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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Nov 07. 2024

[부산] 마, 사직 야구장으로 온나

열음방학 09 8월19일-20일

무더위가 꺾일 줄도 모르고 기승울 부리는 8월 말이었다. 개학식은 8월 20일. 방학도 이윽고 끝에 다다른 것이다. 방학은 늘 그렇다. 시작하기 전에는 영겁의 시간을 거쳐 도달한 것만 같은데 방학식과 함께 여름 방학이 막상 시작되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개학식이 코 앞에 다가와 있다. 여름 방학은 겨울 방학보다 비교적 짧아서 그런 것도 있을 테고, 아무래도 날이 길다 보니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거나 학기 중에는 못했던 병원 투어니 사사로운 개인 용무를 보느라 하루이틀씩 까먹는 시간이 쌓여 결국 방학이 통으로 날아가 버린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래서 벌써 방학의 끝에 서 있게 되었다.


시작은 미미했다. 전국 야구장 직관을 꿈꾸며 여기는 이렇다더라, 저기는 저렇다더라, 이 구장은 이게 맛있단다, 저 구장에선 이런 것도 볼 수 있단다, 하고 잡담을 하는 정도였다. 그러다 부산 한 번 다녀오실까요, 하는 구체적 지명이 언급되었다. 마침 8월 말 롯데키움전이 있었고, 또 하필이면 둘 다 아슬아슬하게 방학의 끝자락에 머물 때였다. 그러니 원정 경기를 다녀온다면 이쯤이 가장 적기가 아닐 수 없었다. 1박 2일로 다른 거 다 볼 거 없고, 오로지 야구 경기만을 위해 사직을 방문하는 것은 어떠한가. 좋다, 떠나자. 우린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그 당시 별 생각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올여름이 얼마나 더웠는지, 그중에 부산의 여름은 어떤지에 대해 유효한 고찰이 있었더라면 다시 생각해 봄직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우리 인식에 직관은 언제나 신나는 것이었고, 성적을 보자 하니 키움이나 한화나 가을까지 경기를 치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을 때는 그보다 더 산뜻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서울부터 부산까지는 두 시간 반의 여정이다. 아무래도 교통의 요지 수저를 물고 태어난 대전시민으로 2시간 이상 고속열차를 타면 몸이 뻣뻣해지는 증세가 나타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대전을 넘어 남부로 달리면서도 도대체 언제 도착하나, 턱을 괸 채 물끄러미 창 밖만 바라보기를 한참이었다. 종착역인 부산에 도착했다는 알림이 전광판에 뜨자 바로 벌떡 일어나 채비를 했다. 밀면 먹게 다들 길 좀 터주세요, 확성기를 들고 외치고 싶었다.


친구와는 다른 열차를 타고 부산에서 만나게 되어 부산역사 내 카페 앞에서 보기로 했다. 나름 1박 2일의 여행이라 짐이 있었는데 챙겨갈 짐을 최소화하고자 나는 야구 유니폼 대신 팀 컬러를 가진 원피스를 입고 갔다. 키움의 다크 버건디와 흡사한 버건디 색을 가진 애착 원피스가 있어 망설임 없이 부산 여행 착장으로 입었다. 그 옷을 입고 부산역 탐탐 앞에 서 있는데 키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 몇 명이 오갔다. 반가워요 동지들, 우리 곧 봐요, 속으로 인사하고 있는데 멀찍이서 친구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버건디 원피스, 키움팬인가 싶었는데 진짜 너네.“

“역시 만물키움설.”

“누가 뭐래도 강한 꼴찌.”

“호락호락하지 않지.”

평소에 야구 기반의 대화를 자주 하기 때문에 키움과 한화가 사이좋게 하위권으로 내려온 과정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다시 되새겨 보건대 우린 그저 야구의 즐거움을 얻고자 이번 여행을 결심하였다. 야구가 연간 144경기를 주 6회 한다한들 지나치게 감정을 실을 필요는 없다. 물론 패배가 쌓여 하위권에 안착한 모습을 보면 조금 애석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직관할 때만큼은 경기 직관이 주는 기쁨으로 여타 부정적 감정을 여과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응원 문화라든가, 음식, 또는 맛도리 직관푸드, 그도 아니라면 풍성한 야구푸드, 특히 크림새우 등이 있을 수 있다.


숙소는 사직 야구장 근처 에어비엔비를 잡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모든 부산 여행 관광지는 자동으로 제쳐지게 되었다. 사직역으로 향하기 전 부산역 근처에서 밀면을 먹은 것만이 유일한 부산의 맛을 가미한 메뉴였다. 귀중한 기회였기에 친구와 나는 밀면을 한 가닥 한 가닥 소중하게 흡입하였다. 지하철은 한 번의 환승을 거쳐 30-40분을 소요할 예정이었다. 우린 3루 원정석이므로 직사광선을 직선타로 맞을 예정이었기에 부러 일찍 갈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짐을 먼저 내려놓고 조금 쉬었다가 경기 시간에 맞추어 나오기로 했다. 실제로 바깥은 더웠다. 오후의 뙤약볕에 이미 공기는 뜨끈뜨끈하게 데워져 있었고, 선글라스나 모자 없이는 햇볕이 너무 강해 제대로 눈을 뜨기도 어려웠다. 얼른 숙소로 대피하자 싶어 잰걸음으로 에어비엔비로 향했다. 사직구장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오피스텔이었다. 숙소 위치로 보건대 이곳은 너무나도 투명하게 야구 원정 경기나 롯데 팬을 위해 마련된 곳임이 자명해 보였다. 에어컨을 틀고 소파에 널브러져 잠시 누워있었다. 방학 막바지라고 안 그래도 친구나 나나 약간의 울적함이 은근하게 배어 있었다. 현실 도피에는 야구만 한 것이 없다. 야구로 떨쳐 내야지, 키움아, 이기거라.


6시 30분 경기였는데 사직 야구장도 구경하고 먹을거리도 미리 둘러보자는 제안에 조금 일찍 숙소를 나서게 되었다. 사직 구장 앞에서 기념이랍시고 사진 몇 방 박아주고 야구장 안으로 입장했다. 내년인가 후년부터 야구장을 새로 짓는다던데 정말로 신설 야구장이 시급해 보였다. 이글스 파크도 연식이 비할 데 없이 낡았지만 이 동네도 만만찮아 보였다. 들은 바로는 고척처럼 돔을 얹는다고 했던가. 잠실 야구장이나 이글스 파크도 그렇고, 아무래도 잦아지는 우천 취소를 염두에 두고 돔 야구장을 많이들 짓는 추세인 것 같은데 야구장 낭만 중 하나로 단연코 뻥 뚫린 시야와 노을 구경을 꼽는 나로서는 야구장에 뚜껑을 덮어버린다는 게 여간 아쉽지 않을 수 없다. 한여름 더위에는 당연히 고척돔만 한 곳이 없기는 하지만 실내에 들어가면 기본적으로 시야가 침침해지는 느낌이 드는 데다가 야구장에서 보는 주황색으로 물드는 하늘을 보내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사직 야구장의 더위에 숨이 조금씩 막혀 오는 걸 생생하게 느끼고 있으니 장기적으로 보자면 뚜껑을 덮는 게 이치에 맞긴 하겠다는 쪽으로 또 생각이 쉬이 바뀌어 버린다. 부산 여름, 덥긴 덥네. 기후 위기, 위기는 위기네. 해는 사직 야구장의 천장 뒤로 꿈벅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할딱이면서 넘어가면서까지 요란하게 더위를 불사 지르고 있는 탓에 짧은 옷차림과 쿨링 시트를 덕지덕지 붙였는데도 체온이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닭강정을 한 박스 사고 자리에 앉았다. 사직 야구장이 단차가 적어 앞열에 앉으면 멀리까지 보기는 어렵다는 좌석 시야에 관한 직관 후기 글을 여럿 읽긴 했었다. 우리 좌석은 지나치게 앞 좌석까지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그라운드와 좌석 간 사이가 좁아서 그런지 선수들이 바로 앞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오, 급하면 내가 대타로 나가면 되는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국민의례와 시구시타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롯데 응원가는 왜 이리 중독적인가. 원정이어서 가뜩이나 응원단도 없어서 몇 없는 키움 한줌단이 무반주로 응원가를 외치고 있는 와중에도 롯데 응원가가 멀찍이서 들려오면 오히려 거기에 맞추어 흥얼거리게 된다. 집관하면서 롯데전을 보면 중계 너머로 들려오는 응원가가 그렇게 탐이 날 수가 없었는데 역시 현장에서 들으니 그렇게 맛깔날 수가 없었다. 가끔 응원단을 원정 경기에 파견 내릴 때도 있지만 이 날은 그런 은혜를 받는 날이 아니었다. 원정응원석인 3루 쪽에 앉았는데도 롯데 팬들이 훨씬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조금 외로워졌다. 흥참동을 박차고 뛰쳐나가는 건 오로지 실력, 성적, 그리고 결과뿐이다 키움아, 명심하거라. 긁어모아 한 줌이 될까 말까 한 키움팬들은 모여서 육성 응원을 하기도 했는데 슬픈 것은 모여서 한 꼬집인 키움 팬들이 어느 구역에서 응원가를 시작하면 다른 구역에 파묻혀 있는 키움 팬들이 합세해 부르려고 노력하지만 시간 차 이슈가 생겨 결국 돌림 노래가 되어 버리고, 설상가상으로 타자 응원가가 끝나기도 전에 삼진 당하거나 병살 엔딩을 맞이하는 환장의 플레이가 이어져 버려 팬들은 기막힌 광경에 의지도 잃고 용기도 잃은 채 숙연하게 관람을 계속 이어나갔다는 것이다.


전날 2차전 경기는 타자 전이어서 매 이닝마다 점수가 났는데 이 날 본 키움롯데전 3차전 경기는 점수가 유독 짰다. 양 팀 다 초반에 점수를 내고 1점 차로 선두를 차지한 롯데가 스코어를 7회까지 지켰다. 그러다 7회 초 김건희의 솔로포로 따라잡으며 4:4 동점이 됐다. 경기는 연장전까지 이어졌고 전준우의 좌측 담을 넘기는 끝내기 홈런으로 롯데는 승리를 거두었다. 듬성듬성 앉아 있던 한 줌 키움 팬들은 연장전으로 게임이 이어지는 중에 열차 시간 때문인지 족족 경기장을 빠져나갔는데 아예 숙소를 잡아두니 당일치기로 서두르지 않아도 되어 그 점은 속 편했다. 물론 최종 스코어는 편치 않았지만 그건 키움아, 너네 잘못이니 반성하거라.


경기가 끝나고 관중들이 우르르 빠져나왔다. 비록 경기를 지기는 했지만 사직 야구장을 와봤다는 것 자체로도 재미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해 고조된 기분으로 숙소로 돌아가려던 차였다. 출구로 나가는 길에 주차장에서 사람들이 줄 지어 서있길래 뭔가 싶었더니 다들 버스로 돌아가는 선수들을 기다리는 팬들이었다. 뭐야, 뭐지, 뭔데, 무슨 줄이야, 중얼중얼 대면서 자연스럽게 줄에 합류하긴 했는데 누구 하나 나올 기미가 없어 그냥 집 가자 하려던 찰나였다. 누군가가 나오긴 나왔는지 앞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환복하고 나오는 선수들을 보니 유니폼을 입지 않기도 하고, 야구력이 약하기도 해서 그런지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주변에서도 여기서 누구야, 하면은 저기서 누구다, 하면서 웅성거리니 헷갈리기도 했다. 한 명씩 나오면서 기다리던 팬들에게 사인이나 사진을 남겨 주기도 하는 선수들도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는 송성문 선수였다. 그 선수는 친구한테 작년부터 듣기도 하고, 올해 성적이 좋아 중계방송을 볼 때도 자주 들은 선수였다. 오, 야구 선수다, 싶을 만큼 체격이 좋고 다부져 팬은 위에 서 있고 아래에서 선수가 올려다보며 사진을 찍는 중이었는데도 큰 덩치가 느껴졌다. 친구가 얌전히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을 수 있을까요, 하니까 송성문 선수가 예예, 하면서 옆에 나란히 섰다. 친구가 수줍게 사진을 남길 동안 나는 수줍어하는 친구의 사진을 찍었다. 여태 직관을 하면서 야구장 밖에서 야구 선수를 본 적이 없는데 부산까지 와서 선수를 가까이서 보다니 신기했다. 남은 시즌 잘 부탁해요, 송성문 선수. 동물 농장 내레이션처럼 아련하게 마음속 응원을 하며 경기장을 나섰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사직 구장 도보 5분 거리에 숙소가 있어 동네 마실 나온 것처럼 다시 숙소로 들어갔다. 야구 도파민에 절여져 우린 쉽게 잠들지 못했다. 친구가 재밌다고 요새 본다는 야구대표자 에피소드를 하나 봤다. 대충 어떤 프로그램인지만 보려고 했는데 보다 보니까 한 시간이 훌쩍 갔다. 야구대표자는 야알못인 엄지윤이 10개 구단의 구장을 소개하고 야구 문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나도 야알못일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나름 두 시즌 내리 야구판에 발 들였다고 엄지윤보다 아는 게 한 두 개는 더 있었다. 야잘알까지는 감히 넘보지는 않아도 야중알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작년 성대 결절로 목소리를 잃고 하루 8시간 말하고, 나머지 8시간은 묵언 수행을 하며 지내는 한 학기 동안 야구 경기를 즐겨 보기 시작했다. 첫 직관 경기는 혹시나 재미없을까 봐 읽을 책을 들고 가 고척돔 4층 좌석을 갔다. 야무지게 동양미래대학 맞은편 오코노미야끼 10알을 사 갔었다. 옆에 앉은 아저씨한테 야구 경기는 보통 몇 시간쯤 하나요, 물었더니 세 시간, 이라는 친절한 답변을 받고 경기를 다 보고 갈 수 있을까 우려했었다. 그렇게 첫 직관을 마치고 나선 나도 모르게 야며들기 시작했다. 주중에는 중계방송을 보며 라디오처럼 은은하게 틀어 놓은 채 집안일도 하고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주기적인 직관으로 이어진 건 고척돔과 집이 너무 가까운 덕이었다. 20분만 걸으면 고척돔이어서 너무 쉽게 직관러의 길에 발을 들였다. 혼자 가고, 둘이 가고, 셋이 가기도 했다. 5회까지 보지도 않은 채 나올 때도 있었고, 느지막이 6회에 입장할 때도 있었다. 가서 입 다물고 박수만 뻑뻑치다 온 적도 있고, 선수 응원가를 어느 정도 섭렵하고 나선 응원석에서 야구방망이를 팡팡 두드린 적도 있었다. 야구장은 단순히 야구 경기만 보러 오는 곳이 아니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포스트 시즌을 가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오는 긴장감이나 순위 싸움이나 연패 기록, 구단의 헛짓거리가 주는 스트레스, 시즌마다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야구 선수의 느닷없는 스캔들이 안겨주는 황당함도 있다. 그래도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야구파민을 끊지 못하는 건 왜일까. 사람을 짜릿짜릿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그게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고, 매 시즌이나 매 경기마다 달라질 수도 있겠다. 야구의 낭만일 수도 있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 느끼는 해방감도 있다. 같은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서 열렬히 응원하는 데서 오는 소속감. 오늘의 야구푸드는 뭐로 할까, 각양각색의 먹거리를 즐기는 데서 오는 포만감과 즐거움도 있다. 우스갯소리로 야구는 자학이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난 이미 마조히스트가 되어버렸다. 다음 시즌 야구, 같이 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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