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계절 - 강지영 ver.

푸르고 아렸던 오랜 내 연인에게 제 1편) 강지영 ver.

by 은쓰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뛴다. 죽을 것 같은데 살아있는 기분이다.

눈물이 흐르는데 웃음도 난다. 마냥 슬프지는 않은데 기쁜 건 아니다. 뭔가 나도 모르게 가슴속부터 웃음도 눈물도 같이 터져 나온다.

달리는 게 이런 기분인 건가? 오빠는 항상 다투고 나면 화를 내는 대신 러닝을 하고 왔었다. 이런 격한 감정 속에서 스스로 삭이며 나를 받아줬던 거다. 그 긴 시간 동안…

그걸 이제야 알았다.

이제 곧 결승선이 보인다. 결승선에 미리 가 있는 그 사람이 나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다.

우리 참 오래도록 수고 많았다.

그 오랜 시간 당신이 곁에 있어줘서 나도 내가 참 좋았었다.

저기까지 닿으면 이제 우리의 긴 시간은 끝이 난다.




『오빠, 나 이제 퇴근. 모임 잘 마치고 들어가요.』

톡을 하나 남기고 건물 1층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민정이를 만나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휴가 전에 마무리할 것들이 있어 점심도 거르고 일을 했더니 당이 떨어져 초코바라도 까먹으며 가려고 1층 편의점에 들렀다.
초코바를 골라 계산대에 두자 아르바이트생이 영혼 없는 톤으로 “1,500원입니다. 카드 여기다 꽂아주세요.” 라고 한다. 카드를 꽂고 고개를 들어 보니 카운터석 뒤쪽에 포스터가 붙어 있다.



‘으음… 마라톤? 오빠나 나가보라고 알려줄까? 그렇게 뛰는 거 좋아하는데 실컷 뛰라고?’

결제 완료 소리가 나서 카드를 뽑고 초코바를 집었다.

오빠는 오늘 저녁 동호회 모임이 있다고 했고, 나는 내일부터 휴가라 그냥 집에 들어가긴 살짝 아쉬웠는데, 민정이가 ZARA 세일기간이라며 쇼핑이나 하자고 했다. 아직 낮은 기온이 꽤 되지만 아침저녁 쌀쌀함에 대비해 얇은 카디건이 하나 필요했는데 잘됐다 싶었다. 대형 쇼핑센터에서 민정이를 만나 간단히 저녁을 먹고 ZARA에서 쇼핑을 한 후 세일 상품 득템했다며 신나 있던 참이다.


몇 주 간의 프로젝트를 막 끝낸 기념으로 회사에서 프로젝트 TFT에 보상휴가를 이틀씩 줬다. 팀원들 간에 한 번에 쉴 순 없어서 돌아가며 쉬는데 내일부터 내가 쉬는 날이다. 주말까지 껴서 4일의 휴가이니 바빠서 못 읽던 책이나 좀 읽고, 오빠나 만나서 밥이나 먹어야지 싶어 쇼핑몰에 있는 서점으로 향했다.

좋아하는 작가가 신간을 냈다고 해서 그 섹션을 돌며 책을 살펴보고 있는데, 다른 쪽에서 책을 고르고 있던 민정이가 내 쪽으로 다가와 얄쌀하고 고운 눈매를 더 가늘게 뜨며 실눈을 하고는 내 손을 잡아 끈다.

“아,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영문을 모르는 나는 잡아당기는 민정이의 손을 뿌리치며 이유를 물었다. 민정이는 조용하라며 손가락을 입에 대고는 탐정놀이하는냥 갑자기 몸을 슬쩍 숙이며 베스트셀러 코너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책을 펼쳐 들고는 웃으면서 대화를 하고 있는 남녀가 보인다.

아니, 장성준과 어떤 여자? 아니, 여자 애가 보인다.

11년을 봐서 눈을 감고 그리라고 해도 그릴 수 있는 사람인데 갑자기 너무 낯설다. 같은 대학을 나온 CC라서 서로 아는 무리가 거기서 거기인지라 늘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봤는데, 낯선 사람과 함께 있는 모습이라 그런 걸까?

나랑 같이 쇼핑하며 산 블루 셔츠에 fit 해서 예쁜 대도 약간 불편하다고 잘 안 입던 회색 슬랙스에 내가 생일 선물로 사줬던 슬립온을 신고 있다.

분명히 내가 가장 잘 아는 그 장성준이 맞는데…

그리고 왜 나는 지금 바로 그 사람을 부르지 못하고 미어캣처럼 눈만 내밀고 혀를 차고 있는 민정이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거지? 지금 내가 아는 체를 하면, 그리고 괜히 버벅거리는 그 사람을 본다면 아무 일도 아닌데 어떤 일이 될 것 같았고, 괜히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 같아 반대 섹션 쪽으로 걸어갔다.

민정이는 나를 쫓아오며 아무 말을 하진 않았지만, 이 상황이 답답하고 궁금해 죽겠는 표정이다.

“오늘 동호회 사람들 만난다고 했어. 요즘에 클라이밍 동호회하거든…”

민정이는 작게 실눈을 뜨며 되묻는다.

“사람드~을? 여자 사람 아니고?”

그제야 난 오빠에게 온 톡을 내민다.

『응, 쉬고 있어. 난 저녁은 다 먹었고, 2차 갈 사람들 추리고 있는 중이야. 이따 연락할게.』

“2차 갈 사람들 가고 남은 사람인가 보지 뭐…. 가자. 커피나 한잔하러 가자구."

아직도 흘끔거리며 베스트셀러 코너를 바라보는 민정이를 잡아끌며 서점을 나섰다.

결국 휴가 동안 읽을 책은 사지 못했다.


집에 도착해 씻고 TV를 켰다. 흥미 없는 채널을 여기저기 돌린다.

전화가 온다.

“응”

아직 밖인지 약간의 소음이 들린다.

“어, 나 이제 집에 들어가려고…”

“응, 오빠는 술 안 마셨나 보네?”

“응, 2차 간다는 사람들 가고 아닌 사람들은 대충 있다가 왔어.”

“그래? 대충 뭐 했는데?”

“어? 어…. 같이 있던 일행이 뭘 좀 산다 해서 잠깐 같이 골라주고 왔어. 넌 퇴근하고 쭉 쉰 거야? 저녁은 먹었지?”

“…응. 민정이 만났어.”

“아, 그래? 그럼 연락하지 오빠가 그리로 갔어도 됐는데…”

“뭐 하러… 오빤 오빠 모임 있었잖아.”

“그래도 어차피 1차만 끝내고 갈 거라서 데리러 갔어도 됐는데… 요즘 계속 늦어서 피곤했을 텐데 데려다줄 걸 그랬네.”

“아니야. 오빠, 나 잘래. 조심히 들어가.”

“응. 알겠어. 푹 자고, 내일 봐서 나도 모레 휴가 낼 수 있음 낼게. 너 휴간데 혼자 놀기 심심하잖아.”

“뭘… 됐어. 들어가.”

알고 있다.

다른 사람과 서점에서 즐겁게 웃고 있으면서도 피곤한 나를 데려다주지 못해 걱정하는 것도, 거의 집순이인 내가 휴가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란 걸 알며 같이 휴가를 내주려는 마음도 진짜다.

한 가지만 빼고 오빠는 모든 진실을 말했다. 진심이다.

그런 사람이라 아마 내가 모를 그 누군가와 서점에 가서 함께한 시간도 진심이었을 거라는 것을…




휴가를 포함해 주말까지 그동안 바빠서 못 잤던 잠을 실컷 잤고, 깨어서는 커피를 내리며, 청소를 하며, 옷정리를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11년… 아무리 생각해도 적지 않은 시간이다.

오빠는 여느 때처럼 출퇴근을 하면서 연락을 했고, 둘이 만날 일이 없자 늘 하듯이 동네 아저씨들과 하는 족구며, 동호회 모임, 또는 동료들과 술 한 잔을 하는 듯했다. 그렇게 두 어주가 흘렀다.

나 또한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이 대했다. 서로 바쁠 때는 근 한 달 가까이도 만나지 않던 사이라서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는데, 메시지나 통화 속의 공기를 읽었는지 사무실 앞이라며 퇴근 후 저녁 먹자고 기다린다는 메시지가 왔다. 웬일로 국밥이 아니라 맛집을 알아냈으니 타코를 먹으러 가자면서…

서촌에 있는 타코집이었는데 이색적이게도 전통 한옥에 멕시칸푸드를 팔아서 요즘 어린애들에게 핫한 곳인 듯 보였다. 타코는 맛있었고, 너무 요란하지 않은 가게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다.

“와인 한 잔 할래? 사장님이 남미 쪽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 칠레 와인이 맛있어.”

‘맛있어?’

“화장실 가면서 오더 할게. 오면 네가 맛보고 마시겠음 그걸로 주문해 줘.”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에 카톡메시지가 뜬다.

몇 차례 지잉지잉 메시지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 비밀번호는 늘 같은 걸 쓰는 단순한 사람이라 알려주지 않아도 메시지를 볼 수 있다. 그렇대도 한 번도 내가 먼저 오빠의 핸드폰을 열어본 적은 없다. 메시지를 클릭하고 비밀번호 4자리가 깜빡이자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 걔 이름이 이희윤이구나.’

이희윤이라는 사람에게서 온 메시지를 클릭하자 언제 찍었는지 동호회 사람인 듯 보이는 여러 명이 함께 찍은 사진이 전송되어 있다. 클라이밍장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고, 회식 자리 사진도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희윤과 장성준이 얼굴을 맞대고 활짝 웃으며 찍은 셀피까지…

『오빠, 지난번에 동호회 모임 때 찍은 사진이에요! 깜빡하고 이제 보내요~』

메시지창에서 스크롤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어린 시절 엄마 몰래 하이틴 로맨스 소설을 읽을 때처럼 심장이 쿵광거린다. 무엇을 먹고 있다는 음식 사진을 주고받고, 동호회에 관련된 얘기도 있고, 건강과 안부를 전하는 메시지부터, 이런 스타일이 어울릴 것 같다는 옷 링크도… 내 눈엔 저런 옷을 입기에는 주책맞다 생각하는데, 그 아이의 눈에는 저런 옷이 어울릴 것 같았나 보다.

후임직원의 보고서를 읽을 때처럼 감정을 빼고 읽는다면 크게 문제가 될 정도의 메시지는 없어 보인다.

책에 대한 얘기도 있다. 너무나 우습게도 내가 요즘 읽고 있던 책을 장성준이 이희윤에게 추천하고 있다. 책이라면 전공서적 외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책을 좋아해서 둘이 데이트를 할 때도 곧잘 서점에 들르는데, 그때 우리는 잠시 각자의 시간을 갖는 게 암묵적인 룰이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잠시 읽고 있는 동안 오빠는 핸드폰으로 모바일 게임을 하며 흡연구역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고서 내가 책을 다 고르고 나면 그제야 다시 함께다. 그러고는 먹을 것을 조금 사 와서 다시 우리 집 또는 오빠 집에서 따로 또 같이 시간을 보낸다. 나는 책을 읽거나, 일을 하고, 오빠는 밀렸던 OTT를 보거나 동네를 한 바퀴 뛰고 온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늘 함께였어도 각자였다.

그런 그가 서점에서 생판 모르는 여자애가 고르는 책을 같이 보며 웃고 있었다.

이제는 매일 먹는 서로의 식사 메뉴쯤은 궁금해하지 않는데 그 애가 무얼 먹었는지를 묻는다.

내가 읽은 소설 얘기를 들려주면 “소설 말고, 뉴스도 좀 봐” 라고 하던 그 사람인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오쿠다 히데오’ 이름을 매번 헷갈려서 ‘오타쿠 히데오’라고 하면서 그 애에게는 그 작가의 책을 추천한다.


몇 주 전 그날,

서점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지 않은 척 민정이를 잡아 끈 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아는 장성준의 표정이, 지금은 기억도 안 날 만큼인 11년 전쯤의 장성준이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었다는 걸 알아서였다. 단순하고 조금 무딘 사람이지만 그래서인지 오히려 눈빛은 누구보다 솔직하다.

그래서 항상 대화를 할 때 오빠의 눈을 자주 봤는데, 어느샌가 그러지도 않았다. 언젠가부터는 늘 비슷한 색과 온도가 된 그 사람의 눈빛은 나에게 더 이상 흥미롭지 않았다. 그런 그 사람의 눈에 이젠 내가 아닌 모르는 사람이 비친다.

와인을 가지고 온 사장님과 오빠가 함께 자리로 왔고, 핸드폰을 내려놓는 내 손을 봤겠지만, 사장님의 이어지는 와인 설명에 우리는 남은 타코와 와인을 먹고 나왔다.




고등학생 시절 신입 교사로 오신 사회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너네 대학에 가잖아. 제일 조심해야 하는 게 뭔지 알아?”

“F학점 맞는 거요?”

“아니, 복학생 오빠야. 복학생 오빠한테 물리잖아. 그럼 나처럼 된다. 내내 연애하다가 나처럼 이렇게 물려서 시집간다니깐… 너네는 꼭 이 사람 저 사람 많이 만나보고 선택해라.”

“하하하. 뭐예요~ 쌤~ 결혼 안 하시면 되잖아요. 그러면…”

“그게 또 그렇게 되는 줄 아니? 못 헤어져. 어쨌든… 절대, 꼭! 너네는 복학생 오빠한테 물리지 않도록! 45페이지 편다.”

그런데 그게 나였다. 여고시절 사회 선생님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셨는데, 복학생 오빠에게 물린 신입생이 바로 나였다.

대학에 입학한 어색함이 가시고 학과 활동에 재미를 붙여갈 때쯤인 5월, 군제대 후 2학기에 복학 예정인 선배들이 학교에 놀러 왔다. 나이가 들수록 나이차는 크게 느껴지지 않지만 스무 살이었던 내게 네 살쯤 많은 선배는 약간 불편하게 느껴지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날 잠시 어울렸던 한 선배는 2학기가 되자 다시 나타났다. 운동을 좋아해서 복학 전에 워터파크에서 가드를 했다며 정말 새까매진 얼굴을 하고 공강 시간이면 어김없이 운동장에서 축구나 농구를 하고 있었다. 나도 공강시간이 되면 동기들과 때로는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스탠드로 다가와 아무렇지 않게 내가 마시던 아이스커피를 뺏더니 쭉쭉 들이켰다. 황당한 채 쳐다보고 있는데 까만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고는

“목이 너무 말라서… 내가 커피 뺏어 먹었으니 한 잔 사줄게. 커피 한잔하러 갈래?”

라고 했다. 그렇게 매일 커피 한 잔, 학식을 한 끼 하다가 자연스레 연애 감정으로 이어졌다.

유년 시절에 동급생 남학생들과의 풋내기 연애나 설렘의 감정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결국 내 인생의 대부분의 첫 경험(?)은 모두 장성준이었다.

그렇게 11년을 만났다. 내가 막 서른을 넘기자 양 쪽 집에서 결혼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저 우리 둘이 알아서 할 일이라며 양가 부모님을 자중시키는 것도 각자의 몫으로 뒀다.

그렇게 언젠가부터 우리는 각자가 할 일을 하며 서로라는 이름으로 지냈다.


타코를 먹은 날 가게를 나오면서 대리를 부르는 그에게 내가 한 말은 기껏

“여기도 그 애랑 왔었니?”

였다.

“어? 무슨 소리…야…?”

묻긴 했지만 대답은 듣지 않은 채 앞서 걸었다. 주차된 곳을 지나쳐 걸었다. 그러고는 오는 전화를 받지 않은 채 며칠이 지났다. 조금 더 근사한 말이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때 그 시간 내내 내 머릿속에는 ‘그 아이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였다.

당연히 너무나 잘 안다. 어떤 이유에서건 처음 와 본 식당에서 다른 사람과 있어도, 맛있는 걸 먹다 보니 나랑 같이 와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너무나 장성준스럽다는 것을…

물론 11년을 만나면서 항상 평화의 시간만 있던 것은 아니다. 당연히 헤어짐과 다시 만남의 반복이 있었다. 아주 길게는 반년 가까이도 연락을 하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결국엔 다시 돌아왔고, 돌아갔다.

이보다도 더 사소한 일로도 헤어져보기도 했고, 사소함이 또 다른 열정이 되어 더 뜨겁게 사랑한 적도 있었다. 먼저 손을 내민 건 대부분 오빠였지만 종전의 시그널은 내가 보냈었다.




야근을 마치고 퇴근을 하며 1층 편의점에 들렀다. 냉장고에서 옥수수수염차를 한 병 꺼내 계산대에 올려놓는다.

“2,100원이요. 1+1 행사니까 하나 더 가져가세요. 카드 여기 꽂아주세요.”

아르바이트생 뒤로 얼마 전에 본 포스터가 다시 보인다.


GO24 편의점 10Km 추계 마라톤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신선한 가을 강변을 달리는 낭만을 만끽하세요.


“저거, 응모 끝났어요?”

아르바이트생은 내 손가락을 따라 뒤로 시선을 돌린다.

“아, 아니요. 이번 주 금요일까지 응모예요.” 라며 몸을 비틀어 본인에게 가려져있던 응모기간을 보여준다. 다시 한번 포스터 내용을 읽고 있는데 직접 가 냉장고에서 옥수수수염차를 한 병 더 가져다 내민다. 한 병을 더 받다가 아르바이트생에게 도로 내민다.

“학생 한 병 마셔요. 난 한 병이면 돼서…”

라며 카운터에 한 병을 두고 나왔다. 전철역까지 걸어가면서 홈페이지에 들어가 공고 내용을 살폈다. 아르바이트생 말대로 응모는 금요일… 즉, 내일까지이고 마라톤은 3주 뒤에 개최된다.


전철에 올라타 카카오톡을 연다. 사실 매일 확인하긴 했지만 친구 목록에는 여전히 오빠가 제일 위에 있고, 대화창은 저 아래로 내려가 있다. 내 프로필은 지난여름에 놀러 간 바닷가에서 찍은 하늘 사진이고 오빠는 바닷물에 비친 우리 둘의 그림자 사진을 올려뒀었다. 그리고 오빠도 나도 프로필 사진 목록에 있는 함께 찍은 사진은 그대로다.

프로필을 클릭하고 잠시 고민하다

『오빠, 우리 마라톤 같이 해볼래?』

라며 톡으로 편의점 마라톤 공모 링크를 보냈다.

채 한 정거장을 다 가기도 전에 오빠에게서 답이 온다.

『마라톤? 너 뛸 수 있겠어? 생각보다 힘들 텐데…』

『응, 나도 한 번 도전해 보지 뭐… 우리 같이 뛰자.』

내 메시지를 읽었지만 한참 답이 없다.

『그래. 그러자.』

『응, 내가 신청하고 다시 연락할게. 잘 지내.』

역시 메시지를 읽고는 한참 답이 없다. 화면이 꺼지고 나자 답이 온다.

『그래. 알겠어. 너도…』

몇 주 만의 종전 시그널은 엉뚱하게도 마라톤에 대한 제안이다. 망설였겠지만 왜인지 묻지도 않고 내가 뛸 수 있을까를 걱정하는 것도 장성준스럽다.

손에 들린 옥수수수염차 뚜껑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하다. 목부터 가슴, 명치쯤까지 스윽-내려가는 기분을 느끼고는 크게 한 번 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다 보니, 준비가 필요했다. 퇴근 후에는 동네 공원에서 스트레칭도 하고 가볍게 걷기, 달리기를 했다.

오빠는 달릴 때 호흡하는 법, 무릎이 다치지 않게 뛰는 법, 스트레칭하는 영상 링크를 보내줬다. 민정이는 드디어 미쳤다면서 ‘달밤에 뛰는 미친X 잡으러 왔다.’ 는 민정스러운 위로를 해주러 가끔 나와 함께 달려줬다.




약 한 달 반 만에 만난 그는 어제 본 것처럼 당연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새 살짝 야윈 것도 같다.

“연습은 좀 했어? 너 정말 뛸 수 있겠어? 10Km 도 생각보다 쉽지 않은데….”

“괜찮아. 뛰다 힘들면 조금씩 걷지 뭐… 그래도 결승선까지만 가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오빠가 나를 바라본다. 사실 네 살 차이는 큰 차이도 아닌데 언제나 애잔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처음에는 그 눈빛에 설렜는데, 어느 순간에는 나를 애 취급하나 싶어 화도 났었다. 그 시간도 지나고 나서는 익숙함에 나를 바라보는 오빠의 눈빛의 온도를 읽지 못했다.

“오빠, 내 생각하지 말고 오빠는 오빠 페이스대로 달려. 난 나대로 할 거니깐 절대 도와줄 생각하지 마.”

무언가 말하려 하다 말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고는 구부리고 앉아 내 운동화 끈을 풀어 다시 한번 꼭 매어주더니 날 올려다 바라본다. 오랜만에 찬찬히 그 사람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 사람도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봤다. 너무나 익숙하고 너무나 똑같다. 당신과 나는 같은데 우리 주변의 온도가 달라진 거다. 그저 그런 것뿐이다.

하지만 서로 알고 있다. 그 온도는 우리가 바꾼 거라는 것을…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함께 사회자가 한껏 참가자들의 흥을 돋우며 마라톤의 출발 신호를 알린다. 우르르 뛰어나가는 사람들 무리에 우리도 있다.

나도 한 발을 떼었다. 오빠도 한 발을 뗀다.

어느 정도 달려가자 거리가 벌어진다. 오빠는 뒤를 돌아 종종 나를 쳐다봤다. 그때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어서 먼저 가라는 시늉을 했다.



숨이 찬다. 오빠가 보내준 영상을 보고 호흡법을 열심히 익혔는데도 쉽지 않다. 포기하고 싶기도 한데 그래도 발을 딛는다.

그래도 괜찮다. 더 긴 시간을 달려왔는데, 10Km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린 11년 동안 함께였다. 어떤 날은 내 뒤에 오빠가 있음에 든든했고, 어떤 날은 오빠의 등 뒤에서 외로웠던 적도 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그냥 나란히 걷고 있었다.

걷든 뛰든 어차피 결승선은 정해져 있던 건데 그저 속도를 늦춰 천천히 누구랄 것 없이 닿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있었다. 우리가 갈 수 있는 것도 거기까지란걸...

아무 말을 하지 않았어도 그도 알고 있을 거다.

결승선에 도착하고 나면 함께여서 푸르렀고, 어려서 아렸던 너와 나의 계절이 끝난다는 걸...


하지만, 안다.

이전만큼 푸르지 않아도 따사롭지 않아도 언젠가 또 다른 계절이 다시 돌아올 거라는 걸...

안녕, 나의 여름이자 겨울이던 첫사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