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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라밍고 Nov 12. 2023

칼날이 향하는 방향

무뎌진 칼날

  둘째 어린이집 재원시절 인연을 맺은 K언니는 무척 유쾌하고 주변 사람을 편하게 해 준다. 누군가는 K언니 덕분에 대인기피증을 극복했다며 우스개 소리를 한다. 나 역시 주변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아주 정직한 I형의 소유자로 K언니의 덕을 본 사람 중에 하나이다. 


  K언니는 유명한 철학관에 다녀온 이야기를 풀어놨다. 고등학생 아들과 날이 거듭될수록 사이가 틀어져 고민하다 선택한 철학관이었다. 예약 후 7개월을 기다렸다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단다. 큰아들의 성격부터 주변 친구 관계까지 귀에 쏙쏙 들어오게 너무 설명을 잘해준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OO 이는 유리구슬 같은 아이라서 깨지기 쉽대. 정말 살살 다뤄 주어야 하는데, 내가 하는 잔소리를 견디지 못한대. 워낙 아이 성격도 남에게 싫은 소리 못 하고 자기 안에 묻어두는 타입이고 주목받는 거 너무 싫어한대. 사람들은 칼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그 칼로 남을 찌르는 사람이 있고, 그 칼 끝이 자신을 향해있어 그 결과가 자꾸 자기를 찌르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 애는 후자의 경우래. 물론 그 칼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정말 행복한 거래." 


  듣던 중 불현듯 나의 칼은 어느 방향을 향해 있을지 생각해 본다. 20대의 나는 수많은 칼로 상대를 찌르는 선택을 했다. 나의 혀에는 필터가 없어 내가 던지는 말에 베이고 찔린 상처를 가지고 나를 떠나거나 마음은 버린 채 몸만 곁에 남아 지극히 사무적인 사이로 서로를 대하는 관계의 연속이었다. 13년을 몸담은 회사를 퇴사하고 마땅히 연락하는 이가 없는 이유도 이 때문 일터다. 40대 후반을 달리는 나에게 칼은 어느 방향을 바라보는지 생각한다. 나의 칼은 녹슬고 낡아 사용을 할 수 없다. 이유를 짚어보면 '엄마'이기 때문이다. 회사원 당시 인연이 있던 J는 내게 말했다. 

  "언니는 애 낳고 사람 됐지. 전에는 얼마나 사람들을 괴롭히고 나를 미워했는지 알아? 내가 그때 언니 때문에 너무 속상해서 OO언니한테 만날 언니 욕 했어." 

  왜 좀 더 유연하게 삶에 대처하지 못했는지 후회스럽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늘 불만스럽고 마음에 들지 않고 짜증이 났다. 나의 칼을 무뎌지게 만든 원인은 시간과 가정, 아이들, 그리고 독서이다. 둘째 아이를 낳고 육아로 인해 전업 주부가 되었다. 졸업 후 한 달 이상 쉬어 보지 못한 나에게 주부의 삶은 견디기 힘들었다. 아이를 업고 나가기 시작한 동네 책 모임에서 인생을 더 많이 살아 지낸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칼을 겨눌 겨를이 없었나 보다. 파를 썰다 눈이 너무 매워 잠깐 눈을 깜박였다. 힘주어 파를 썰던 칼날이 파가 아닌 나의 손가락을 덮쳤다. 참을 수 없는 고통과 함께 쉴사이 없이 피가 흘렀다. 좀처럼 멎지 않던 피가 멈추자 소독을 하고 밴드를 붙였다. 무뎌진 칼이라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의 칼도, 주방의 칼도 나에게는 무뎌져서 다행이다. 


  칼이 없는 삶을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그 칼 끝이 아이들을 향하지 않도록 노력해 본다. 또한 절제할 수 있는 능력과 유연함을 기르길 바라본다. 살아온 날들만큼 살아갈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쁘지만, 그보다 짧을 수 있음을 안다. 서로의 칼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남은 생을 살아낼 자신도 없다. 그저 나의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입가에는 미소를, 누군가의 삶에는 용기를, 누군가의 마음에는 사랑을 전하며,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는 삶을 살아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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