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계절 - 장성준 ver.

푸르고 아렸던 오랜 내 연인에게 제 2편) 장성준 ver.

by 은쓰다

결승선에 들어서서 깊이 숨을 들이쉬자 귓속에서 심장이 뛴다. 숨이 턱끝까지 찰 정도로 뛰어본 사람은 안다. 심장이 가슴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귀에도, 손끝에도 발끝에도 있는 것 같은 기분을...

11년 전 그 애를 처음 본 날도 내 심장이 귀에 달린 줄 알았는데...

어느새 익숙함에 젖어 내 심장박동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없다. 내 심장 안에서 오래도록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나비 같은 그 아이가 이제 날갯짓을 멈추려 한다. 그동안 내 마음 여기저기 두드리는 걸 알면서도 모른 채 한 날도 있었다.

호흡을 정리하며 저기 멀리서 오는 그 애를 기다린다.

손을 크게 흔드는데 눈물이 난다. 씩씩하게 한 발씩 내딛는 그녀를 보니 웃음도 난다.

우리 참 오래도록 수고 많았다.

곧 있으면 그녀도 이 결승선에 도착한다.

그녀가 도착하면 이제 우리의 긴 시간은 끝이 난다.




『오빠, 나 이제 퇴근. 모임 잘 마치고 들어가요.』

운동을 좋아하는 회사 후배가 추천해 얼마 전부터 나오고 있는 클라이밍 동호회 회식이다. 클라이밍 연습에는 빠지지 않고 나갔는데, 회식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부분 20대 대학생, 사회 초년생들이고, 내 또래는 회사 후배와 나, 두 분의 형님이 있는 모임이다.

운동을 하면서 서로 격려해 주고 함께 땀을 흘리다 보면 만난 기간 대비 친밀도가 급속해지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다들 어색하진 않았지만 함께 어울리는 건 왠지 어색해서 몇 차례 회식을 거절했었다.

1차로 저녁을 먹은 후 2차를 가네 마네하는 와중에 톡을 확인하니 지영이한테서 톡이 와있다.

『응, 쉬고 있어. 난 저녁은 다 먹었고, 2차 갈 사람들 추리고 있는 중이야. 이따 연락할게.』

라고 답을 한 후 2차까지는 눈치껏 빠져주는 게 좋을 듯하여 집으로 간다고 했다. 같이 가자며 붙잡는 사내놈들의 손을 가볍게 토닥이며 ‘다음에…’ 라고 하자

“형님, 그럼 다음에는 꼭 같이 가세요! 조심히 들어가십쇼~” 라며 인사를 하길래 다시 한번 뒤돌아 손을 흔들고는 돌아섰다. 몇 걸음 가는데 누군가 통통통 뛰어오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동호회에서 알게 된 희윤이란 여자 후배가 부른다.

“오빠! 저도 같이 가요.”

“어~ 너도 2차 안 가게? 왜 같이 가서 맛있는 거 더 먹지 그래?”

“에이~ 오빠 안 가면 저도 안 가요. 헤헷”

요즘 애들 말대로 ‘무슨 의미?’ 란 생각이 들었지만 별 뜻 아니지 싶어 같이 걸었다.

“오빠는 어디로 가세요?”

“나? 여기 옆에 쇼핑몰에 주차하고 온 거라 그리로 가려고… 너는?”

“와~ 잘됐다. 저 거기 서점 가야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서점? 아~ 2층에 있는 교보문고?”

“네! 맞아요. 가보셨어요? 우와~ 대박~”

역시 어린애들은 귀엽다. 아니, 이게 뭐 그렇게 신기한 일이라 대박인 건지…

당연히 많이 가봤다. 내 여자친구는 책을 좋아해서 서점에 자주 들른다. 나는 책이랑은 담을 쌓은 지 오래라서 여자친구가 서점에 가면 나는 잠깐 담배를 태우고 온다. 책을 안 읽어도 지영이가 항상 읽은 내용을 설명해 주기 때문에 웬만한 소설 내용은 제목을 들으면 안다. 내 여자친구는 초등학생 때부터 문학소녀 마냥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감수성도 풍부하고 차분한 애다. 반면 나는 운동, 술, 사람을 좋아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서로 다른 우리가 이 긴 시간을 함께하는지 서로 신기해하면서도 또 그래서 서로를 너무 좋아한다.

어차피 차를 빼러 가야 했고, 크게 늦지도 않은 시간이라 그 애를 따라 서점에 갔다.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이것저것 살피던 그 애가
“이 책은 어때 보여요? 표지가 너무 예뻐요. 저는 책 내용 보다 표지가 예쁘면 그 책을 사고 싶더라고요. 앗! 이 책도 있네. 혹시 이 작가 아세요? 요즘에 대학생들 필독 도서래요. 교수님이 읽어보라고 했어요.”

재잘재잘 아기새 마냥 이 책 저 책을 들며 책 한 권마다 한 마디씩을 덧붙인다.

밝음이 예쁜 아이다.

그렇게 몇 권을 더 들었다 놨다를 하더니 교수님이 읽어보라 했다던 책을 골라 계산대로 간다. 나이 차이가 몇인데 학생이 책 한 권 계산하는 걸 그냥 보기가 뭐 해 대신 계산을 해줬다.

“와~ 대박! 저 이 책 10번 읽을 거예요. 오빠가 사준 거니깐요. 감사합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나까지 기분이 밝아진다. 책을 고르다 살짝 늦어진 시간이라 집까지 데려다줘야 할지, 그냥 가라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그 애가 먼저 핸드폰을 보고는

“오잉~ 제 친구가 이 근처에서 소개팅하고 이제 끝났다고 톡이 와서요. 저 친구 좀 만나고 갈게요. 오빠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라고 한다.

다행이다.

먼저 가라고 손짓을 한 후 주차장으로 가며 지영이에게 전화를 했다.


“응”

집인지 TV소리가 살짝 들린다.

“어, 나 이제 집에 들어가려고…”

“응, 오빠는 술 안 마셨나 보네?”

“응, 2차 간다는 사람들 가고 아닌 사람들은 대충 있다가 왔어.”

“그래? 대충 뭐 했는데?”

“어? 어…. 같이 있던 일행이 뭘 좀 산다 해서 잠깐 같이 골라주고 왔어. 넌 퇴근하고 쭉 쉰 거야? 저녁은 먹었지?”

“…응. 민정이 만났어.”

“아, 그래? 그럼 연락하지 오빠가 그리로 갔어도 됐는데…”

“뭐 하러… 오빤 오빠 모임 있었잖아.”

“그래도 어차피 1차만 끝내고 갈 거라서 데리러 갔어도 됐는데… 요즘 계속 늦어서 피곤했을 텐데 데려다줄 걸 그랬네.”

“아니야. 오빠, 나 잘래. 조심히 들어가.”

“응. 알겠어. 푹 자고, 내일 봐서 나도 모레 휴가 낼 수 있음 낼게. 너 휴간데 혼자 놀기 심심하잖아.”

“뭘… 됐어. 들어가.”

피곤한 건지 목소리가 좋지 않다. 사실 나는 민감하지 않은… 솔직히 둔감한 편이지만 11년쯤을 같이 한 사람의 말투나 호흡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운전을 하며 후회를 했다. ‘모임이 끝나고 바로 전화해서 데리러 갈걸…’ 하는 생각을 하는데 카톡이 온다.

지영인가 싶어 메시지를 클릭하니 내가 준 책을 들고 씽끗 웃으며 찍은 셀카가 와 있다. 희윤이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책 잘 읽을게용~ 제 친구는 소개팅남 맘에 안 든다고 화나 있어요. ㅠㅠ 저도 기분 안 좋은 척 연기 중이예욧! 사실 저는 오늘 엄청 기분이 좋은데 ㅋㅋ 조심히 들어가세요~』

운전 중이라 “응, 잘들어가.” 라고 음성으로 text를 입력해 전송했다.

피식 웃음이 난다. 한 번 웃고 나니 계속 피실거리며 웃음이 난다.

‘장성준… 자중하자. 더 하면 주책이다. 너…’




그날 통화에서 느낀 게 맞는 것 같다. 지영이는 휴가인데도 만나자는 소리가 없고, 밀린 집안일과 잠을 자야겠다며 내 연락에 답이 뜸하다.

11년… 아무리 생각해도 적지 않은 시간이다.

그래서 알겠다. 무언가 잘못됐다.

여느 때처럼 출퇴근하면서 연락을 했고, 둘이 만날 일이 없어서 동네 형님들과 가끔 하는 족구를 했고, 클라이밍동호회에서 실내 클라이밍도 하고 끝나고 가벼운 회식도 했다. 다행히도 어린애들이 내 농담을 잘 받아 주어 그날은 평소보다 술도 조금 과했다. 요즘애들은 왜 이렇게들 사진을 찍어대는지 정신없는 자리였다. 회사를 마치고 회사 후배들과도 저녁 겸 반주도 하고 그렇게 두 어주가 흘렀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 평소처럼 메시지를 주고받았지만 아무래도 아무런 상황이다.


나 또한 별 일 없이 평소처럼 지냈지만 지영이에게 말하지 못한 저녁 약속이 한 번 있었다. 며칠 전, 희윤이가 얼마 전 강의 시간에 과제가 있었고, 마침 지난번 서점에서 고른 책에 대한 내용에서 몇 문장을 인용해 작성했는데 그 수업에서 그 책을 읽고 과제에 인용한 사람이 본인 혼자였어서 교수님이 좋은 점수를 주고, 강의 시간에 칭찬을 받았다며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저녁을 꼭 사겠다고 했다.

네가 고른 거지 내 공은 없다고 몇 차례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어차피 그날도 지영이는 점심 이후 내 메시지에 답이 없어서 혼자인 저녁이었고, 계속 오는 호의를 마냥 거절할 수만은 없어 식사를 같이 했다. 서촌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이었는데 한옥 인테리어에 멕시칸푸드를 파는 곳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핫플레이스인데 본인만 못 가봤다며 꼭 같이 가자고 조르길래 함께 갔다.

고즈넉한 인테리어에 간편하지만 맛있는 타코를 먹었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대화가 길어지자 자연스레 와인까지 한 잔 하며 얘기를 나누게 됐다. 마침 그날은 점심 이후 보낸 내 메시지에 지영이의 연락이 없었고, 저녁 안부를 먼저 전하진 않았던 것뿐이다. 이런저런 얘기 속에는 11년간 내 그림자 같은 여자친구에 대한 얘기도 있었고, 기나긴 우리의 연애를 길게 말하진 않았지만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만나고 있다는 말에 희윤이는 역시 「와~ 진짜요? 대박~」 이라며 오랜 세월의 연애가 신기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대리를 불러 희윤이네 집 앞까지 바래다줬고, 아파트 로비 앞에서 오늘 식사가 어땠고, 뭐가 재미있었고, 오빠를 만나서 즐거웠다는 그 아이의 재잘거림이 잠시 이어진 후 로비로 들어갔다. 희윤이는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그 잠깐 동안에도 뒤를 돌아보며 손을 크게 흔들며 웃는다.

저 유리문너머의 어린 참새 같은 그 아이가 포로로 날아와 내 어깨에 앉을까 봐 갑자기 겁이 났다.




지영이와는 별 다름없이 며칠이 또 지났다. 안 되겠다 싶어 조금 이르게 퇴근을 하고 회사 앞으로 갔다. 다행히 별 말없이 저녁을 먹으러 갔다. 얼마 전에 간 그 타코집은 들어설 때부터 지영이가 딱 좋아할 맛에 좋아할 분위기라 기분도 풀어줄 겸 같이 가야겠다 싶었었다. 역시 취향저격인지 별말 없이 편안한 표정으로 가게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와인 한 잔 할래? 사장님이 남미 쪽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 칠레 와인이 맛있어.”

“…”

“화장실 가면서 오더 할게. 오면 네가 맛보고 마시겠음 그걸로 주문해 줘.”

고개를 슬쩍 끄덕인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마침 사장님이 테이블로 와인을 서빙하러 가신다. 앉아있던 지영이가 사장님과 나를 보고는 내 핸드폰을 놓는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사실 알 필요도 없는 얘기라고 생각했었다. 일부러 속이려던 것도 아니고, 속일 만큼 깊은 마음도 아니다. 어쩌다가 알게 된 참새 같은 아이가 단조로운 내 삶에 잠시 날아다닌 것뿐이고, 그렇게 또 포로로 날아갈 것이다.

잠시 내 마음에 모습을 비추고 갔대도 어차피 난 지영이와 함께일 거다.




11년 전 5월,

군대를 제대하고 일주일도 되지 않은 날 먼저 제대한 동기가 ‘복학 전에 학교나 놀러 가 보자’ 고 하여 몇몇이 어울려 학교로 갔다. 자주 가던 학과 휴게실인데도 막상 어색했다. 뻘쭘해하며 들어가는데 알고 지내는 몇 명의 후배들과 처음 보는 신입생들이 있었다. 낯선 얼굴들이 궁금하고 어색해 쭉 둘러보는데, 하얀 얼굴에 작은 입술을 지닌 신입생 여자아이가 나비같이 큰 눈을 깜빡이며 지 친구와 웃으며 얘기를 하다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그 순간 심장이 쿵쾅거렸고, 가슴에 있던 심장이 귀에 붙은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복학 전 용돈 벌이 겸 좋아하는 수영이나 실컷 하려고 워터파크에서 가드일을 했고, 여름 내내 잘 구워진 내 피부는 두피까지 까맣게 탔다. 2학기가 되어 복학을 했고, 다행히 같이 다니던 동기들이 비슷한 시기에 입대-전역을 했던 터라 적응을 하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신입생들과 놀기에는 눈치가 보여 공강 시간에는 축구나 농구를 하면서 우리끼리 외로움을 달랬다. 그때마다 가끔씩 스탠드에 앉아있던 나비 같던 그 아이가 보였다.

어느 날,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던 그 애에게 다가가 마시던 커피를 뺏어 쭉 마셔버렸다. 운동을 한 터라 목이 너무 말랐고, 커피 한잔하러 가자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 열띤 심장을 잠시 식혀야 했다.

그 아이는 그 큰 눈으로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본다.

“목이 너무 말라서… 내가 커피 뺏어 먹었으니 한 잔 사줄게. 커피 한잔하러 갈래?”

라고 했다. 그렇게 매일 커피 한 잔, 학식을 한 끼 하다가 자연스레 연애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11년을 만났다. 네 살 터울이다 보니 양가 부모님들도 크게 반대하지 않으셨고, 어느 날부터 결혼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결혼을 하겠지만, 아직은 둘 다 지금이 나쁘지 않아서 지내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현실적 부담감이 드는 걸 서로 피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각자가 각자의 부모님을 방어하며 둘 간에는 결혼 얘기를 입에 올리진 않았다.

그렇게 언젠가부터 우리는 각자가 할 일을 하며 서로라는 이름으로 지냈다.


타코를 먹은 날 가게를 나오면서 대리를 호출하고 있는데 지영이가 말한다.

“여기도 그 애랑 왔었니?”

“어? 무슨 소리…야…?”

묻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녀가 걸어간다. 주차된 차를 지나쳐서도 걸어간다.

알고 있단 걸 알았고, 아까 손에서 내려놓던 핸드폰에서는 내가 읽지 않은 희윤이의 메시지가 읽어져 있었다.

메시지를 보지 않았대도 지영이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안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으면,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는 나를 다 알았다. 그래서 가끔은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은 적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이전보다는 나를 감출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 착각했다.

아무 말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으면 아무 일이 없는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지영이는 알고 있다. 요즘의 내 마음에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게 본인이 아니라 참새 같은 그 아이라는 것을…

11년을 만나면서 항상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무디고 지영이는 예민해서 사실 서로의 마음에 상처가 된 날도 많았고, 순간순간 새로운 자리에서 새로운 사람을 보며 호기심인지 호감인지를 느낀 적도 있다. 그렇지만 그건 언제나 잠시였고, 그래도 나에겐 항상 지영이었다. 한 번도 크게 내색한 적 없었지만, 아마도 지영이는 모든 걸 알고 있었을 거다.

그렇게 잠깐도 지영이는 묵묵하고 조용히 기다려줬다. 그리고 지영이에겐 사실 그 잠깐도 없이 11년간 오롯이 나였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다려주지 않을 것 같다.




퇴근 후 한잔하자는 후배의 말을 거절하고 집으로 왔다. 지영이가 읽고 나서 두고 갔던 몇 권의 책이 테이블 위에 있어 먼지를 털어 책장에 넣었다. 지영이는 평소에는 꽤 조용하고 차분한 아이인데도, 읽은 책의 내용을 설명할 때면 모노드라마를 하는 듯이 목소리를 바꿔가며 스토리와 주인공들의 주요 대사를 묘사해 줬다. 그러고는 꼭

“오빠는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이 주인공이 왜 이런 선택을 했을 것 같아?”

라고 묻는다. 대부분의 나의 답은

“글쎄… 뭐… 그러고 싶었나 보지?”

라는 정도의 꽤나 성의 없는 대답이다. 그런데도 지영이는 늘

“내 생각에는 이 주인공도 사실은…”

이라며 진지하게 설명을 한다. 그러면 나는

“아~ 몰라 몰라. 그게 뭐 중요해. 치킨이나 시켜 먹자. 저녁 먹고 뛰고 왔더니 출출하다.”

이런 내 무성의한 대답에도 지영이는 서운한 내색 없이 아무렇지 않게 치킨을 시킨다.

꽂는 책을 보며 생각했다.

‘이 주인공은 무슨 마음일 거라고 그랬더라? 그때 잘 들어줄걸…’

책장을 정리하는데 톡이 온다.


『오빠, 우리 마라톤 같이 해볼래?』

라는 메시지와 링크가 있다. 클릭해 보니 ‘GO24편의점 10Km 추계 마라톤’ 이라고 쓰여있다.

‘마라톤? 생전 뛰지도 않는 애가 왜지?’

『마라톤? 너 뛸 수 있겠어? 생각보다 힘들텐데…』

라고 답을 보냈다.

『응, 나도 한 번 도전해 보지 뭐… 우리 같이 뛰자.』

이미 결정을 한 듯 빠르게 답이 온다. 몇 주 만에 좋아하지도 않는 운동을, 그것도 초보로서 쉽지 않은 마라톤을 하자는 제안을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왜냐고 묻고 싶었다. 아니, 사실 괜찮냐고 묻고 싶었다. 괜찮든 안 괜찮든 이 아이는 마라톤을 나가고 싶어 한다. 우리 둘이…

『그래. 그러자.』

라고 답을 했다.

『응, 내가 신청하고 다시 연락할게. 잘 지내.』

잘 지내… 너무나 일상적이지만 우리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세 글자 잘 지내…

11년간 딱 한 번 본 적 있는 말이다. 5년 전 반년쯤 헤어졌을 때… 그때도 지영이가 잘 지내라고 해서 나는 잘 지냈다. 친구들도 많이 만났고 잠깐잠깐 여자도 만나보고, 술에 운동에 하고 싶은 것을 실컷 했지만 잘 지내지지 않았고 그래서 다시 지영이와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지영이가 또 잘 지내라고 말한다. 한참을 망설이다 답을 했다.

『그래. 알겠어. 너도…』


아무래도 운동과는 거리가 먼 녀석이라 걱정이 돼서 ‘러닝 시 다치지 않는 자세, 스트레칭 영상, 호흡법’ 등 초보 러너가 볼만한 영상 링크를 찾아 직접 영상을 본 후에 도움이 될 것들을 공유했다.

그럴 때마다 『고마워. 잘 볼게』 라는 간단한 메시지가 왔다.

그렇게 아직 내 카톡이 차단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약 한 달 반 만에 만난 그 애는 이전보다 밝은 모습이다. 안 하던 운동을 해서인지 무언가 조금 더 밝은 에너지가 느껴진다. 반가움에 크게 손을 흔들었다.

“연습은 좀 했어? 너 정말 뛸 수 있겠어? 10Km 도 생각보다 쉽지 않은데….”

라고 첫 말을 건넸다.

“괜찮아. 뛰다 힘들면 조금씩 걷지 뭐… 그래도 결승선까지만 가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11년 전과 똑같이 큰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이는 내가 많은데도 항상 저 깊은 눈빛으로 아무 말하지 않고 바라볼 때면 뭔가 잘못한 게 없어도 고해성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오빠, 내 생각하지 말고 오빠는 오빠 페이스대로 달려. 난 나대로 할 거니깐 절대 도와줄 생각하지 마.”

은근히 고집이 세다는 걸 알아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달리라는 응원이다. 그러고는 구부리고 앉아 지영이의 운동화 끈을 풀어 다시 한번 꼭 매었다. 고개를 들어 지영이를 올려다 바라봤다. 그림자가 져서 표정이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어떤 눈으로 날 바라보는지 안다. 내가 조금 잘못했을 때도 잘했을 때도 항상 깊고 묵직한 눈빛으로 날 바라봐줬다. 이렇게 맑고 큰 그 눈에 반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젠가부터 우린 서로 마주 보지도 않은 채 각자 할 일을 하면서 대화를 했었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함께 사회자가 한껏 참가자들의 흥을 돋우며 마라톤의 출발 신호를 알린다. 우르르 뛰어나가는 사람들 무리에 우리도 있다.

지영이가 한 발을 뗀다. 나도 한 발을 떼었다.

어느 정도 달려가자 거리가 벌어진다. 생각보다 페이스가 처지지 않게 쫓아오는 듯했는데, 중반 이상 오니 거리가 벌어진다. 달리는 중간중간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씩씩하게 잘 오고 있어 기특하고, 서글펐다.

뒤로 돌아가 손을 잡고 같이 뛸까도 고민했다. 우리 그냥 같이 뛰자고 하고 싶었다. 그때마다 지영이는 손을 내저으며 어서 먼저 가라는 시늉을 했다.


또다시 조금 더 달리다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각각의 속도로 뛰는 사람들 중에 저 멀리 그녀가 보인다.

힘들어 보이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속도를 냈다 줄였다 달리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11년을 함께 걷기도, 뛰기도 했다. 나란히 달릴 때도 떨어져 걸을 때도 있었지만 항상 함께였다.

함께인 건 알았는데 언젠가부터는 어디로 가고 싶은지 생각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어쩌면 생각하기 부담스러웠던 걸까? 아니면, 어디를 가든 상관이 없어서 그냥 그렇게 왔던 걸까?

그런데 알고 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길이 끝나고 결승선에 들어서면 우리라는 이름으로 너와 나는 끝이라는 걸...

그리고 지금 내가 잠시 멈춰 선 것처럼 우리의 시간을 또 한 번 잠시 붙들 수도 있다는 걸...


하지만, 안다.

우리는 끝이나도 푸르던 너의 계절 덕분에, 내 청춘이 찬란했고, 뜨거운 나의 계절을 보드랍게 감싸준 너였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계절 속에, 가슴속에 찬란하게 빛나던 순간으로 남을 거라는 걸…

하지만 결국 이 계절의 끝은 올 거고 늦었지만 싫든 좋든 다음 계절을 맞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나의 봄이었던 아이야. 안녕.


▽▽ 짝꿍 이야기 - 강지영 ver. 보러가기 ▽▽


05화 서로의 계절 - 푸르고 아렸던 오랜 내 연인에게 제 1편) 강지영 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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