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 초록색 - 그 남자 ver.

그 사이 3초 그 짧은 시간 제 2편) 그 남자 ver.

by 은쓰다

그날은 눈이 많이 왔고, 점퍼에 묻은 눈을 툭툭 털어내며 담배를 물었다.

세상은 하얗고, 남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마저 왠지 운치 있는 날이다.


연말이 다가오니 여기저기 술약속이 태반이다. 어제는 팀장님이 감자탕에 소주나 한 잔 하고 가자고 졸라 가볍게 반주를 걸쳤다. 사야 할 것이 있어 그나마 가볍게 끝난 자리다.

눈을 뜨니 밤새 여기저기의 단톡방에서 크리스마스이브 술약속이며, 인사 메시지들이 꽤 와 있다.

다 보지도 않은 채 얼른 씻고 나갈 채비를 한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책상 위에 던져둔 쇼핑백을 본다.

‘하, 저걸 어떻게 입지?’ 그래, 오늘 하루다. 팀 단합을 위해서다. 팀장님 옷 빌려 입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어제 팀장님과의 저녁 식사 후 집 앞 역 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려 쇼핑몰에 들렀다.

회사에서 크리스마스 맞이 사내 행사를 한다며 드레스 코드를 레드로 맞춰 오라는 메일을 받았다. 그 메일을 받자마자 우리 팀장님은 팀 단체 메신저에

『자! 사랑하는 우리 팀! 총무팀 공지 메일 봤지? 우리 팀의 단합을 보여주기 위해 내일 모두 시뻘겋게 하고 오세요. 저는 양말까지도 빨간색을 신을 생각입니다.』

라고 남겼다.

그 후 팀장님과의 저녁 식사에서 따로 들은 말은

“사실 나 내일 속옷까지 빨간색 입을 거야. 그러니깐 민재 씨도 빨간 옷 꼭 입고 와야 해.”

그래도 단체 메신저에는 여성 팀원도 있어서 말을 가려 한 모양이다.

“팀장님, 꼭 빨간색 입어야 해요? 저는 빨간색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도 없는데… 아니, 대한민국 남성 중에서 빨간색 아이템 갖고 있는 사람이 뭐 얼마나 되나요?”

라며 볼멘소리를 하는데

“왜 없어? 빨강이야 말로 남자의 색이지. 난 군대 때 조교 하고 싶었는데, 안 뽑아주더라. 왠지 그 빨간 모자가 카리스마와 간지의 상징이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때부터랄까?! 나의 데스티니 컬러는 레드였지. 난 빨간색 많아. 니트, 티셔츠, 나비넥타이, 양말, 속옷… 사실, 우리 엄니가 사주를 좀 보러 다니시는데 나한테는 화(火)가 없어서 빨간색을 지니면 좋다고 해서기도 하지만… 정 없음 내가 내일 내 것 몇 개 가져와볼게. 그거라도 입던가… 내가 볼 땐 민재 씨도 좀 나랑 닮은 구석이 있어서 화기가 필요해. 빨강, 빨강을 몸에 지니라고…”

하~ 심란하다. 신입사원 주제에 회사에서 하라는 걸 안 할 수도 없고…

대학 시절 호주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후 다니던 학교도 때려치우고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열심히 한 덕에 잘 나가던 시절도 있었지만, 젊은 호기로만 되지 않는 게 사업이었다. 뒤늦게 몇 가지 자격증을 획득하고 늦깎이 신입사원으로 이 회사에 입사했다.

항상 즐겁고 사람 좋은 팀장님 밑에 배정받아 나름 어린 나이의 동기들과 비슷한 연배의 선배들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어울릴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남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하기 싫어하는 일도 내가 했다.

뭐 사실… 어린애들이야 어렵다 툴툴대도 단 돈 한 푼 없이 다 털어먹어본 인생 쓴맛을 겪은 나에겐 별것도 아닌 일이다.


팀장님과의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들른 쇼핑몰에서 빨간색 아이템을 찾고 있었다. 쇼핑몰도 마감 시간이 되어가서 빨리 사고 갈 요량이다. 두리번거리는데 여성 점원이 다가온다.

“뭐 찾으시는 거 있으실까요?”

하얀색 니트에 루돌프 모양 머리띠를 하고 있다.

“아… 네… 빨간색 아이템이 하나 필요해서요.”

라고 말하자 바로 잰걸음으로 옆 섹션에 가서는 빨간색 스웨터를 하나 갖고 온다.

“이거 어떠실까요? 연말이라 굉장히 잘 나가는 아이템입니다.”

“아…”

너무 빨간 거 아닌가 고민하는데 어린 아르바이트생이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다시 말한다.

“혹시 연말 행사 때문에 사려고 하시는 건가요?”

어떻게 알았지? 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남성분들 대부분 그런 이유로 구입 많이 하세요. 고객님, 그래서 평소에 입으시기 편하게 같은 제품 추가 구매하시면 40% 추가 할인도 하고 있어요. 블랙이나 네이비 하고 섞어 사시는 것도 좋아요.”

그래, 내일 하루다. 팀의 단합이다. 마감인데, 이 어린 아르바이트생도 얼른 보내자.

“그럼 네이비랑, 레드 주세요.”


역에 내리니 눈이 온다. 신호등이 바로 바뀐 터라 흡연장소로 가 담배를 물었다.

신호가 바뀌면 뛰어가야지 싶어 횡단보도를 바라본다.

종종걸음으로 초록색 코트를 입고, 가는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보인다.

우산을 쓰긴 했지만, 균형을 잡으려고 외줄 타기 하는 양 양손을 옆으로 뻗어 조심조심 횡단보도까지 가서 선다.

눈이 와서 가뜩이나 걷기 힘든 날에 저런 신발을 신는 여자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물었던 담배를 꺾어 휴지통에 버리고 횡단보도로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우산 좀 같이 써요.”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 우산을 잡아들었다.

그녀가 깜짝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아… 누군가 했네… 민재 씨구나. 안녕하세요?”

우리 팀장님의 동기이자, 옆 팀 팀장님이다. 그래서 같이 어울려 점심도 회식도 한 적이 있다.

팀 간의 회의를 할 때마다 우리 팀장님은 동기이고 직급도 같은데 항상 저 팀장님의 눈치를 본다.

뭔가 의견을 내고 나면 저 팀장님은 꼭 다문 입을 삐쭉 내밀며 토끼가 먹이를 먹듯 옴쏙옴쏙 입술을 좌우로 움직인다.

“음… 그 아이디어도 좋네. 그런데 현실성이 없어. 그걸 언제 촬영을 해. 디자인팀에 얘기해서 웹툰식으로 만들어보자. 이번에 들어온 디자인팀 신입이가 드로잉을 잘한대.”

이렇게 잠깐의 고민 끝에 해결책까지 내주고 나면 그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안심을 하고 다음 스텝을 준비한다. 그중에서도 우리 팀장님이 제일 안심한 표정으로 싱글벙글이다.


신호가 바뀐다.

“건너실까요?”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그 사람이 순간 휘청거리더니 우산을 잡은 내 팔을 잡았다 손을 놓는다.

“어머, 죄송해요.”

내가 너무 성큼 걸었나? 옛사랑이 되어버린 여자친구도 항상 함께 걸을 때 보폭을 좀 맞춰달라며 성을 냈었다. 또 깜빡했네…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은 듯 그분이 말한다.

“응, 괜찮아. 원래 자주 이래요.”

알고 있다. 자주 그런다는 것…

“네, 알아요. 원래 자주 넘어지려고 하시잖아요.”

뭔 소린가 싶은지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사무실이나 복도에서도 팀장님 자주 넘어지려 하거나 부딪히거나 하면서 작게 ‘아’, ‘악’ 이런 소리 잘 내시잖아요.”

“하하… 그래도 진짜 넘어지진 않아요. 넘어지려고만 하지.”

라고 대답하길래 그 녀의 손을 끌어다 내 팔 위에 도로 얹혀놨다.

“지팡이다 생각하고 잡고 가요. 이렇게 차려입고 넘어지시면 어떻게 하려 그래요.”

약간 당황하는 듯 보였지만, 이내 편안하게 팔을 쥐는 느낌이 든다.

전완근에 힘을 줬다.

아, 푸시업이라도 좀 하고 나올걸 그랬나?


그리 긴 길은 아닌데도 같은 우산 안에 있으려니 약간 어색하다. 그러고 보니 빨간색 아이템은 전혀 없어 보인다. 코트 안은 보이지 않지만 평소에 입고 다니는 컬러로 볼 때 빨간색 상의를 입었을 것 같진 않다.

“왜 빨간 옷 안 입고 녹색 입었어요? 전 빨간색 옷은 없어서, 어제 퇴근길에 유니클로 가서 빨간색 스웨터 하나 샀어요.”.

검정색 패딩 안을 슬쩍 열어 보이며 말했다.

“아… 신입들은 그래야 하지만 팀장정도 되면 그런 거 다 안 지켜도 돼요.”

뭐야? 우리 팀만 유난이었던 건가?

“그래요? 우리 팀장님은 팀의 단합을 보여줘야 한다면서 속옷하고 양말까지 빨간색으로 입고 온다시던데요.”

워낙 친한 동기라는 사실을 알아서 나도 모르게 우리 팀장님의 비밀 아닌 비밀을 말해버렸다.

혼자 무슨 상상을 하는지 표정이 요상하게 일그러지고는 고개를 흔든다. 귀엽다.


드디어 건물에 다 왔다. 매일 습관처럼 생각도 없이 들어서는데 오늘은 왠지 아쉽다.

크리스마스 이브라 그런가? 아니면, 아침에 담배를 안 펴서 니코틴 부족이라 그런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이 먼저 나온다.

“오늘 퇴근길엔 눈 더 많이 온다는데 어떻게 해요?’

어제 그 유니클로 어린 아르바이트생마냥 똥글똥글 눈을 뜨고 날 쳐다본다.

그녀는 멈춰 서 있고, 우산에는 눈이 제법 쌓였다. 우산을 들고 바깥쪽으로 가서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며 눈을 털었다.

“나는 우산이 없고, 팀장님은 하이힐 신었으니까 같이 퇴근해요. 우리”

우산을 돌돌 말아 접으며 말했다. 에라~ 모르겠다. 뱉은 거 끝까지 가보자.

“그런데도 정말 너무 많이 내리면, 요 앞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 하며 눈 그치기 기다렸다 가는 것도 좋구요.”

다 말아 접은 우산을 건넸다.

그녀가 우산을 받아 들었다.

또 그 입모양새를 하며 돌돌 말린 우산을 손바닥에 톡톡 쳤다. 우리 팀장님이 이런 기분이었구나…

대답을 기다리는 심정이 왠지 초조하다.


“음… 크리스마스니까 커피보단 뱅쇼도 괜찮겠네…”

라고 말하고는 몸을 돌리더니 로비를 걸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간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죄다 빨간색 아이템을 하나씩 하고 입은 직원들이 보인다. 그녀가 그 무리에 섞인다.

‘뱅쇼? 와인? 술?’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더워진다. 점퍼를 벗어 팔에 걸쳤다.

빨간 옷들 사이에 초록의 그녀가 톡 하고 튀어있다.


그날은,

눈이 많이 왔고

난 난생처음으로 빨간색 스웨터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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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화 빨간색, 초록색 그 사이 3초의 짧은 시간 제 1편) 그 여자 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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