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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칠일 Nov 13. 2021

아무튼, 혼술

내 삶을 구성하는 '아'


가라앉을 기미가 없는 트러블 때문에 한동안 고생하다 피부과에 갔다. 일주일 치 항생제와 함께 당분간 술은 마시지 말고 최대한 일찍 자라는 처방이 내려졌다. 열두 시 전에 자는 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겠지만 금주는 도저히 안 되는 얘기다. 차라리 약을 건너뛰고 술을 마실래요 의사 선생님.



혼술 하는 사람을 마치 알코올 중독 말기 환자처럼 여기는 사회에서 나는 꿋꿋이 혼술을 고집하며 살아왔다. 퇴근 후 소주 한 잔에 깔라만시 토닉 워터를 섞고 얼음 한 두 개를 동동 띄워 마시는 소중한 한 잔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요 평화이자 사랑이다. 그리고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이 조용하고 고독한 평화를 누려야만 나는 행복해질 수 있다.




따뜻한 공기가 올라오는 책상 앞에 앉아 천천히 술을 마시며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는 사치를 누린다. 그 순간만큼은 술자리의 왁자지껄한 소음도 옆자리 상사의 기분을 맞추려 억지로 웃는 입꼬리도 없다. 휴대폰을 무음 모드로 설정해둔 채 저 멀리 충전시키고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 책을 집어 든다.



표지를 펼치고 한 모금, 목차를 읽으며 한 모금, 좋은 문장에 밑줄 그으며 또 한 모금, 독서에 집중하는 동안 얼음이 녹아 미지근해진 술을 다시 한 모금 마신다. 취기가 살짝 올라올 때면 그냥 지나쳤던 문장을 안주삼아 꼭꼭 씹어 다시 삼킨다. 몸이 점점 더워지는 게 느껴질 무렵에 흘긋 거울을 본다. 눈밑에 붉은 홍조가 어렴풋이 보이면 이제 그만 마시고 하루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신호인 거다. 아쉬운 마음을 도닥이며 책을 덮고 침대에 눕는 순간 이상하게 실실 웃음이 배어 나온다. 아, 역시 혼술은 포기할 수 없어. 이건 내 손에 잡히는 몇 안 되는 행복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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