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편) 딸내미 ver.
"만약에 내일 죽는 걸 안다면 당신은 마지막으로 무얼 먹고 싶을까요?"
TV속에서 진행자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잔잔한 BGM이 깔리며 사람들의 진솔한 인터뷰 장면이 나온다. 누군가는 「스테이크!」 라고 하고, 누군가는 「00식당 냉면이요.」 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뭐 먹을지 고민을 하다 끝날 것 같다.」 고 한다. TV속 화면을 응시하고 있던 나는 거실 바닥에 앉아 시래기를 다듬으며 흘끗 흘끗 TV를 보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뭐 드실래? 죽기 전 마지막으로 드시고 싶은 음식이 뭘 것 같아?"
"죽기 전? 글쎄, 생각 안 해봤는데 맛있는 소고기를 좀 먹어야 하나 저승 가는데 기운 나게?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칼국수?"
그 사이 TV속 화면은 여러 인터뷰자들의 애틋한 표정이 클로즈업되면서 한 결 같은 대답을 한다.
"엄마 밥이요."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밥이요"
"우리 엄마가 해준 거면 아무거나 다요."
엄마는 열심히 불린 시래기를 다듬던 손을 멈추고는 멍하니 TV를 본다. 그러면서 나지막이 말을 했다.
“나도…. 나도 우리 엄마가 차려준 밥 먹고 싶다.”
칠십이 가까워오는 엄마도 엄마의 엄마가 그리운 건 매한가지인가 보다.
며칠 간의 편집 마감을 마치느라 야근을 하다가 오늘은 정시에 퇴근을 했다. 오랜만에 먹는 저녁 집밥을 든든히 먹고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소파에 비스듬하게 누워 TV를 보고 있다. 오늘도 내가 야근을 했다면 엄마는 또 찬 밥을 국에 말아 마시듯이 식사를 하셨을 거다.
흔히 말하는 살림 19단쯤의 주부인 엄마는 역시 내가 『퇴근하는 중』이라고 한 연락부터 집에 도착하는 한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짜지 않게 자박자박하게 국물 낸 불고기와 가느다란 콩나물을 살짝 데쳐 아삭아삭하게 무친 콩나물 무침이랑 내가 좋아하는 총각무 김치까지 쫑쫑 썰어 한 상을 차려 놓았다.
피곤해서 대충 먹고 바로 잘까 했는데 맛있게 먹다 보니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고, 막상 마감이 끝나고 나니 마음이 편해서 인지 씻고 나서 TV를 볼 여유도 생겼다.
엄마는 그 사이에 설거지를 다 마치시고는 동네 형님이 주셨다는 시래기를 다듬으신다.
같이 돕겠다고 하는데도 혼자 하는 게 더 빠르고 편하다며 손도 대지 말라 신다. 엄마만큼은 아니더라도 같이 거들면 조금 더 빨리 끝난다는 건 알지만 나는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이라 슬쩍 부엌으로 가서 커피를 한 잔 내려 들고 소파로 갔다. 엄마는 "이 밤에 또 무슨 커피야?" 라며 한 소리를 했지만 커피 향을 맡고는 한 모금 마시자는 말씀도 하시면서….
그렇게 소파로 가서 TV 리모컨으로 화면을 돌리다가 멈춘 채널에서 인터뷰가 나온 것이다. 너무나 거한 엄마 밥상을 한 상 차려준 엄마가 엄마의 엄마 밥이 먹고 싶다고 하니 괜히 머쓱하고 마음이 짠하다.
괜스레 센치해진 분위기를 반등시키려고 나는 어쭙잖은 농담을 던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뭘 먹고 싶을 것 같냐면? 우리 장마담이 타준 커피! 키야~ 진짜, 엄마가 조금만 더 예뻤어도 다방 마담 했을 텐데, 그랬으면 아마 커피 맛 소문나서 손님 바글바글 했을 거야.”
내 우스갯소리에 엄마는 발끈하며
“야! 나 젊었을 때 예쁘단 소리 많이 들었어. 얼굴도 하얗고 뽀오야니 옛날 시절에는 얼마나 예쁘단 소리 많이 들었는데! 느이 아빠는 횡재한 거야. 아이고…. 내가 미쳤지. 왜 그 많은 나 좋다던 남자들 두고 너네 아빠랑 결혼을 했나 몰라.”
라며 갑자기 불똥은 아빠한테로 튄다. 발끈하는 포인트가 ‘다방 마담’이 아니라 ‘예뻤어도’ 라는 말인 것이 의아하고 재미있었지만 더 길게 뒀다가는 엄마를 쫓아다녔다던 태권도 사범이나 섬마을 선생님이나 가평에 갔다가 대학생인척 속이고 만났었다는 남학생이 이제는 무슨 대학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그 소싯적 얘기가 또 이어질 것 같아 중간에 말을 끊었다.
“알죠. 알아요. 장영남여사님 미모로 날리던 시절 이야기, 지금도 충분히 미인이십니다. 이 나이에 이렇게 피부도 곱고 살도 통통하니 귀엽고, 이런 아줌마가 어디 있다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돈 많은 할아버지 어디 좀 꼬셔봅시다. 내가 시집가는 것보다는 새아빠를 찾는 것이 훨씬 더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
그렇게 시답잖은 농담조의 말들을 서로 주고 뱉으며 마시던 커피를 소파 옆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거실 바닥으로 내려앉아 엄마 혼자 열심히 다듬는 시래기 줄기 까기를 도왔다.
분위기 쇄신을 위해 한 말이었지만 다시금 곱씹어 생각해 봐도 죽기 전에 먹고 싶은 건 바로 인스턴트커피를 진하게 탄 후 얼음 넣고 우유 부어 만드는… 심지어 몇 스푼, 몇 밀리리터를 계량하지도 않은 채 인스턴트커피 병째로 컵에 툭툭 하고 털어서 타주는 시원한 『울 엄마표 아이스 밀크커피』가 생각날 것 같다.
다음 날,
비록 마감이 끝났지만 다음 달 콘텐츠 주제를 짠 후 브레인스토밍 회의를 해야 해서 오늘도 여전히 회사에서 내내 자료를 찾고 과거에 써놨던 특집 기사나 아카이빙 해둔 자료들을 훑느라 정신이 없었다. 역시나 피곤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퇴근을 했다. 그래도 이번 주 정도는 정시 퇴근이 가능하다. 요 때를 잘 누려야 한다. 사무실을 나서자 11월의 찬 바람이 기분 좋다.
희한하다. 주말에는 추워서 집 밖을 나가기… 아니, 「침대 밖은 위험해」 라는 생각을 하고 사는데, 퇴근할 때 맞는 11월의 이 스산하고 쌀쌀한 공기는 왜 이렇게 상쾌한지 모르겠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퇴근 후 로비를 나설 때면 탈옥한 죄수가 세상과의 인사를 위해 고개를 들고 숨을 들이마시며 하늘을 보듯이 허리를 한 번 쭉 펴고 고개를 들어 크게 숨을 들이쉰다.
그래봤자 서울의 매연이 섞인 공기일 뿐인데…
그래도 좋다.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출근할 때부터 ‘일찍 올게요.’ 라고 했었어서 여유 있게 저녁을 준비하고는 나를 기다리시는 시간에 친구와 전화통화로 수다를 즐기고 계시거나, TV를 보며 건성으로 “왔어?”라고 대꾸를 하실 텐데 아무 소리가 없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안방 문을 열어본다.
엄마는 안방 화장대 위의 소품들을 다 꺼내어 마른걸레로 하나하나 먼지를 닦고 계신다. 화장대 서랍까지 꺼내어 화장품 샘플이며, 전화번호며 빌려준 돈 떼일까 봐 적어 두신 엄마만의 비밀 장부와 액세서리 등 잡다한 물건들도 정리 중이다.
“아, 화장대 정리 중이시구나? 좀 안 쓰는 건 버려요. 둬봐야 다 짐이야.”
엄마는 내 말에 대꾸도 없이 하던 일에 열중이시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뭔가 이상하다.
“왜? 무슨 일 있어요? 컨디션 안 좋아? 어디 아파요?”
눈치를 보며 묻는 내 말에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꾸하신다.
“왜? 나도 짐짝 취급해서 갖다 버리지 그러냐? 둬봐야 다 짐이야? 제일 짐은 나 아니냐?”
갑자기 어깃장을 놓으신다.
“아이 참, 우리 장여사님 왜 또 이러실까? 오늘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셨어?”
하며 정리하느라 바닥으로 꺼내 놓은 물건들을 보니 화장 대 위에 얹어있던 아빠 사진이 보인다. 집 안에 유일하게 놓여 있는 사진이기도 하고, 항상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으로 8년째 엄마의 화장대 위에 앉아 계신다. 안방에 굳이 들어갈 일이 별로 없지만 들어갈 때면 항상 아빠 사진을 보며 한 번씩 사진을 쓰다듬는다.
우리 아빠는 그렇게 늘 웃고 계신다.
엄마는 원래도 깔끔한 성격인지라 집을 항상 깨끗하게 정돈하시지만 무언가 심란한 일이 생기면 화장대 서랍이며 속옷 서랍이며 들쑤셔 내서 닦고 정리를 하시곤 한다. 아마도 오늘은 왠지 기분이 심란하신가 보다.
눈치껏 아무 말없이 엄마가 닦기 편하게 물건을 하나씩 집어 건네는 나에게 혼잣말하듯이 말을 시작하신다.
“오늘 낮에 옆집 아줌마가 놀러 왔었어. 갑자기 문을 똑똑 두드리더니 「커피 한 잔만 줘요.」 하고 불쑥 들어오더라고…. 시골에서 무청 김치 담가 왔다면서 타파통에 담아가지고…. 그래서 「커피? 뭐로 타줘? 블랙? 믹스?」 라고 물었더니 「블랙커피에다가 설탕 조금 타서요. 아이스로다가…. 지난번에 언니가 그렇게 타주신 게 너무 맛있더라고, 나는 그 맛이 잘 안 나대.」 라면서…. 그래서 큰 유리컵에 한 잔 가득 타줬지. 꿀꺽꿀꺽 잘 마시더라고…
그러더니 갑자기 이 여편네가 새삼스레 옛날 얘기를 꺼내는 거야. 「성님, 이사 오신 지 몇 년 됐지? 한 8년 넘었네. 벌써? 처음 옆 집 이사 왔다며 인사하셨을 때 인상 좋아 보여서 좋은 이웃이 들어왔구나 생각했었는데 벌써 9년이 다 돼가요. 그때는 비록 아프셨지만 아저씨도 계셨는데…. 아저씨 보내고 아들은 독립하고 딸내미랑만 지내시는 거 적적하지 않아요?」 라고 시답잖은 소리를 해대길래 「적적하긴 뭐가 적적해. 내가 비록 백수지만 우리 동네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야. 오죽하면 딸내미가 엄마는 경기도권 백수 중에 제일 바쁜 백수라고 놀린다니깐」….”
얘기를 듣고는 옆 집 아주머니께서 아빠 얘기를 문득 꺼내시는 바람에 엄마 마음이 우울했나 보구나 싶었다.
“그렇게 앉아서 이런저런 수다 한참 떨다가 옆 집 아저씨 문 여는 소리 나니깐 밥 해줘야 한다고 홀랑 가잖아. 가고 나서 유리컵 닦는데 느이 아빠 생각이 나더라고…. 이 집 이사 오고 나서 한참 여름 다가오는데 건강 악화되어서 먹는 것도 잘 못 먹고 정신도 어리어리 해 지고…. 뭐라도 좀 먹이면 정신이라도 날까 싶어서 「커피라도 타줘볼까?」 라고 하니깐 고개 끄덕이길래 아이스커피를 타줬더니 꿀꺽꿀꺽 시원하게도 마시더라. 그래서 그 후로 며칠 동안 아이스커피 계속 타줬지. 그렇게 금방 갈 줄 알았으면 그 좋아하는 소주나 몇 잔 멕여 보낼 걸 그랬다 싶어.”
엄마는 연신 소품들을 닦고 정리하며 씩씩거리듯이 말을 했다.
“에이, 그때 어떻게 소주를 드시게 해. 환자한테 소주는 무슨…. 안 드리는 게 당연한 거였지. 그게 아빠를 위한 거였지. 괜히 마음 쓰여하지 마세요.”
엄마는 내 말에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닦던 것들을 서랍에 넣고는 다시 화장대에 서랍을 꽂아 넣으셨다.
8년 전 봄, 아빠의 암 선고일로부터 3년쯤 되던 해에 아무래도 투병 기간이 길어질 것 같아 가계 살림을 좀 정리하고자 우리는 큰 평수에서 작은 평수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사를 올 때까지만 해도 아빠는 이전만큼의 활기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상을 지내는 데는 무리가 없었는데 이사 얼마 후 급작스레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시면서 결국 그 해 여름을 넘기지 못하시고는 우리 곁을 떠났다.
그렇게 8년째 엄마의 화장대 위에서 환하게 웃고 계신다.
아무래도 이런 분위기에서 엄마도 나도 식사를 제대로 하진 못 할 것 같아서 칼국수를 먹자고 해다.
“엄마, 칼국수 드시러 가실래? 저녁 준비 안 했지?”
“뭔 칼국수야. 그냥 있는 거 챙겨 먹자.”
“에이, 나가자. 딸내미가 쏠게.”
“야, 고작 칼국수 가지고 생색이냐? 스테끼도 아니고?”
“그럼 스테이크 썰러 갈까?’
어떻게든 엄마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 얘기를 건넸다.
“됐어. 나는 호텔 레스토랑 스테이크 아니면 쳐다도 안 봐. 스테이크를 맛으로 먹냐? 분위기로 써는 거지. 이건 이렇게 뭘 몰라서 여태 남자가 없나?”
드디어 슬슬 공격이 시작되는 것을 보니 기분이 풀어지고 있나 보다. 어쨌든 하던 일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옷장에서 점퍼를 꺼내 엄마에게 건넨다.
뜨끈한 칼국수도 한 그릇 먹었겠다, 배까지 든든해지자. 엄마는 기분이 확실히 나아졌는지
“들어가는 길에 커피 한 잔 사줄게. 네가 좋아하는 스벅 가자.”
“오~ 웬일이래. 커피 마시는 돈만 아껴도 집 한 채 사겠다고 잔소리하시던 장여사께서”
“뭔 웬일이야. 돈이 문제냐? 하도 커피만 마셔대니깐 걱정되어서 한 소리지, 내가 언제까지 너 옆에 있을 것 같아. 이것아! 너도 마냥 청춘 아니야, 건강 관리 잘해. 혼자 살려면 건강이 최고야.”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우리 엄마다.
이게 과연 염려인지, 관심인지, 디스인지 모를 우리 엄마표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아닌데, 나 혼자 안 살 건데…. 죽을 때까지 엄마 곁에 꼭 붙어살 거거든요.”
라며 괜히 어리광조로 대꾸를 하고는 엄마 팔짱을 끼고 스벅으로 들어갔다.
오더 후 커피를 받아 자리로 갔다. 자리에 앉아 휴대폰에 뜬 알림을 확인했다. 얼마 전 입사한 인턴사원이 아직 일을 하는지 공용 드라이브에 다음 달 콘텐츠에 대한 아이디어를 문서화해 올려놓았다.
내일 확인할 거지만 내용이야 어떻든 열정을 응원하는 의미로 커피나 한 잔 사줘야겠다.
“뭘 또 그렇게 보고 있어? 일이야? 바쁜 거면 집에 갈까?”
집에서도 핸드폰을 보다가 갑자기 노트북을 켜는 일이 잦아서 엄마는 또 그런 상황인가 싶어 물으신다.
“아, 아니야. 뭐 올라온 거 잠깐 확인했어.” 라고 말하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매장 안을 둘러보니 곧 다가올 연말 분위기로 잔뜩 꾸며져 있다.
“아~ 연말 콘텐츠로 뭐 쓰지? 뭘 또 우려먹어야 하나?”라고 한숨 쉬듯 말이 나왔다.
“저번에 너 뭐 연재 쓴다지 않았어?”
“응, 그건 지난가을에 다 끝났어. 계절별로 에피소드를 기준으로 옴니버스식 소설 콘텐츠 연재했었어. 옴니버스가 뭔지 알아요?”
“야, 내가 무식해도 TV는 너보다 더 많이 본다. 주워들은 게 있는데 모르겠냐? 그리고 딸이 매거진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보다는 너한테 들은 걸로 만도 뭐 이것저것 알아지드라.”
사실 우리 엄마는 문학소녀다. 내가 어릴 때부터 책 읽고 글쓰기를 좋아했던 건 엄마의 영향이 크다. 글을 깨치기도 전에 동화책이며 청소년세계문학전집이 책장 안에 장식품처럼 꽂혀있었다. 동네 분들이 놀러 오시면 우리 할머니는 나에게 “은수야. 아기 돼지 삼 형제 찾아와라”
라고 했고, 나는 책장으로 뽈뽈뽈 걸어가 꽉 차 있던 책장이라 고사리 같던 내 손으로는 잘 빠지지도 않던 책을 골라 낑낑 거리며 빼왔다. 사실 제목 위에 아주 작은 썸네일 같은 그림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구분한 거였다. 그런데도 우리 할머니는 「이거 봐봐. 애가 이렇게 똑똑해.」 라시며 그다음에는 백설공주, 헨젤과 그레텔 등 몇 가지 레퍼토리로 책 뽑기 쇼를 선보이게 했다. 그렇게 책이 많던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엄마가 책을 꺼내 읽을 때면 나도 심심해 책을 읽기도 했고 그러다가 그냥 시간을 죽이는 일이 책 읽기가 되었다. 책을 읽다 보니 마음속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있을 때 적기 시작한 글들이 취미가 되었고 이제는 업이 되었다.
그 세대의 엄마 또래분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공부가 길지 않은 엄마지만 책도 많이 읽고 매일 보는 TV와 세상 모든 포털보다 많은 정보를 지닌 아줌마들과의 수다로 어떨 때 보면 나보다 훨씬 아는 게 많은 엄마다.
엄마는 내 앞에 놓인 커피잔을 들고 가서 한 모금 뺏어 마시고는 이어 말한다.
“커피 얘기 어때? 네가 좋아하는 거니깐 써보면 어때?”
“커피? 그거 작년 겨울에 『얼죽아를 좋아하는 K직장인』으로 낸 적 있었는데… 이런 거 말고 뭐 또 좋은 거 없나?”
“그래? 뭐 이게 얘깃거리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옛날에 16살 때 인가? 방학에 동네에 있는 사촌오빠네 느이 외할머니 따라 놀러를 갔거든…. 거기서 사촌 올케언니가 외할머니 드시라고 커피를 타줬는데 생전 처음 보는 그게 궁금해서 그때 나도 한 모금 얻어 마셔본 게 내 인생 첫 커피였어.”
웬일인지 오늘은 새로운 스토리다. 대부분 옛날 얘기라면 했던 얘기들의 반복이었는데, 처음 듣는 얘기라 귀가 솔깃해진다.
“오, 대박! 16살 때? 쓰지 않았어요? 애들이 먹기엔 입에 안 맞았을 텐데…”
그렇게 난생처음 듣는 엄마의 첫 경험 얘기를 한참 듣고는 카페를 나왔다.
11월 늦은 저녁의 공기는 쌀쌀했다. 얼마 후면 또 한 살씩 먹어갈 엄마와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투닥거리며 소주 대신 커피 한 잔 기울이는 그런 모녀로 남을 것이다. 지레 몸이 움츠러드는 추위였지만 엄마의 어깨를 감싸고 걷는 이 저녁의 바람은 쌀쌀하기는커녕 꽤 운치 있고 포근하다.
달콤하기만 한 삶을 살면 언젠가는 당뇨에 걸릴지 모른다. 가끔은 이렇게 울뚝불뚝 딸내미에게 성질도 내고, 울컥울컥 슬픔을 감싸고 살아가는 엄마와 나의 인생이 더 낫다.
지금처럼 쌉싸래한 인생이 아마도 우리의 인생 혈관을 더 탄탄하게 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