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편) 윤 과장 ver.
비 오는 금요일, 이번 주도 잘 버텼다.
맥주나 사가지고 들어가서 넷플릭스나 봐야겠다.
“차장님, 오늘 날도 꾸무리하고 금요일인데 퇴근 후 한 잔?"
점심 후, 식당 앞 공짜 자판기 커피를 뽑으며 박 차장님께 물었다. 어제까지 무더위가 기승을 하더니, 이제 조금씩 사그라드는가 싶었는데 오늘부터 주말까지 계속 비가 왔다 그쳤다를 반복한다고 한다. 이런 날은 뭐니 뭐니 해도 퇴근 후 소주가 딱인 날이라 물었다.
내 제안에 솔깃했는지 박 차장님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다가 핸드폰을 보더니 이내 자못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을 내민다.
사모님이 친구를 만나야 한다며 일찍 들어오라는 명이 담긴 카톡 화면을 보고는 ‘오늘은 글렀다.’ 싶어 다 마신 커피잔을 구겨 쓰레기통으로 골인시켰다.
점심 이후에 갑작스럽게 들어온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모두가 다 허겁지겁 보냈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는데 벌써 퇴근 시간인지 MZ사원들이 벌떡벌떡 일어선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라며 눈도 마주치지 않고 허공에 인사를 하고는 우르르 나간다.
“어, 그래~ 조심히들 들어가. 저녁에 비 온대. 우산 챙겨!” 라는 내 말은 닫히는 문 틈에 끼어 들리지도 않을 것 같다.
박 차장님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 정리를 하신다.
“윤 과장도 수고 많았어. 그래도 급한 불 껐으니까, 얼른 들어가. 오늘 하기로 했던 상반기 데이터 정리는 내가 주말에 할게. 딸내미 때문에 나도 오늘은 칼퇴를 좀 해야겠네."
칼퇴에 익숙하지 않은 나와 박 차장님은 왠지 퇴근 시간에 퇴근을 하는 게 민망한 세대다. 분류로 보면 나도 MZ세대라 하고, 당연한 걸 민망해하는 것도 요즘 세대에는 맞지 않는 다는데, 어쨌든 우리는 그렇다.
“아니에요. 어차피 퇴근해야 할 것도 없는데 제가 정리할게요. 들어가서 서윤이 챙겨 주세요.”
“아악! 씨X~ 안 돼!”
데이터를 마이닝하다 양이 많은 지 엑셀이 멈춘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든다.
‘내가 중간 저장을 했던가? 제발 제발 제발~’
숨까지 멈추며 꼼짝 않고 모니터를 바라본다. 몇 차례 모니터가 깜빡이며 데스크톱에서 위잉~소리가 나더니 엑셀의 셀 내에서 커서가 다시 깜빡인다.
‘휴~ 다행이다. X 될 뻔했네.’
즉시 ctrl+S(컨트롤 에스)를 눌러 저장한 후 창을 닫고 그룹웨어 드라이브에 파일들을 옮겨 놓는다.
혹시라도 똑같은 일이 생기면 내가 총무팀에 불려 가는 한이 있더라도 컴퓨터 너 오늘 부순다.
다행히 데이터는 살렸지만, 순간 긴장한 탓에 뒷목까지 뻣뻣하다. 창밖을 보니 회색하늘에 보랏빛 석양이 한 줄 정도 남아있다. 시계를 보니 8시가 조금 안 됐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와서 마저 할 요량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비가 왔다 그쳤는지 땅은 젖어있는데 비는 없다.
흡연이 가능한 등나무 벤치로 가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비가 다시 한 두 방울 떨어지는 듯하다.
핸드폰으로 숏츠를 넘겨보며 혼자 피실 피실 웃고 있는데 우비를 쓴 할머니가 본인 몸보다 한참이나 큰 수레를 밀며 다가온다.
잠깐 비를 피하시려는지 내 옆으로 와 한숨을 쉬며 허리를 편다. 하얗고 숱도 별로 없는 머리가 젖어 쳐져있다. 허리를 폈지만 여전히 굽어져 있는 모습이다. 힘이 드시는지 고부라진 손으로 목에 걸린 수건을 당겨 얼굴을 닦으신다.
담배를 얼른 끄고 인사를 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말을 걸자 할머니께서 쳐다본다.
“어이구~ 많이 모으셨네. 비 오는데 오늘은 그만하시고, 얼른 들어가셔요.”
괜한 오지랖은 아닌가 싶은데 할머니께서 온화하게 미소 지으시며 답해주신다.
“괜찮아요. 소나기 아까도 오다 금방 그쳤어. 금방 그칠 것 같아. 조금만 더 하다 들어갈 거예요.”
수레를 보니 이미 젖은 파지들이 비닐로 얼기설기 덮여있고 살이 구부러져있는 우산도 끼어있다.
남의 일인데 남 일 같지 않아 더 젖을까 봐 수레를 가능한 벤치 안 쪽으로 당겼다.
“아니야. 놔둬. 무거워요. 비 안 올 때 말리면 돼요. 둬요. 둬….”
할머니께서 손사래를 치신다. 민망해하시는 할머니가 더 작아 보인다.
“음… 할머니, 어차피 비 때문에 여기 잠시 계실 거죠?”
“으응? 응, 잠시 비 피하다 가야지.”
“네, 그러면 여기 잠깐만 계세요. 저 올 때까지 잠깐만요. 어디 가지 마세요.”
라고 소리를 지르며 비를 가로질러 로비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가 복사기 옆에 있는 이면지용 A4박스를 비우고 내 책상 옆에 쌓아둔 오래된 종이들을 박스에 담았다. 다시 나가자 비는 점차 잦아들고 있었고, 할머니는 내 쪽을 바라보고 계신다.
“할머니, 이거 가져가시고 오늘은 그만 들어가세요.”
수레의 파지를 고정하는 고무줄을 낑낑거리며 들어 종이 박스를 욱여넣어본다.
할머니는 당황하시며 손사래를 치신다.
“아이고, 총각. 괜찮아. 이거 안 줘도 돼. 사무실에서 나오는 거 폐기해 버려야 한다고 하던데… 저번에 주워가려다가 경비 아저씨가 그러시던데, 이런 거 가져가면 안 된다고…”
맞다. 사실은 사무실에서 나오는 문서는 가능한 파쇄 해서 버려야 한다. 가끔 전사에서 모아 전문 파쇄 업체로 보낼 때 밖에 내두곤 하는데, 그때의 일인가 보다. 엄밀히 따지면 나는 지금 사내 규칙을 어기는 거다.
“에이~ 괜찮아요. 이거 다 제가 작성한 거라서 기밀문서도 아니에요. 그리고 할머니, 저 혼낼 사람 없어요.”
할머니는 당황한 듯 보였지만 내 말에 안심이 되시는지
“그려? 이런 거 줘도 안 혼나? 총각이 대장쯤 돼?”
대장? 뭐… 대장은 아니지만 과장이니까 장은 장이지…
“네, 맞아요. 걱정 마시고, 가져가세요. 그리고 오늘은 꼭 이만 하시고 댁에 들어가셔요.”
할머니는 내가 동여매는 줄이 어설픈지 본인이 줄을 받아 마무리를 하신다.
“응, 고마워. 총각, 내가 줄 건 없구….”
라시며 리어카에 묶여 있던 검은 봉지에서 바나나 우유를 하나 꺼내어 내미신다.
“아이고, 이런 거 안 주셔도 돼요. 할머니 드세요.” 라고 거절하자
“아니야, 난 배 아파서 우유 못 먹어. 우리 손녀딸내미 주려고 샀는데 그… 원쁘라쓰원이라고 하나 더 줬어. 내가 고마워서 그래. 받어”
그렇다면 거절할 수 없다 싶어 바나나우유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이 놈의 회사는 대장이 야근하는데 밥도 안 줘요. 글쎄…. 그래서 배고팠는데 잘 마실게요. 손녀딸 덕분에 제가 호강하네요.”
이제 고인 빗방울만 똑똑 떨어지고 비는 그쳤다.
손수레를 힘껏 밀었다. 할머니는 끝까지 됐다고 하셨지만, 건물 밖까지 만이라도 수레를 밀어드리고 싶었다.
할머니는 가시는 길에 연상 뒤를 돌아보시며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 손으로 들어가라는 시늉을 했다.
바나나우유 뚜껑을 손가락으로 톡 하고 뚫어 꿀꺽꿀꺽 마셨다.
캬하~ 오랜만에 마시니 고것 참 달달하네….
비 오는 금요일, 젖은 셔츠로 남은 데이터와 씨름을 해야 하지만
그래도 인생은 달다.
▽▽ 짝꿍 이야기 - 박 차장 ver. 보러가기 ▽▽
03화 비 오는 금요일 - 제 1편 박 차장 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