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충천용 샤프심이 세 개나 더 들어있는데 고작 단 돈 천 원이라니! (이거 남는 장사 인가요?)
웬 횡제냐며 연필을 덥석 들었다. 하얀색 바디에 은색 액세서리로 한껏 멋을 낸 친구. 연필 머리를 누르는 소리가 마치 시계 초침소리처럼 들린다. 딸각딸각딸각... 의도적으로 내는 소리가 좋아서 몇 번이고 눌렀더니 얇은 연필심이 길게 나왔다. 나온 샤프심을 집어넣기 위해서는 길게 따~~~~~~~~알 깍 눌러주니. 부끄럽다는 듯 어느새 쏙 들어가는 연필심.
얼마 전에는 아날로그 감성이 좋다며 연필을 사용했다. 연필의 단점은 쓰다 보면 뭉툭해진다는 것. 나는 갓 깎은 뾰족한 연필심이 좋은데, 연필은 매번 깎아줘야 하니 귀찮은 일이었다.
언젠가부터 독서를 하며인상적인 구절이 있으면 다른 문구보다 샤프 연필로 밑줄을 긋는게 좋다. 어차피 지우개로 지우는 것도 아닌데, 굳이 왜 샤프 연필이 좋은지 고민해 보았다. 볼펜은 편리하며, 깔끔하게 써지긴 하나 너무 빠르게 흐른다. 볼펜을 열차 속도로 비유하자면 KTX 급이고, 샤프 연필은 2000년 11월 14일에 운행이 중단된'비둘기호 열차'와도같다. 비둘기호는 매 정거장마다 서고 가고를 반복했기 때문에 그만큼 도착지점까지 가장 늦게 도착한 열차였다. 샤프 연필을 비둘기호 열차와 비교한다는게 순 억지 같지만, 빠른 것보다 조금이라도 느린 것이 더 좋다는 의미로 해석하길 바란다.
본래 샤프 연필은 다양한 나라별 명칭을 갖고 있다.
한국은 샤프, 샤프펜슬, 기계식 연필, 자동 연필이라 부르며, 영국은 Propelling pencil, 미국은 Mechancical pencil, 호주는 Pacer, 인도는 Pen pencil, 중국어는 자동연필, 일본어로는 샤프펜시로, 샤푸, 샤푸펜, 샤펜이라 불린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명칭인 샤프펜슬은 1915년 샤프전자의 창업자 하야카와 도쿠지가 ‘하야카와식’ 금속 구리 다시 연필을 만들어내면서 세상에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는 0.5mm 샤프를 세계 최초로 발명해 큰 인기를 끌었다. 샤프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회사 이름도 아예 샤프로 바꿔버렸다. 조그마한 발명이 이뤄낸 기적이다. 우리는 일본 회사를 기억하기 위해 '샤프연필'이란 명칭을 지금까지 사용한 걸까. 그렇다고중국식 자동연필은 어딘지 불편하다.
그럼 이건 어떨까? 나름 고민해보았고, 조금은 엉뚱하긴 하지만.' '비둘기 연필'은 어떤지? 다행히 내가 산 연필 제조사를 보니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 위치한 작은 중소기업에서 만든 한국 제품이다. 저렴한 건 중국에서 만들었다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국산이라 기분좋다.
내가 비둘기 연필과 인연이 닿은 건 두 달 전쯤이다. 우연히 다이소 매장에 갔다가 눈에 띄는 연필을 만났고, 저렴한 가격이지만 무난해보였다.
근데 비둘기 연필의 치명적인 단점은 사용하다보니 귀엽고 앙증맞은 캐릭터가 인쇄된 부분이 홀딱 벗겨지고 하얀색만 남았다는 것이다. 귀여움이 매력이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심플함만 남아있다. 나는 하얀색이나 검은색 같은 원색을 좋아한다. 연필은 주인의 취향을 알았는지 어느새 밝은 옷을 훽 벗어던졌다. 기특하다.
어릴 적 내게 연필은 지긋지긋한 존재였다. 공부는 하기 싫고, 연필이나 책만 봐도 넌더리가 날 정도였다. 얼른 학교를 졸업해서 사회에 나와 공부와 담쌓고 지내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이뤄졌고, 책과 연필은 마치 먼 나라 이웃이 돼버렸다. 책과 연필이 집에 없으니 책상이나 서재도 불필요했다. 젊은 나이게 필요한 건 화장품을 보관할 화장대나 거울 하나면 충분했다. 책과 연필이 없어도 곱게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으면 장땡이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딜 가나 문구만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다. 마스킹 테이프, 볼펜, 연필, 색연필, 수첩, 스티커 할 것 없이 전부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문구를 사랑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책과 만났다. 책을 보면서 기록을 하고, 기록을 하다 보니 자신 스스로 '쓰는 사람'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제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어도 쉽게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며, 행복한 일이 있을 때는 행복이 배가 되는 마법은 연필로부터 시작되었다.
천 원짜리 비둘기 연필은 더이상 허약하지 않다. 작은 배가 빵빵하도록 연필심을 넣어줬더니 힘도 세졌다.
연필이 고장나지만 않는다면, 어떤 어려운 책을 만나더라도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해 줄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잠깐 멈추어 세워 나의 '일상을 살피는 마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의미 없이 지나친 순간도 그러모으면 하루를 사는 비타민 한 줌이 될 거라 믿어요. 아무리 바빠도 매일 글쓰는 모임 작가 여섯이 꾸려가는 공동매거진 <일상을 살피는 마음>을 구독하고 당신의 일상에도 영양을 듬뿍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