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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경 Nov 24. 2023

아이유의 잔소리는 좋기만 하던데


 아이를 키우면서 낳기 전과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 바로 타인의 관심. 하루 종일 홀로 거리를 돌아다녀도 '도를 아십니까'로 접근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나의 안부를 묻지도, 신경쓰지도 않았다. 돌 지난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지나가던 어른들이 으레 한 마디씩 던졌다(이때는 시골에 살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대개의 경우 "아유, 귀여워라", "고놈 잘생겼다"와 같은 칭찬이었지만, 가끔은 조언 아닌 조언도 있었다. "애가 너무 춥겠어요, 그러면 안 돼" 아이를 꽁꽁 싸매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에게 아이가 신생아일 때부터 많이 듣던 말이다. 아이마다 체질이 달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이는 시원하게 키우라는 이야기를 전문가로부터 들었다. 특히 현승이는 몸에 열이 많아 조금만 두껍게 입혀도 덥다고 짜증을 냈다. 이를 알리 없는 낯선 이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을 들으면 길게 설명하기도, 웃으며 대답하기도 쉽지 않았다.


 낯선 이만 그런 것은 아니다. 잔소리는 대부분 가족들에게 더 많이 듣는다. "모유는 그래도 돌까지는 먹여야지", "어린이집을 너무 일찍 보내는 건 아니니, 기저귀는 떼고 보내야지" 모르는 사람은 그때뿐이니 무시하면 그만이다. 가족은 다르다. 책이나 의사에게 들어 그건 아니라는 대답은 상대를 어색하고 민망하게 만들 수 있고, 현승이를 위해서 한 말인데 서운해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말하지 않았다. 내 나름의 배려랄까. 그렇다고 그러겠노라는 껍데기 같은 대답을 하는 것도 어려웠다. 오랜 고민 끝에 나온 나의 결론은 침묵이었다. 동생, 남편, 어른 가리지 않고. 혹자는 버릇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더 좋은 해결 방법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넉살이 그리 좋은 편도 아니며,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기 때문에 아닌 척할 수도 없다.


 '나를 위해, 아이를 위해 해주는 말이니까'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불편한 마음이 점차 쌓여가니 이제는 곱게 들리지 않는다. '내 행동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나', '내가 뭘 하면 지적할 것만 보이는 건가' 새까만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와 머릿속을 잠식했다. 잔소리와 충고는 왜 하는 것일까? 유튜브 알고리즘이 유재석이 진행하는 '유퀴즈'의 몇 년 전 영상으로 안내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을 인터뷰한 내용이었다. 잔소리와 충고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유재석의 질문에 학생은 대답했다. "잔소리는 들으면 기분이 나쁘고요, 충고는 더 나빠요" 아이의 대답은 내 마음을 대변했다. 듣는 사람이 나쁘다고 느껴지는 잔소리가 과연 상대방을 배려한 말일까? 진심이 담긴 충고라고 해서 들어야 하는 걸까? 상대의 환경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본인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어떤가. 나를 향한 잔소리는 불편해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내 생각이 옳고 바른 것일까? 내가 느끼는 것을 다른 사람이라고 못 느끼겠는가. 내 말 역시 누군가에게 잔소리로 여겨질까 싶어 입을 다물게 된다. 요즘 들어 타인과의 대화가 부쩍 어렵다. 내 의견이나 감정은 묻어두고, 간단하게 대답하거나 듣기만 한다. 사정을 모르는 상대방은 경청의 자세로 대화에 임하고 있다고 여겼을게다. 속은 아니다. 대화 중 혹여나 내 말이 상대방의 기분을 망칠까 걱정스러워 입을 닫고, 말을 하고 난 후에는 괜찮은 말이었는지 한참을 되새긴다. 부담스러워진 대화는 사람들과 선을 긋게 만들었다.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으면서 '무슨 이유가 있겠지', '알아서 잘하겠지' 그저 넘기려고 했다. 다 널 위한 거라고 말하는 이야기는 그만하자. 마음만 상하게 할 뿐, 듣지 않을 뻔한 잔소리는 그만하자. 대화가 조심스러워졌다. 말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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