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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파도와 잎사귀가 만나는 곳

천리포 수목원, 겨울

by 이해린

태안을 여행지로 정하고 여행을 갔다기보다는 태안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태안 천리포 수목원이 그곳이었다. 서울 식물원, 효창 공원에 이어 천리포 수목원까지 가자니 굉장한 식친자로 보이기도 하는데 다이소 바질도 싹 다섯 개 틔우고 몰살시킨 걸 고려하자면 식집사의 길이 내 길이 아닌 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24년도부터 확실히 자연이나 환경에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아주 아주 조금이라도 더 행동에 옮기고자 마음을 가진 건 맞다. 천리포 수목원의 존재를 안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일단, 효창 공원에서 수업을 진행해 준 황금비 나무 의사가 천리포 수목원에서 근무하신다고 알려주시며, 그곳의 매력적인 특성을 몇 가지 알려주셨다. 말로만 들었을 때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광경이 그곳에 도착하자 납득이 되었다. 천리포 수목원은 푸른 식물 밭이 푸른 바다를 안고 있는 곳이었다.


우린 수목원 해설을 신청했다. 아는 게 많아야 보이는 게 많다고, 어딜 가든 해설 가이드를 들어보는 게 내 여행 깔이다. 패키지 투어처럼 몇 명 정원을 두고 받는 게 아니라 신청 인원에 상관없이 한 팀만 받는다. 희한한 구조였다. 그래서 한 시간 반 동안 해설해 주시는 수목원 요모조모를 전해 들었다.


천리포 수목원은 국유지가 아니라 개인이 점차 땅을 사들여 가꾸어 낸 사유지다. 이것부터가 제대로 된 광기가 아닐까 싶다. 어쩌다 미국 펜실베니아 태생의 외국인이 수목원 설립에 뜻을 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큰 뜻을 품어주신 덕에 우리가 좋은 풍광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수목원의 설립자인 칼 페리스 밀러는 79년 미국인 최초로 한국으로 귀화한 뒤 한국 이름인 민병갈로 개명하셨다. 이런저런 연유로 태안 앞바다의 6천 평의 부지를 사들인 민병갈 박사는 그 뒤 땅을 정비하고, 수목을 사들여 17만 평이 넘는 부지에 심어 나가는 일에 매진했다고 한다. 이 과정을 수목원 내 팻말과 설명을 들었을 때에도 대단하신 분이다, 생각했지만 그 뒤로 이 분의 생애에 대해 기사를 찾아 읽으니 이렇게 일구는 삶도 더없이 뜻깊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수목원과 서해 바다 사이에는 모래사장이 길게 나있다. 바다 바람에는 염분이 섞여있는 데다가 모래까지 섞이는 바람에 수목원 토지를 일구는 건 고된 작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방풍목을 수목원 가생이 따라 쭉 설치했는데 그 작업을 함께하신 해설사 분께서는 한참 동안 방풍목 사업이 무슨 의미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됐는지 설명해 주셨다. 아마 깨나 고생을 하신 모양.


수목원 안에는 한옥 숙소가 여러 채 있는데 여러 꽃과 나무 새 있거나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어디 채에 묵든 서정적인 경치를 선사하는 곳에 지어져 있어 다시 오면 꼭 한 밤을 머무르고 싶다. 꼭 다시 와야할 이유를 하나 만든 셈이다.

방풍목 너머에는 모래사장, 그 뒤로는 서해 바다. 바다 위에는 둥둥 섬이 떠있다. 닭 벼슬 모양을 했다 하여 섬 이름은 닭섬. 참 직관적이다. 구글 위성 지도를 보면 나름 벼슬이구나 싶긴 한데 막상 눈으로 보면 이게 왜 벼슬?이라는 생각이 든다. 민병갈 박사님께서는 닭을 싫어하셨다고 전해진다. 어렸을 때부터 시골 생활하다 보니 닭에게 질리셨다나, 그런 연유로 닭섬이 아닌 낭새섬으로 명칭 하길 바라셨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했을 때 닭을 애정하는 마음(나는 닭띠다)에 박사님께서 무어라고 섬 이름을 갈아 끼우신다냐, 생각했는데 그 섬도 천리포 수목원의 부지에 속한다 하여 그럼 낭새섬이지, 하며 수긍했다. 조수간만의 차로 섬에 가는 길이 열릴 때가 있다. 우린 시간이 빠듯하여, 즉 귀찮아서, 가지 못했는데 멀찍이서 내려다보니 돌 길을 건너가는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의 발자취를 눈으로 좇으며 간접 경험 했으니 대충 경험했다고 치련다.

수목원의 겨울 풍광을 한 차례 보았다. 붉거나 초록빛도 군데군데 보이지만 겨울 수목원의 지배적인 빛깔은 연한 갈색, 짙은 커피색, 밤색이었다. 흔히들 흐드러진 꽃을 떠올릴 때 연상하는 색채는 아니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그래서 한층 더 신비하다. 조용한 정적 틈새로 태동하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생명이 깃든 존재가 가만히 기다린다는 건 도태도 아닌 도약의 준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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