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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생 Sep 07. 2022

우연, 그것이 건축의 유일한 질서다

하나의 경구에서 시작하자. “건축은 자연을 담는 그릇이다.” 이 진술에 동의하지 않는 건축가는 없을 듯하다. 땅, 하늘, 바람, 태양, 그리고 인간. 이 모두가 자연에 속하며, 건축가는 이를 어떻게 건축에 담을지 고민한다. 지형이 어떤지, 기후는 어떤지, 풍향은 어떤지, 일조량은 어떤지, 누가 이곳에서 살 것인지 등을 건축가는 고려하여 주어진 환경에 맞는 최적의 건물을 짓고자 한다. 기원전의 건축가도, 중세의 건축가도, 21세기의 건축가도 자연을 잘 담기 위해 고민한다. 아마 2572년의 건축가도 이를 고민할 것이다. 결국 건축은 “어떻게 자연을 담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과 반박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건축은 자연을 담는 그릇이다.”라는 언명을 일종의 건축적 진리로 간주해도 될 것 같다.


여기서 잠시 프랑스의 철학자 퀑탱 메이야수의 말을 들어보자. 


“사실성을 이유 없이 존재하는 모든 세계와 모든 사물의 실재적 속성으로, 그런 점에서 실제적으로 이유 없이 다르게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실재적 속성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비이성이라고 부르는) 이유의 궁극적 부재가 우리의 앎의 유한성의 표식이 아니라 절대적인 존재론적 속성이라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성 원리의 실패는 아주 단순하게 이성 원리의 허위성 ― 심지어 절대적인 허위성 ― 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참으로 그 어떤 것도 존재 이유를 갖지 않으며, 다르게가 아니라 그렇게 존속할 이유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1]


우리는 칸트 이후 의식 또는 언어와 상관적이지 않은 절대적 외부를 사유할 수 없게 되었다. 메이야수는 이를 비판하며 절대적 존재자를 사유하고자 한다. 단, 이 사유의 길은 칸트 류의 상관주의와 종교적 독단론 모두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그의 해결책은 독단론에 대한 상관주의의 비판 – ‘존재자가 존재하는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혹은 ‘모든 것은 지금과 다르게 존재할 수 있다.’ [2] - 을 급진화(절대화)하는 것이었다. 즉 “이러한 “비이유율”을 절대적인 원칙으로 받아들이면 “모든 사물의 우연성의 필연성”이 성립하게 된다. 이러한 절대자로서 ‘다르게 존재할 수 있음’은 메이야수에 의해 ‘카오스’라고 불린다. 이러한 카오스의 원리로서 ‘비이유율’을 메이야수는 ‘본사실성(Factualité)의 원리’라고 부른다. 이러한 ‘본사실성’의 원리는 ‘비이성éraison, 

이유 없음)’을 세계의 결함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긍정적인 원리로서 받아들인다. 우연은 단순한 결함이나 타락이 아니라는 것이다.”[3]


결국 메이야수에 따르면, 자연에서 유일하게 필연적인 것은 ‘우연’이다. 그는 이를 ‘우연성의 필연성’이라고 칭한다. 이 사실이 건축가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일까? 건축은 자연을 담는 그릇이다. 자연의 필연성, 즉 자연의 질서는 우연이다. 한편, 그릇은 그것에 담길 내용물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 컵에는 뜨거운 음료를 담을 수 없다. 그것보다도 우리는 건축 또한 애초에 자연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쩌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연, 그것이 건축의 유일한 질서다.


이런 맥락에서, 건축에 자연을 잘 담기 위한 고민은 곧 건축에 우연을 잘 담기 위한 고민이다. 또한 리모델링의 경우,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건물에 지금보다 더 많은 우연을 담을 수 있을까’가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다음을 지향해야 한다. 더 많은 마주침, 더 많은 즐거움, 더 많은 모임, 더 많은 자유.


         

[1] 퀑탱 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정지은 옮김 (도서출판b 2010), p. 88.


[2] 이는 모든 존재자의 절대적 필연성을 주장하는 충족이유율에 대한 비판이다. 즉, 우연성에 대한 긍정이다. 


[3] 김상범, <철학은 주사위 놀이다>, (하움출판사 2022), p. 9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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