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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엄마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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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똥 Dec 11. 2022

늦은 시간 시골집에서는 이런일이

엄마가 기다렸던 시간

 주말 근무를 마치고 늦은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시골집에 왔다. 도착하니 저녁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엄마, 아빠는 주무시고 있을때라 밖에서 바라보는 방과 거실은 컴컴했다. 현관 비번을 띠띠띠 누른 후 문을 열자 엄마는 인기척을 느끼고는 내복 바람으로 뛰쳐나왔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피곤한 토요일보다 일요일에 자주 시골집을 갔기 때문에 엄마는 우리가 올 거라 예상하지 않았던 거다.

"어이구! 웬일이여. 이 시간에 오게..."

놀란 기색도 잠시, 엄마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이미 30분 전부터 차 안에서 잠든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방 안에서 매트와 이불을 깔았다. 쌍둥이 중 한 아이를 방에 눕히고  또 다른 아이를 데리고 오자 엄마는 금세 이렇게 컸냐며 아이 엉덩이를 두드렸다. 딸을 바라보는 눈빛보다 손자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할머니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졌다.


아이들을 눕히고 난 뒤 대충 벗어놓아 흐트러진 운동화가 보였다. 신발장 옆에는 어버이날에 사다 드린 카네이션이 추운 겨울을 피하기 위해 화분에 심어있었다. 5월에는 작고 초라했어도 꽃은 만발했던 카네이션이 시골집 뜰에서 자라더니 제법 뿌리를 내려 실해졌다. 겨울임에도 꽃이 피어있는 모습에서 자식을 그리워하는 부모가 비쳤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식 걱정뿐인 어미 마음처럼 카네이션은 꽃이 피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스로 온 힘을 다해 수분을 보충하고 잎을 내어 꽃 봉오리를 만들어 만발하기까지, 내 부모도 꽃 같이 험난한 인생을 살아왔다. 이제는 좀 쉴 때도 됐는데 자식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어떠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에서 카네이션 같은 삶이 보였다. 아, 그래서 자식이 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을 선물하는구나. 그랬구나.



엄마와 함께 전기요가 깔려있는 거실에 누웠다. 주말 근무를 하고 온 거라 무척 피곤한 시간이었다.

얇은 이불을 덮어도 따뜻한 온기가 피부를 파고들었다. 눈이 스르르 감길 즈음, 엄마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현주네 여편네는 얼마나 억척스러운지, 새벽 내내 잠도 안 자고 굴 까느라 바빠. 그 집은 그렇게 일해서 돈 번 거지. 맨 몸뚱이로 이사 와서 고생 많이 하며 살았어."

"월요일에는 둘째네나 오라고 해야겠다. 마당에 마른풀 천지인데 네 아빠가 그런 거나 할 줄 알아야지.

그거 걷어서 불에 태워야 하는데, 해달라고 하기도 그렇고. 알아서 치워주면 좋을 텐데..."

"그 여편네는 딸을 잃고 많이 힘들 거야. 딸이 저 세상 가고 키우던 강아지를 거실에서 기르는데 아이고, 거실에서 오줌 냄새가 범벅이야. 근데 하얀 강아지가 꽤 순해서 내가 가니깐 꼬리를 얼마나 흔들던지, 예쁘긴 하데..."

"내년에는 조금씩 돈을 모아서 김치냉장고 하나 사야겠어. 지금 사용하는 게 영 시원치 않아..."

"생전에 오빠 둘이 그렇게 싸워서 안 보고 사느니 하더니, 큰 오빠가 먼저 죽고, 바로 둘째 오빠가 떠났어.

사는 게 별거야. 얼마나 산다고 뭐 그리 으르렁대던지, 죽고 나면 다 부질없는 건데 왜 이리 싸웠는지 몰라.

그래도 둘째 오빠는 운동신경이 좋아서 세 시간 거리를 내가 사는 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어. 그때는 도로가 좋긴 했나. 그런데도 힘든 기색 없이 자전거를 타고 왔지. 나는 두 발 자전거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었어.

오빠 등 뒤에서 타 본 게 전부였는데, 가끔 자전거를 보면 오빠 생각이 나네."


엄마는 밤이 깊어질수록 또렷하게 그날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만 자야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엄마의 음성을 들으니 그만 듣고 싶다고 말할 수 없었다. 엄마는 대화 상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잠깐 와서 밥만 먹고 가는 딸보다 저녁 시간에 함께 있을 수 있는 딸이 그리웠던 게다.


그렇게 엄마와 딸의 대화는 새벽 3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엄마는 바카스 한 병을 내밀었다. 시골에서는 피곤하거나 몸이 고될 때마다 바카스를 습관처럼 마신다. 커피 한 잔이 아니라, 바카스 한 병을 마시면 피곤함이 말끔히 사라진다고 했다. 늦게 잠든 탓에 피곤했지만 엄마가 준 바카스 한 병을 마시고 나니 정말 몸이 한결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아침 일찍 엄마는 오징어와 고추장을 넣고 팔팔 끓 오징어국을 만들었다. 무를 잔뜩 넣은 오징어국은 겨울철 속 시원하게 먹을 수 있는 별미였다.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스팸과 계란 프라이를 부쳤다. 프라이가 지글지글 익어가자 부엌에는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수향미 햅쌀은 어찌나 구수하던지 밥알에서는 윤기가 좔좔 흘렀다.


개구쟁이 아이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반겼다. 어느새 백발노인이 된 할아버지는 껄껄껄 웃으며 아이들을 흐뭇한 얼굴로 안았다. 새삼 백발 아빠의 모습에서 평범함이 주는 일상이 가장 행복한 일인 걸 깨닫는다. 그동안 매일 똑같이 흐르는 일상이 지겹거나 재미없다고 외치던 자신이었다. 하지만 밤새도록 엄마와 나눈 대화, 손자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아빠의 부드러운 눈 빛이야말로 지금까지 삶 중에서 가장 찬란한 시간이 아녔을까. 이 세상에서 함께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는 걸 느끼는 지금 이 순간.  엄마 아빠를 떠올리며 글을 쓰는 지금도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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