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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 Dec 02. 2024

그래서, 올레길 19코스

동행 

“제주 출장이 잡혔는데, 같이 갈래?”, “좋아!, 근데 난 업무 끝나고 밤 비행기로 갈 수 있을 듯!, 우리 주말에 올레길 걷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계획에도 없는 제주도행 비행기를 늦은 밤 탔다. 출장 업무를 마치고 혼자 심심해 좀이 쑤셨던 친구는 공항까지 마중 나왔다. 색다른 곳에서 친구를 만나자, 웃음부터 나왔다. “넌 확실히 돌-아이가 분명하다!”, “왜?”, “사람들이 대부분 오른쪽으로 나왔는데, 넌 왼쪽에서 나왔잖아!”, “애가 또 멀쩡한 사람을 잡네!” 만나자마자 티키타카를 주고받았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이 제주도에 와 있는 듯, 택시 행렬이 길어 방향을 바꿔 버스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제주 북쪽 바다는 탄산수처럼 톡 쏘는 생동감이 느껴져 365일이 새롭다. 19코스는 탄산수 같은 바다에서 숲으로 숲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밭으로, 밭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날것 그대로 제주를 온전히 즐기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김녕서 포구에서 조천만세동산까지 역방향으로 걷기로 했다. 

남흘동 버스정류장에 내려 19코스 종착점 김녕서 포구로 걸었다. 달개비꽃이 새초롬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어서 와!’ 다정하게 인사를 나눴다. 가볍게 몸을 풀고 농로를 걸었다. 

시골 출신답게 친구는 밭작물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당근, 콩, 무는 기본이고 어린 새싹을 보고 양배추 싹인지 배추 싹인지 단번에 알아봤다. 나는 친구가 마냥 신기할 따름이었다. 

돌담 안 서리태콩은 바스락바스락 가을이 왔음을 알렸고, 몽글몽글 하얀 메밀꽃은 흐드러지게 피었다. 수줍게 핀 하얀 메밀꽃을 보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소설이 생각난다. 봉평장터로 향하는 길에 평생을 길 위에서 떠돌던 장돌뱅이 허생원과 젊은 동이의 우연한 만남이 엮어주는 따뜻함과 왼손잡이라는 공통점으로 인연에 대한 애틋한 여운이 남아서 그런지 지금까지도 아련한 느낌이 든다. 마을로 접어드니 담장 밑 붉은 백일홍은 미모를 한껏 뽐냈고, 새파란 노지 귤은 그에 질세라 한없이 도도했다.

마을에서 곶자왈로 접어들었다. 마치 산소 탱크 속에 들어온 듯 선선하며 청량했다. 혼자 곶자왈을 걸을 땐 앞만 보고 걸었다. 무섭다는 느낌에 빨리 통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사람을 만나면 더 긴장됐는데, 함께 걸으니 주변 자연을 더 깊이 관찰할 수 있었다. 숲 속을 걷다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 중 멋진 팻말이 중간중간 길잡이를 해줬다. 함께 읽으며 서로 “맞아! 맞아!” 맞장구치며 이야기할 수 있어 좋았다. ‘좋은 동행자가 함께하면 그 어떤 길도 멀지 않는 법이다’ 친구랑 걷는 길에서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쉴만한 공간을 찾지 못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걷다 보니 다리가 퍽퍽하고 무거웠다. 그늘진 모퉁이 길 안쪽에 외투를 깔고 서로의 등을 의지하고 앉았다. 서로 기댈 곳이 있어 허리가 편안했다. 주섬주섬 가방에서 사과를 꺼내 반으로 쪼개 나눠 먹었다. 놓치고 지나온 사소한 추억을 이야기하다, 상대방 성격이 서로 안 좋다고 타박하며 끽끽 웃었다. 

맑은 햇빛에 쨍하고 빛나던 바람은 나와 친구, 나뭇잎 사이에서 춤추고 풍력발전기 13호도 쉼이 필요한지 날개를 접고 숨을 고른다. 서로가 아주 다르다며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주체를 못 하는 열정과 배려가 담긴 센스 그리고 남의 뒤에서 비굴하지 않아 친구가 좋았다. 

숲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아담한 북촌리 등명대를 만났다. 등대 이전의 등대로 제주 원주민들이 현무암을 쌓아 세운 최초의 민간 등대가 지금은 기능을 다했지만, 존재만으로도 가치와 의미를 발휘했다. 

잔잔한 푸른 바다 너머로 손에 잡힐 듯 ‘다려도’ 무인도가 한가롭게 기지개를 켠다. 바다는 마을 앞마당까지 불쑥 마실 나왔고, 파도도 바다를 버리고 마을로 나왔다. 한적한 포구마을에 개들은 하품이 늘어지는데, 우리는 흥이 났다. 

북촌리를 들머리로 푸른 바다를 친구 삼아 가파른 길을 쉬엄쉬엄 걸으면 어느덧 서우봉 뒷자락에 닿는다. 소나무가 빼곡한 숲길은 흙과 솔향이 버무려져 머리를 맑게 했다. 가을 첫 자락, 낙조 전망대에 서서 함덕해수욕장을 내려보니 서핑과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아직 많았다. 

넓고 투명한 옥빛 바다를 오래오래 볼 수 있어 눈이 즐거웠다. 서우봉은 고려시대 삼별초와 관군의 전쟁,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절벽에 파 놓은 수십 개의 진지동굴, 4.3의 피비린내까지 순탄치 않은 세월에도 고결하고 그지없이 아름다운 함덕 바다를 품었다. 그 많은 제주 해수욕장 중 바다색이 예쁘기로 유명한 함덕해수욕장은 아기 엉덩이 같은 하얀 모래등을 훤히 내 비췄다. 길 위에서 서서 죽을 때까지 욕심이나 불순한 생각 없이 아이처럼 순박한 마음을 유지하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제주 해안도로를 걷다 보면 마을의 액막이를 위해 쌓은 방사탑이 여지없이 나타난다. 바위와 백사장이 잘 어우러진 긴 해변에는 늦은 물놀이를 즐기는 일행이 있었다. 밀물 때는 맑고 투명한 물빛이 신비롭고 썰물 때는 백사장 전체가 드러나며 장관을 이룬다는 신흥해수욕장을 지났다. 걸음이 점점 무거워지고 투박해졌다. 태양도 어느덧 조천포구에 걸려 우리의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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