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 초록색 -그 여자 ver.

그 사이 3초의 짧은 시간 제 1편) 그 여자 ver.

by 은쓰다

그날은 눈이 많이 왔고, 예쁘다는 감상에만 젖기엔 미끄러운 출근길이 막막했다.

제발 넘어져서 아침부터 망신살 뻗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전철역을 나섰다.


아침부터 여기저기의 단톡방에서 귀여운 이모티콘과 화려한 트리 이미지들이 쏟아진다. 작년에는 퇴근 때 회사 앞 사거리를 빠지는 데만도 1시간이 걸렸던 게 생각나 전철을 탄 덕에 단톡방에 쏟아지는 인사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다.

심지어 비즈니스 상 주고받는 톡방에서 마저 광고주인 사장님께서 반짝반짝 움직이는 꼬마 눈사람이 Merry Christmas! 라고 손을 흔드는 GIF 이미지를 보내주셨다.

편안한 톡방에서야 그냥 보고 말 수 있지만, 읽씹 할 수가 없어

『사장님, 안녕하세요! 가족들과 따뜻하고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올 한 해도 감사했습니다~』

스마일 이모티콘까지 붙일까도 고민했지만, 느낌표와 물결표 정도면 충분한 성의 표시라 생각했다.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답장이 온다.

송팀장도 메리크리스마스! 벌써 우리 알고 지낸 지 3년이야. 올해 지나기 전에 좋은 소식 들려줘요.』

‘에효~ 사장님, 저한테 좋은 소식은 내년에 광고 예산 많이 써주시는겁니다.’ 라고 속으로 대답하며 마침 내릴 역에 도착하면서 팝업으로 뜬 메시지만 보고 누르진 않았다.

일주일밖에 안 남은 올해 무슨 좋은 소식을 전하란 말인지…


우르르 사람들을 따라 떠밀리듯 내려 스멀스멀 역 계단으로 올랐다.

크리스마스 이브라 그런지 빨간색 옷이 유독 많은 듯하다.

우리 회사도 크리스마스 맞이 작은 사내 행사를 한다며 드레스 코드를 빨간색으로 입고 오라 했다.

내 옷장 안은 주로 블랙, 화이트, 카키, 그레이 톤의 옷인데 단 한 벌의 빨간색 옷이 있다.

지난여름, 아웃렛을 돌다가 역시즌 할인을 하던 빨간색에 녹색 타탄체크무늬 원피스를 보고 ‘연말에 기분 낼 겸 입어봐?’ 라고 산 후 옷장 속에만 있던 원피스를 어젯밤에 꺼내 걸쳐봤지만, 차마 ‘내가 christmasy girl이예요.’ 라고 대놓고 말하는 그 원피스를 입고 갈 자신이 없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13년 차가 되어가다 보니 어느덧 30대 후반이 되었는데 수많은 후배들 앞에서 이런 원피스를 입으려니 민망하다. 고민하다가 결국 검정 터틀넥에 검정색 미디스커트를 입고, 얇은 녹색 트렌치코트 스타일에 회색 퍼가 목부분에 달린 하이넥의 캐시미어 코트를 입었다.

크리스마스트리도 녹색이니, 이 또한 크리스마스 색이라고 우겨봐야겠다.

검정색 플랫슈즈를 신다가, 그래도 행사인데 싶어 짙은 갈색의 스테레토하이힐을 꺼내 신었다.

나가기 전 신발장 거울에 비춰보며 순간 회색 테일러드형 코트로 갈아입을까 고민했지만

‘됐어. 그래도 크리스마스잖아.’ 라 생각하며 집을 나섰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천천히 5번 출구 쪽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유독 밖이 눈부신 듯하다.

출구에서 밖을 보니, 눈이 오고 있다.

오늘 밤늦게 눈이 와서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거라길래 혹시나 하고 우산을 챙기긴 했는데, 아침에는 분명 눈 소식이 없었다. 전철을 타고 오는 동안 꽤 왔는지 그새 눈이 쌓이고 있다. 예쁘다고만 하기에는 사무실까지 가는 미끄러운 길이 걱정이다.

‘히잉~ 그냥 플랫슈즈 신을 걸 뭔 멋을 내보겠다고… 약속도 없으면서 유난은…’

괜히 자책하며 우산을 폈다. 뭐 어쩌겠나, 사무실이 나에게 와주진 않을 테니 내가 가야지.


제발, 크리스마스이브에 눈바닥에 엎어져서 남들의 SNS에 지박령처럼 떠도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조심 종종 걸어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말을 건다.

“실례합니다. 우산 좀 같이 써요.”

깜짝 놀라 쳐다보니 어느새 허리를 숙이고 내 우산 속으로 들어와서는 내 손에 쥐인 우산을 잡아 든다.

“아… 누군가 했네… 민재 씨구나. 안녕하세요?”

다른 팀 신입사원이다. 입사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지만, 그 팀의 팀장이 내 남자 동기라 나름 잘 아는 후배이다. 같이 어울려 점심도 회식도 한 적이 있다.

서글서글한 성격이라 여기저기 인사도 잘하고 여러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직원이다.

그리고 사실 잘생겨서 입사 후 여기저기 입에 오르내리던 친구다.


신호가 바뀐다.

“건너실까요?”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같이 쓴 우산 때문에 보폭을 맞추려고 발을 조금 더 재게 움직였다.

아니나 다를까, 안 그래도 가느다란 힐의 하이힐인데 눈길에서 발목이 삐끗하며 살짝 휘청했다. 본능적으로 우산을 들고 있는 그 사람의 팔을 잡았다 놓았다.

“어머, 죄송해요.” 라며 자세를 다시 고쳐 잡는다.

“괜찮아요?” 라고 묻길래 살짝 당황했지만 짐짓 아닌 척하며 답한다.

“응, 괜찮아. 원래 자주 이래요.”

진짜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하이힐을 자주 신다 보면 걷다 발목이 휘청하고 꺾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생각보다 금방 균형을 잘 잡고 넘어지지 않은 채 잘 걸어 다닌다. 그렇게 길이 들은 건지 발목이 그로 인해 시큰거리지도 않는다.

“네, 알아요. 원래 자주 넘어지려고 하시잖아요.”

무슨 소리인가 싶어 쳐다봤다.

“사무실이나 복도에서도 팀장님 자주 넘어지려 하거나 부딪히거나 하면서 작게 ‘아’, ‘악’ 이런 소리 잘 내시잖아요.”

쪽팔린다. 사실이다.

남들보다 덩치도 작은 편인데 세상은 왜 이렇게 나랑 맞짱을 뜨자는 건지 자꾸 와서 부딪… 사실은 내가 자주 부딪힌다.

“하하… 그래도 진짜 넘어지진 않아요. 넘어지려고만 하지.”

라고 대답하는데, 내 손을 잡아 본인의 팔에 얹어준다.

“지팡이다 생각하고 잡고 가요. 이렇게 차려입고 넘어지시면 어떻게 하려 그래요.”

약간 당황하기는 했지만 힘을 꽉 쥐어준 팔 덕에 그 미끄럽던 출근길은 편안했고 환하게 웃으며 던져준 시답잖은 농담 덕에 어색한 시간이 포근해졌다.


우산 속에서 우측 2시 방향쯤에서 슬쩍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왜 빨간 옷 안 입고 녹색 입었어요? 전 빨간색 옷은 없어서, 어제 퇴근길에 유니클로 가서 빨간색 스웨터 하나 샀어요.”.

그가 검정색 패딩 안을 슬쩍 열어 보이며 말한다.

“아… 신입들은 그래야 하지만 팀장정도 되면 그런 거 다 안 지켜도 돼요.”

굳이 다 설명할 수도 없고 할 필요가 없어 그냥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우리 팀장님은 팀의 단합을 보여줘야 한다면서 속옷하고 양말까지 빨간색으로 입고 온다시던데요.”

그래, 그럴만한 애다. 그 친구는… 상상하기 싫은데 상상이 될 것 같아서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퇴근길엔 눈 더 많이 온다는데 어떻게 해요?’

뭘 어떻게 하냐고 묻는지 모르겠는 순간 건물에 도착했다. 로비까지 몇 걸음 더 걸은 뒤, 잠시 멈추더니 그는 혼자 우산을 들고 바깥쪽으로 가더니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며 눈을 털어 낸다. 생각보다 우산에 눈이 꽤 쌓였다.


그러고는 말한다.

“나는 우산이 없고, 팀장님은 하이힐 신었으니까 같이 퇴근해요. 우리”

우산을 돌돌 말아 접으며 다시 말한다.

“그런데도 정말 너무 많이 내리면, 요 앞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 하며 눈 그치기 기다렸다 가는 것도 좋구요.”

그가 다 말아 접은 우산을 건넨다.

우산을 받아 들었다.

뭐라 대답을 해야 할까 싶어 받아 든 돌돌 말린 우산을 손바닥에 톡톡 쳤다.

“음… 크리스마스니까 커피보단 뱅쇼도 괜찮겠네…”


혼잣말처럼 대답을 하고는 로비를 걸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간다. 죄다 빨간색 아이템을 하나씩 하고 입은 직원들이 보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가볍게 인사를 한다.

점퍼를 벗어 팔에 걸친 빨간 스웨터를 입은 그가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다.


그날은,

눈이 많이 왔고

난 녹색 코트에 가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