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쳐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
남편은 새벽 별을 보고 출근해 심야 별이 뜨고 나서야 퇴근한다. 직장이 멀어 출퇴근 시간만 왕복 3시간이 걸린다. 두 아이를 독박 육아하며 치워도 티도 안 나는 집안일을 하느라 하루가 48시간처럼 길게 느껴진다. 하루를 마감하며 작은 아이를 껴안고 수유하며 살짝 잠이 들려는 찰나.
“엄마, 쉬 마려.”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딸아이를 다그친다.
“엄마가 자기 전에 화장실 다녀오라고 했지?”
신경질적으로 아이를 화장실 변기에 앉힌다. 변기에서 ‘쿵’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팔짱을 끼고 아이가 볼일을 다 보도록 기다리며 인상을 구기고 있다. 딸아이는 쥐 죽은 듯 한마디도 하지 않고 변기에 앉아있다. 아마 딸아이가 화장실이 가고 싶음을 느낀 것은 훨씬 전이 었겠지. 자신의 한마디에 반응할 엄마를 이미 여러 번 겪어보았고, 그 무서운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참을 수 있는 시간만큼 꾹 참고 뒤척였을 것이다. 그런 아이의 마음을 알아채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유년 시절의 상처는 오래도록 남는다. 내가 살던 집에는 많은 돌계단이 있었다. 주인 할머니 댁에 손녀는 나와 동갑이었다. 하루는 집 벽에 크레파스로 낙서하는 그녀를 발견했다. 나는 그저 옆에 서 있었다. 소심한 내 성격으로 함께 벽에 낙서할 배포는 없었다. 하지만 그 낙서는 오롯이 내가 한 낙서가 되었고, 엄마는 내가 한 낙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벽에 낙서했다는 이유로 고무장갑으로 나를 때렸다. 이 나이쯤 되니 그때 엄마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 하지만 당시에는 엄마가 밉고 속이 상했다. 삼십 년이 훌쩍 지난 후에도 그 시절의 기억이 이렇듯 뚜렷이 남는 걸 보면 난 아마 두고두고 엄마가 계속 미웠을까? 내내 기억하면서 엄마를 미워하지는 않았지만, 그 기억이 사라지거나 아름답게 순화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딸아이도 화장실에서의 나의 행동과 나의 표정을 오랜 시간 기억하면 어쩌나 걱정되고 미안하다. 가끔 물어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기억하는 것이 두려워 질문을 삼켜버린다.
등을 둥글게 말고 한참을 무언가에 집중하는 녀석. 궁금하지만 둥글게 말려 있는 공벌레 같은 녀석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엄마, 이건 안 되겠어. 엄마가 좀 해줘.”
“발톱을 이렇게 짧게 깎으면 아프지 않겠어?”
여러 번 다시 시도한 흔적이 남은 발톱을 보니 갑자기 울컥해진다. ‘언제 이렇게 컸나?’ 싶은 마음에 발을 주물러 본다. 두툼해진 발등이 이젠 귀엽지 않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을 거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았던 일들이 시나브로 없어져 간다. 일주일에 한 번 손톱을 깎아 주는 일이 귀찮을 때가 있었다. 하루 이틀 미루다 아이의 손톱 밑에 까맣게 떼가 낀 모습에 화들짝 놀라 급하게 손톱을 깎아 주기도 했다. 내가 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손발톱을 깎는 아이들의 모습이 서운하다.
우리가 한평생을 살아가는 시간이 대략 80년쯤이라고 가정하자. 그중 부모님과 함께 사는 시간이 30년쯤. 결혼해 자식을 낳는다면 그들과 함께 사는 시간이 역시 30년쯤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20년쯤은 그리워하며 살아가겠지. 자식을 낳아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입히는 시간은 길어야 10년 미만이 아닐까? 한평생을 살면서 나의 도움이 누군가에게 절실히 필요할 수 있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 집 아이들은 이제 나의 손길을 간절하게 기다리지 않는다. 스스로 먹고, 씻고, 잠을 자고, 입는다. 나는 이제 그들을 거들어 줄 뿐. 그들은 이미 한 사람의 주체가 되어 판단하고 원하는 것을 분별할 줄 안다. 그 힘들기만 했던 시간이 이렇게 찰나의 짧은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아이들을 대하는 내가 조금 달라졌을까? 엄마라는 존재로부터 독립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서운하고 애틋한 것은 그저 나뿐이다. 나는 여전히 두 아이를 사랑한다. 두 아이 역시 나를 사랑하고 나를 바라봐 준다. 이 쌍방향의 사랑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내가 주는 사랑을 아는 척해줄 때 마음껏 사랑해보기로 한다.
누가 뭐래도 지금은 사랑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