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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 Aug 16. 2024

제주 올레 8코스, 박서정과 박수기정

‘사는 동안 늘 행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선택한 모든 것에 후회는 없어요’ 나의 묘비명이다.

나는 여순 다섯 살에 지구별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사는 동안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다.

본격적으로 올레길을 걷기 시작한 때는 코로나19 시국이었다. 시간 될 때 짬짬이 걷느라 진행 속도가 더디고 완주까지는 몇 코스 더 남았다. 올해는 큰맘 먹고 10박 11일 휴가를 냈다. 11일 동안 숙소를 한 곳으로 정하고 제주 서쪽 코스를 완주할 계획이었다. 떠나기 전 급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저녁 비행기를 탔다. ‘이 늦은 밤에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짐 찾을 때, 택시 탈 때 한참 줄 서서 기다렸다. 제주 밤 골목은 가로등이 없어 깜깜한 어둠 그 자체다. 더욱이 돌담 색깔이 검회색이라 길인지, 담인지 가름하기 어려워 택시 보닛이 돌담에 몇 번 스치고 자정이 다 돼 겨우겨우 숙소에 도착했다. 

아침 햇빛이 강렬하게 눈에 꽂혔다. 창밖을 보니 한라산이 ‘짠!, 안녕!’ 인사를 건네, 제주도에 왔음을 실감했다. “아! 좋다, 좋아! 역시 제주도야!” 외치며 기지개를 켰다. 먹을 거라곤 냉장고 안에 생수 두 병과 육지에서 바리바리 싸 온 영양제들뿐! 갈증 때문인지 생수 한 병을 순식간에 비웠다. 단맛이 났다. ‘주변에 식당은 많을 테고, 식사 후 걸으면 되니까’ 생각하고 서둘러 나왔다. 식당이 몇 보이는데, 폐업이거나 오전 11시 이후 영업한다는 안내판이 야속하게 붙어있다.

애월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한참 걸었다. 만만한 김밥집은 장기 휴업이고, 생선 구이집은 오픈전. 더 걸어서 국숫집에 갔다. 우리는 따뜻한 만둣국과 고기국수를 주문했는데, 주문 즉시 나온 음식은 뜨뜻미지근했고 깊은 맛이 없었다. 몇 숟가락 뜨지 않고 바로 택시를 불렀다.

숙소에서 8코스 시작점까지 버스는 2시간 이상, 택시는 30분. 우리는 비용보다 시간을 선택했다.   

   

8코스 시작점 ‘월평 아왜낭목’ 쉼터에 도착해 가볍게 몸을 풀고, 카페인 충전을 위해 커피숍을 찾았다. ‘카페Onol(오놀)’ 바깥 모습은 분식점 분위기로 기대에 한참 못 미쳤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실내는 화이트톤으로 생각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우리는 감귤 무스케이크, 약과, 시그니처 라떼 그리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분식점 같은 외형과 다르게 커피와 디저트 맛은 훌륭했다. 달지 않으면서도 입속에서 살살 녹는 감귤 무스케이크와 부드럽고 고소한 라떼 맛은 오래 기억되는 맛이었다.     

1km쯤 걸어 약천사에 도착했다. 규모가 큰 절로 서귀포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대웅전이 인상적이었다. 약천사에서 숲길로 이어진 한산한 길을 걸었다. 분출한 용암이 흐르다가 바다와 만나면서 육각형의 거대한 돌기둥이 병풍처럼 펼쳐진 ‘주상절리’의 장엄함에 발걸음을 멈추고 넋을 놓았다. 중문 관광단지의 셀럽답게 위풍당당한 자태를 보기 위해 사람이 북적였다. 베릿내오름은 나무 난간과 계단길이 정상까지 이어져 수월하게 올라갔다. 베릿내는 ‘천제연의 깊은 골짜기 사이를 은하수처럼 흐른다고 해서 별이 내린 내’라는 설이 있다. 


오름 정상에서 한라산을 보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바람에 펄럭이는 올레 리본을 보며 마음이 훈훈해졌다. 올레길을 걸을 때 나뭇가지에, 전봇대에 걸려있는 두 가닥 리본을 마주하면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내밀어 주는 손 같았다. 꺾어지는 길모퉁이 혹은 갈림길에 서서 어디로 갈까 고민할 때 저 멀리 바람 따라 살짝 보이는 리본이 나를 걱정해 주는 좋은 사람 같았다.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손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길냥이도 따라오고, 백구도 함께 걷는 올레길은 즐거움이다. 

4월의 제주는 봄 잔치, 꽃 잔치였다. 사람이 북적이는 곳은 이정표를 찾아보지 않아도 관광지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샛노란 유채꽃과 연분홍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예래생태공원은 볼거리가 많아 아이부터 노인, 외국인까지 세대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 충분했다. 바람과 함께 벚꽃잎의 환대를 받으며 타박타박 걸어서 바당길로 나왔다. 왼쪽은 바다, 오른쪽은 언덕. 구불구불 이어지는 환해장성을 지났다. 마을에서 논짓물을 모아 노천 수영장을 만들었다는 논짓물 담수욕장에 도착했다. 확 트인 바다, 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신나게 수영하는 나를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수영을 못하니까!)    


완만하게 굽은 길을 바다를 보며 계속 걷다가, 저 멀리 보이는 웅장한 바위 절벽을 보고 ‘송악산인가?’ 가볍고 얇은 생각을 했다. 그 모습이 하도 범상치 않아 걸음을 멈추고 검색해 봤다. ‘박수기정’ 샘물을 뜻하는 ‘박수’와 절벽을 뜻하는 ‘기정’이 합쳐진 말로, ‘바가지로 마실 수 있는 깨끗한 샘물이 솟아나는 절벽’이라는 뜻을 가졌다. 한참을 걸어도 그 자리, 그대로인 박수기정을 보며 문득 ‘이 마을 사람들은 매일 박수기정과 함께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밭을 매고, 학교에 가겠구나!’ 생각하니 부러웠다. 그런데 몇 번을 되뇌어도 입에 붙지 않아 “언니 저 바위 절벽 이름이 박... 뭐라 했지?”, “박수기정!”, 얼마 걷다가 또 “언니 저 바위 절벽 이름이 박수 뭐라 했지?” 몇 번을 물어봤다. 급기야 언니가 “아이고, 서정아! 박. 수. 기. 정. 네 이름이 두 글자나 들어갔다. 하하하”      

도착 표지석에서 도장 깨기처럼, 패스포트에 스탬프 찍을 땐 야릇한 쾌감이 들었다. 얼굴은 땀으로 얼룩덜룩, 안색은 초췌하기가 피난민보다 더했다.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대평포구에서 가까운 ‘명호돗갈비집’에 들어갔다. 특유의 고기 누린내도 나지 않고 깨끗했다. 천겹살과 돗갈매기를 썩어서 2인분 주문하니 기본으로 갓김치와 파김치 그리고 몸국, 연달아 숯불과 고기, 갈치속젓이 빠르게 나왔다. 직원이 고기를 노릇노릇 맛있게 구워서 앞접시에 놔주면, 쉴 새 없이 입속으로 들어간 고기는 침만 발라도 허기진 뱃속으로 꿀떡 넘어갔다. 추가 메뉴로 고사리 볶음밥을 주문했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쉬엄쉬엄 걸어 대평리 버스 정류장에서 ‘751-2’ 마을버스를 타고 안덕계곡을 넘어 화순리 정류장에 도착, 안덕농협 하나로마트로 걸어갔다.

장기숙박이라 준비할 게 많아 야무지게 장을 봤다. 택시를 타고 숙소까지 편하게 왔지만, 신선한 야채, 과일을 욕심껏 사느라 무거워진 짐을 3층까지 낑낑대며 들고 올라오느라, 들어서자마자 마루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첫날은 워밍업 정도로 가볍게 걸었어야 했다. 20km 이상 걸으며 강행군했다 싶지만 그래도 뿌듯했다.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며 더 새로운 내일을 위해 불을 끄고 누웠다. 제주 밤하늘 별빛이 맑다.

오늘 가장 좋았던 세 가지를 생각하다가, “언니 그 박. 정. 뭐라 했지?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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