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편) 박 차장 ver.
비 오는 금요일, 버스에 앉았다.
맑은 노인을 만났다. 지친 꼬마를 보았다. 검게 비친 창틈으로 내가 보였다.
“차장님, 오늘 날도 꾸무리하고 금요일인데 퇴근 후 한 잔?"
점심 후, 식당 앞 공짜 자판기 커피를 뽑으며 윤 과장이 묻는다. 그 말에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하늘에는 회색빛 낮은 구름이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 머리 위에 있다. 오늘 아침 아내의 말이 맞나 보다.
식탁에 앉아있는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은 중학생 딸내미는 제 엄마가 차려 놓은 토스트를 급하게 입에 밀어 넣으며 현관으로 향했다. 후다닥 뛰어나가는 딸내미 뒤로 아내가 악을 쓰며 쫓아 나간다.
“오후에 소나기 한두 차례 있대. 우산 챙겨!”
한 입 베어 먹은 퍽퍽한 토스트를 식탁에 두고 나도 출근길에 올랐더랬다.
다행히 여름엔 소나기가 잦다는 것을 알 나이인지라 내 서류 가방에는 늘 작은 우산이 휴대되어 있다.
윤 과장의 청에 은근슬쩍 소주 한 잔이 생각나던 참인데 와이프에게서 카톡이 왔다.
『서준아빠, 오늘 저녁에 포항에서 미진이 올라온대서 번개모임 생겼어. 가능한 일찍 와서 서윤이 학원 다녀오면 간식이라도 챙겨줘요. 늦어요?』
『아냐, 일찍 갈게.』
아내에게 답을 쓰고는 윤 과장에게 핸드폰 화면을 슬쩍 내밀었다.
윤 과장은 입맛을 ‘쩝’ 하고 다시며 일회용 커피잔을 쓰레기통으로 골인시켰다.
점심 이후 갑작스러운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정작 상부 보고용 상반기 자료는 정리도 못 한 채 요청건 처리를 위해 검토, 컨펌하기 바빴다. 다행히 급한 불은 껐지만 못한 일을 해야 하는데 아무도 그 일은 하겠다는 말 없이 벌떡벌떡 일어나 퇴근을 한다.
서윤이 저녁을 챙기려면 나도 조금 서둘러야 하는데….
퇴근하는 사원들에게 인사하는 윤 과장에게 말을 건다.
“윤 과장도 수고 많았어. 그래도 급한 불 껐으니까, 얼른 들어가. 오늘 하기로 했던 상반기 데이터 정리는 내가 주말에 할게. 딸내미 때문에 나도 오늘은 칼퇴를 좀 해야겠네.”
요즘 애들이 아니라 이런 말이 왠지 낯 뜨겁다.
윤 과장은 그런 내 맘을 알았는지
“아니에요. 어차피 퇴근해야 할 것도 없는데 제가 정리할게요. 들어가서 서윤이 챙겨 주세요.”
라고 또 특유의 넉살 좋은 제스처를 한다.
고마운 마음은 다음 주 점심에 국밥 한 그릇으로 전해야겠다.
퇴근 후, 사무실 건물과 조금 떨어진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굵은 빗방울이 한두 방울 뚝뚝하고 떨어지더니 금세 빗줄기가 거세진다. 때마침 버스가 도착해서 우산은 펴지도 않은 채 버스 위로 올라탔다.
1분도 안 되는 사이에 어깨는 이미 축축하다. 다행히 빈자리가 있어 털썩 주저앉아 어깨를 툭툭 털며 창밖을 보았다.
정류장 옆 쓰레기통에서 파지를 줍던 늙은 할머니가 갑작스러운 비에 젖어가는 파지 위로 허둥지둥 리어카에 비닐을 덮고 계신다. 그리고 서윤이 또래쯤 되는 중학생 여자애들 무리가 비를 피하려는 듯 가방으로 머릴 가린 채 버스 정류장 쪽으로 내 달려와 할머니 곁에 섰다.
할머니는 리어카 정리를 하다 말고 그 소녀들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비닐을 덮던 늙고 고부라진 손으로 한 소녀의 가녀린 손을 붙들려했다. 그러나 잔망스레 철이 든 어린 소녀는 늙은 할미의 서러운 눈을 외면했다.
할머니는 잽싸게 리어카에서 한쪽 살이 구부러진 비닐우산을 꺼냈다. 그 사이 이미 그 소녀는 친구들 무리 속으로 사라져 없다.
확신할 순 없지만 할머니와 손녀 사이지 싶다.
유흥에 들뜬 금요일, 비 내린 버스 창에는 해도 지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네온 빛 모자이크가 서렸고 그 할머니는 길가에 동그마니 내버려져 있었다.
며칠 전,
오랜만에 일찍 퇴근한 후 하는 가족과의 식사 자리에서 그저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메시지를 주고받는 딸에게 한 소리를 했다.
돌아온 대답이라고는
“원래 늘 이래. 언제 아빠가 우리랑 밥이나 먹었어? 왜 갑자기 밥은 먹자 해서…. 저녁 시간만큼은 나도 쉬는 거야. 아빠는 우리랑 밥을 안 먹으니 잘 모르지. 엄마는 뭐라 안…”
“박서윤! 너 아빠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밥이나 먹어. 얼른….”
아이의 말허리를 자르며 와이프가 나무라는 바람에 나와 서윤이 둘 다 조용해졌다.
아이는 몇 숟가락 더 뜨는 듯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곧장 지 방으로 들어갔다.
지방대를 졸업하고, 영업 전선에 뛰어들어 누구보다 열심히 세일즈를 하며 돈을 벌었다. 거창한 학벌도 아니고, 대단한 기술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노력과 실력대로 벌 수 있는 영업직을 택했다. 군대 제대 후 복학 전에 삼촌 아는 분의 회사에 들어가 의료 기기 판매하는 선임을 따라다니며 보조로 시작했던 내 아르바이트 생활이 이제는 업이 되었다. 그때 만난 경영지원팀의 여직원이 지금의 아내이다.
결혼식도 전에 큰 아들이 들어섰고 나는 사회 초년생이면서 초짜 아빠가 됐다. 어린 나이여도 아빠이자 가장인지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회사에, 일에 집중하는 게 내 가족을 벌어 먹여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결혼 후 어느 정도 안정기에 들어서고 낳은 딸내미를 보며 그제야 육아의 기쁨도 알고 딸이라서 또 남다르게 애정을 갖고 길렀다. 그래서인지 지 오빠보다는 버릇도 좀 없다. 그래도 내 눈에는 그저 예쁜 딸인데, 서윤이에게 나는 좋은 아빠가 아닌가 보다.
지금은 산업용 기기를 판매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고 관리자이다 보니 이전보다는 여유가 있지만 관리자 나름대로 또 바쁘고 집중해야 할 일들이 있고, 지금처럼 직원들 눈치를 보며 오히려 더 해야 하는 일들이 생긴다.
가족들에게 알아달라고 열심히 한 건 아니지만 내 마음을 몰라주는 딸을 생각하니 갑자기 입이 쓰다.
'윤 과장이랑 그냥 소주나 한 잔 할 걸 그랬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실랑이가 있은 후로 며칠째인 오늘까지 서윤이도 아까의 그 소녀처럼 내 눈조차 마주치길 꺼려했다.
방금 전 정류장에서의 그 할머니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할머니의 갈 곳 잃은 먹먹한 눈과 허공을 맴돌던 손사위가 눈에 아른거렸다.
내 모습 같아서….
몇 정거장을 지날 때까지 망설이다 딸에게 카톡을 보냈다.
『서윤아, 학원 끝나면 몇 시니? 엄마 미진 이모 만난다고 아빠한테 너 저녁 챙겨주라는데』
메시지 옆 1자가 없어졌지만 답이 없다.
『서윤아~ 너 저녁 안 챙기면 아빠 엄마한테 혼나. ㅜㅜ 몇 시에 오니?』
역시 1자가 사라지고 1분 후쯤
『8시』
대화가 끊길까 봐 얼른 다시 답을 보냈다.
『그래. 아빠가 시간 맞춰서 피자 시켜 놓을게. 콜라도 시키고, 치킨도 시킬까?』
『됐어』
나름의 화해 시도를 위해 노력했는데 싸늘하게 돌아온 답장에 갑자기 나도 아까 그 할머니처럼 어깨가 축 처졌다.
대화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메시지가 뜬다.
『피자만 시켜』
『콜라는 제로콜라로』
딸의 답장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래. 조심히 와. 이따 집에서 보자. 우리 딸!』
역시 대화를 읽은 채 답은 없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어느새 빗줄기가 잦아들고 있다.
아직 미련이 남은 여름 저녁의 늦은 해는 구름 사이로 빼꼼히 석양을 내민다.
언제 퍼부었냐는 듯 새침하게 변한 소나기는 몇 가닥 남은 빗방울만 똑똑 떨어뜨리고 있다.
마치 우리 서윤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