누구 하나 빠짐없이 언젠가 죽는다. 그런데도 어떤 죽음은 슬프고, 어떤 죽음은 덧없고, 어떤 죽음은 아름다운 건 참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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