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편) 엄마 ver.
요 며칠째 야근으로 늦게 오던 딸이 오늘은 웬일로 일찍 온단다. 오늘도 저녁은 혼자인가 보다 싶어 며칠 전에 끓여 두고 한 그릇씩 퍼 먹고 다시 끓이는 짜빠진 미역국에 밥이나 한 숟갈 말아먹으려 했는데, 제시간에 온다 하니 마음이 급하다.
먹고 싶은 건 없냐니깐 『대충 아무거나… 피곤해 ㅠ』 라며 답이 온다. 아까 낮에는 점심 먹었냐는 톡도 한참 후에나 보더니 역시 『네, 대충...』 이라고 답이 온 걸 보면 점심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것 같은데…
해둔 반찬은 없고 동네 형님이 준 시래기나 다듬으려고 싱크대에 넣고 물에 막 불리려는 참이었는데, 마음이 급하다. 우선 두고 동네 마트 가서 불고기 거리라도 좀 사 와야겠다.
며칠 만에 집에서 먹는 밥인데 제대로 된 거라도 먹여야겠다.
“다녀왔습니다.”
“응. 왔어?”
딸내미는 인사 후에 부엌은 들여다보지도 않고 지 방으로 먼저 들어간다. 보지 않았어도 분명 조그마한 애가 피곤에 절어 더 자그마해졌을 거다. 뭔 놈의 회사는 그렇게 일을 시켜 먹는지, 퇴근하고 들어올 때는 항상 솜덩이를 지고 강물을 건너는 당나귀 마냥 축 처져있다.
덩치가 크진 않아도 야무진 구석이 있어 어릴 때부터도 항상 반장이며, 전교 임원이며 남들 앞에서 당당한 아이라서 바깥 생활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도 내 눈에는 마냥 애잔하다. 불고기를 막 볶고 있는데 화장실로 가며 말을 건넨다.
“아, 뭘 또 그렇게 해요? 그냥 대충 먹어. 대충….”
그러더니 씻으러 들어간다.
“손만 씻고 나와. 밥부터 먹고 이따 씻어.”
잠시 후 식탁으로 온 딸이 자리에 앉자 바로 밥을 한 공기 퍼서 애 앞에 놓았다.
“얼른 먹어. 불고기만 담으면 돼. 진작 연락하지 불고기도 좀 양념에 재어 놓아야 더 맛있는데 괜찮을까 모르겠네.” 라며 불고기를 그릇에 담는다. 딸은 말없이 일어나 내 옆으로 오더니 내 밥그릇을 들고 가 전기밥솥에서 밥을 한 공기 더 푼다.
“아, 진짜 엄마. 같이 먹어. 같이… 같이 푸면 되지. 왜 꼭 내 것만 먼저 퍼요?”
“나야 다 차리고 푸면 되지. 뭐 대수라고…”
불고기 그릇을 식탁 가운데 놓는다.
딸내미는 내 밥그릇을 내 앞에 놓는다.
서로 팔이 교차한다.
식사를 다 마치자 딸내미는 그릇을 싱크대에 담그려다
“이건 뭐야? 싱크대에서 뭐 키워? 이건 뭐야? 지구로 불시착한 외계 수상 생물이야?”
라며 물에 불어 가는 시래기를 손가락으로 콕콕 누르며 웃는다.
‘아! 맞다. 시래기.’
딸이 웃었으니 됐다. 얼른 정리하고 시래기나 다듬자.
다음 날,
딸이 출근하고 청소기를 한 바퀴 돌리고, 빨래 돌리며 오는 전화로 한참 수다를 떨고 나면 할 게 없다. 추워서 나가자니 귀찮고 가만있자니 더 늙으며 어쩌나 싶어 오리털 점퍼를 입었다. 겨울 들어설 때 딸이 사준 솜바지까지 챙겨 입었다. 육교를 하나 넘어 있는 시장으로 향한다. 출근하며 딸이 오늘은 일찍 올 거라고 했으니 밑반찬거리나 좀 사야겠다. 육교를 넘으며 이 전에 살던 아파트를 쳐다봤다.
시집오고 나서 남편 고향인 이 동네에 정착해 살았다. 이제는 고향에서 살던 날 보다 서울로, 그리고 시집온 이곳에서 산 날이 훨씬 더 많다. 내 고향은 안동이다. 안동 시내에 살았고, 기억나지 않던 시절에는 부자였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홀로 남은 엄마는 우리 8남매를 혼자 키우셨다. 그러다 서울에서 유학을 하던 오빠가 자리를 잡으며 시집간 언니들은 빼고 엄마, 나, 바로 위에 언니, 남동생 이렇게 서울로 올라왔다. 스무 살 안팎이었으니 고향에 산 세월의 몇 곱절은 타향에서 산 셈이다. 사실 정착하면 그게 고향이라친다면 난 지금 이 동네가 고향 같다. 그렇게 시집온 후에 육교 저 쪽 너머에 살다가 9년 전쯤에 이 반대편으로 이사를 왔다. 육교 하나 차이로 같은 평수도 집값이 꽤 다르다. 조금 좁긴 한데 그래도 이 동네에서는 가격에 비하면 단지도 크고 역도 가까워서 좋은 입지다 싶어 별 생각 안 하고 형편에 맞춰 조금 급하게 구하고 이사 온 집이다.
저 너머에 살 때는 남편도, 아들도 있었다. 이렇게 말하니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지만, 그냥 평범하게 살았다는 거다. 평생 성실하고 묵묵하게 일만 하던 애 아빠가 암에 걸려 투병을 했고, 아무래도 하루아침에 낫을 병이 아니다 보니 애들을 생각해서라도 가계 살림을 좀 정리해 두는 게 좋겠다고 의논하여 이사를 했다. 이사 후 얼마 후 남편은 돌아가셨고, 남은 셋이 몇 년을 더 같이 지내다 아들은 최근에 회사 근처로 독립을 했다.
그래서 지금은 딸과 둘이 산다. 늙으면 맏딸은 남편 대신이라던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내 성격이 워낙 내가 해야 내 마음에 들게 뭐가 되는 사람이기도 하고 일하고 오느라 피곤한 딸 애가 안쓰러워 집안일은 아무것도 안 시키다 보니 나이에 비해 아직 사는 철은 덜 든 것도 같은데, 그래도 맏딸 노릇 하느라 내 비위를 잘 맞춰준다. 지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내색은 안 해도 지도 힘들 텐데 이전 보다 날 더 위한다.
나간 길에 시장 안에 있는 동네 아지트 같은 미용실에 잠시 들러 차려준 점심도 먹고, 시장에서 찬 거리를 몇 개 사 와서 냉장고에 넣고 있는데 누가 문을 똑똑하고 두드린다.
보통 아파트에서 벨을 누르지 문을 두드리는 일은 없는데 같은 라인에 사는 사람들끼리는 왠지 벨을 누르는 게 정이 없다 생각하는지 서로 문을 두드린다.
“형님, 나예요.”
라며 옆 집 여자가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자
“어디 갔다 왔어요? 아까 문 두드리니 안 계시데? 시골에서 무청 김치를 담가와서 맛 좀 보시라고 왔지.”
“응, 시장 다녀왔어. 들어와.”
문을 닫자 옆집 여자는 같은 아파트 구조라 당연히 알고 있는 부엌으로 가서 싱크대 위에서 김치를 담근 타파통을 열고는 무청 김치를 한 점 집어먹어보라며 내민다.
“성님 입에 맞을까 모르겠네. 오래 먹을 거 아니라 덜 짜게 한다고 했는데…”
스스럼없이 손가락으로 집어 내 입에 넣어준 무청 김치는 아작아작하니 삼삼한 게 맛있다.
“응, 딱 좋네. 고마워. 잘 먹을게. 앉아. 뭐 과일이라도 좀 줄까?”
“아니요. 그냥 커피 한 잔 줘요.”
“무슨 커피? 우리 딸내미 먹는 거 내려줘? 아니면 믹스 커피?”
“블랙커피에다가 설탕 조금 타서 아이스로 다가요. 지난번에 언니가 그렇게 타주신 게 너무 맛있더라고요. 나는 그 맛이 잘 안 나더라고요.”
“아이고, 아직 젊네. 이 겨울에 아이스커피 타령하는 거 보니”
그렇게 커피를 타서 건네고 마주 앉아 가족 얘기부터 「저기 저기… 그 있잖아, 얼마 전에… 왜?」 로 시작되지만 서로만 알아듣는 그런 사람들의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옆 집 아저씨가 들어오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밥을 해야 한다며 옆집 여자는 가고 커피를 타준 유리컵을 닦다 문득 남편 생각이 났다. 이 집으로 이사 오고 나서 생각보다 빠르게 건강이 악화되어 얼마 살지도 못하다 갔다.
그렇게 8년이 지났다.
마지막쯤에 음식을 잘 못 먹고 기력도 없어 기껏 위한다고 타 준 게 이 아이스 블랙커피다. 달달하고 시원해서 넘기기 편했는지 꿀꺽꿀꺽 잘 마시길래 며칠간 타줬었다. 그래서 지금도 납골당에 갈 때는 아이스 블랙커피를 타서 잠시 납골함 앞에서 들고 있다가 오곤 한다.
시장에서 돌아와 반찬을 정리하려고 소파에 벗어 던져둔 오리털 점퍼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장롱에 걸어두고는 화장대를 쳐다봤다. 화장대 위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신랑이 보인다.
‘으이구, 인간아. 뭐 좋다고 웃고 있어?’
갑자기 화장대 위가 지저분해 보인다. 정리나 좀 해야겠다.
한참 정리 중인데 퇴근한 딸내미가 내 기분을 알아챘는지 칼국수나 먹으러 가자고 한다.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와 맛있는 칼국수 한 그릇을 먹고 나니 배도 든든하고 마음도 풀린다. 뜨끈한 국물 덕에 따뜻해진 몸으로 식당을 나왔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딸에게 커피를 한 잔 사준다고 하고는 칼국수집 옆옆 건물에 있는 스타벅스에 갔다.
잠깐이지만 찬 바람을 맞고 들어간 커피숍은 따뜻한 조명과 연말 분위기가 물씬 나는 소품들로 더 따뜻한 느낌이다. 딸에게 커피를 주문하라며 멋지게 체크카드를 건네고 텀블러를 구경한다.
예쁜 살림살이를 좋아해서 식기류는 잔뜩 있고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걸 알아서 새로운 시즌 텀블러가 나오면 딸이 잘 사다 줘 뜯지도 않은 것들이 찬장에 있는데도 하얀색의 갸름한 모양에 금색과 녹색펄로 트리와 눈 모양으로 꾸며진 텀블러를 보니 또 탐이 난다. 집었다 놨다 몇 번 하다 그냥 놓고는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딸은 커피와 티를 받아오더니 앉자마자 핸드폰을 본다. 퇴근하고 와서 대화라도 좀 하고 싶은데 항상 대화를 하다가도 핸드폰을 보다 갑자기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하거나, 한참 말하고 났는데 「응, 그래서 누가 그렇게 한 거라고?」라고 되묻기가 일쑤다. 결국 나만 떠든 거고 딸내미는 라디오 틀어놓은 것 마냥 잘 듣지도 않은 채 일 하느라 바쁜 시간들이 있다. 기껏 다 말한 걸 또 말할 때 가끔 짜증도 나지만, 어쩌랴? 먹고살자고 열심히 사는 저 중생을… 내가 참고 품어야지.
“뭘 또 그렇게 보고 있어? 일이야? 바쁜 거면 집에 갈까?”
라고 묻자 딸내미는
“아, 아니야. 뭐 올라온 거 잠깐 확인했어.”
라고 하더니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그러고는 뭐가 답답한지 한숨 쉬듯이
“아~ 연말 콘텐츠로 뭐 쓰지? 뭘 또 우려먹어야 하나?”
라고 한다.
참 골치 아픈 직업이다.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중학생, 고등학생 때도 수업 시간에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예인들하고 지친구들을 주인공삼아 소설을 써재끼더니, 결국 또 글짓기를 하는 직업을 하고 있다.
난 글을 쓰는 작가인가 싶은데 그런 건 또 아니고 콘텐츠 기획자라고 한다. 그게 뭐가 됐든 지가 좋아서 하는 일을 한다니 그거면 됐다. 지난번에는 연재 콘텐츠를 기획하고 써서 반응이 좋았다고 지네 부장한테 칭찬을 들었다고 하는 거 보면 그래도 마냥 걱정만 되는 내 마음에 비해 지 밥벌이는 곧잘 하나보다.
이럴 때면 내가 조금 더 가방끈이 긴 엄마였다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쓰인다. 사실 나는 공부를 많이 하진 못했지만 책을 좋아한다. 그래서 가끔 도움이 될까 싶어 읽었던 책 내용도 기억해내보고는 하는데 내 깜냥에 주제 넘지 싶어 말을 아낀다.
그리고 나보다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훨씬 많이 한 딸인데 내가 뭐라고 싶어서….
나는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세계전집을 많이 읽었다. 1, 3학년을 같은 담임선생님을 만났는데 우리 담임선생님께서 책을 좋아하셨는지 항상 학급 뒤에 세계전집, 문학소설을 잔뜩 쌓아두시고는 꼭 한 번씩 읽으라고 하셨다.
애들은 당연히 관심도 없었고 나는 그저 흘끔흘끔 쳐다보며 제목만 여러 번을 눈으로 읽다가 1학년 여름방학이 될 때 선생님께 여쭤보고 대지와 레미제라블을 챙겨서 집으로 갔다. 처음에는 외국사람들 이름이 나와 헷갈려 앞으로 자꾸 넘겨봤는데 두 번 읽고 나니 뭔가 알 것 같았다. 세 번째까지 읽고 방학 때 가정 조사를 나오신 선생님께 돌려드렸다.
다음 날 선생님께서 학급에 있던 책 세 권을 직접 집으로 갖다 주셨고, 개학을 하고 나서부터는 놓여있던 책들을 한 권씩 갖다 읽기 바빴다. 혹시 막내 남동생이 장난치다 책을 찢을까 봐 잘 때면 베개 밑에 넣고 잤다.
내 앞에 놓인 캐모마일티 잔을 약간 옆으로 밀고는 딸내미 앞에 있는 라테를 집어 한 모금 마셨다.
“커피 얘기 어때? 네가 좋아하는 거니깐 써보면 어때?”
“커피? 그거 작년 겨울에 『얼죽아를 좋아하는 K직장인』으로 낸 적 있었는데… 이런 거 말고 뭐 또 좋은 거 없나?”
다행히 무시하지 않고 착하게 대답을 한다. 뭐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는데….
“그래? 뭐 이게 얘깃거리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옛날에 16살 때 인가? 방학에 동네에 있는 사촌오빠네 느이 외할머니 따라 놀러를 갔거든…. 거기서 사촌 올케언니가 외할머니 드시라고 커피를 타줬는데 생전 처음 보는 그게 궁금해서 그때 나도 한 모금 얻어 마셔본 게 내 인생 첫 커피였어.”
갑자기 딸내미가 눈을 반짝 빛내며 의자에 널린 빨래 마냥 사지를 뻗고 있던 몸을 곧추 세우더니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이게 뭔 얘깃거리가 될까 싶은데 재미있어하며 열심히 듣는다.
유치원 시절 잠투정을 부릴 때 옛날 얘기를 들려주면 잠이 들기는커녕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날 쳐다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낮고 발름한 코로 눈을 반짝이며 그 작은 입을 오물거리면서 내 얘길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랑스러운 모습이 언제까지나일 것 같았는데, 어느새 이렇게 다 늙어서 엄마의 말동무이자 직장에선 멋진 사회인이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커피숍에서 얘기를 하고 카페를 나왔다.
내가 추울까 봐인지 팔짱을 낀 팔을 풀어 어깨를 감싸며 겉옷 위로 손을 문지르며 지 품으로 꼭 안아 주려 한다. 그렇게 날 감싸주는 딸이나, 내 손에 매달리듯 걷던 7살의 딸아이나 나에겐 마냥 애다.
다 큰 게 애교를 부리듯이 고개를 내 쪽으로 들이밀며 춥다고 한다.
아마 남편이 하늘에서 우린 본다면 화장대 위에서처럼 또 말없이 씨익 웃을 것 같다.
11월 늦은 저녁, 춥다. 그리고 올해도 이제 얼추 마무리가 되어간다.
그래도 괜찮다. 평년보다 조금 일찍 찾아온 추위에 김장도 다 해놨겠다. 내가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해도 세 번 까지는 잘 들어주는 딸내미가 있으니 말이다.
▽▽ 짝꿍 이야기 - 딸내미 ver. 보러가기 ▽▽
09화 - 알콩달콩 짝짝꿍 모녀 제 1편) 딸내미 ver.
알콩달콩 짝짝꿍 모녀 - 딸내미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