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식이타임 Sep 05. 2023

난 화장실 문을 열고 볼일을 본다

<고백부부> 속 장나라, 이 세상의 모든 마진주들에게

 “글쎄,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눈물이 나는 거야.”          


 총각시절, 상기된 얼굴로 드라마 이야기를 하던 직장 선배가 있었다. 드라마의 제목은 <고백부부>였다. 결혼을 후회하는 부부가 과거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린 드라마였다. 선배는 <고백부부>를 보고 온 다음 날이면 30분이 넘도록 소감을 이야기하곤 했다.


 늘 빠지지 않는 멘트는 배우 장나라가 연기하는 마진주의 일상이 본인이 겪었던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땐 어떻게 60분짜리 드라마의 대사를 일일이 기억할 수 있는지 기억력이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다. 한편으론, 매번 기나긴 <고백부부>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피곤이 몰려오기도 했다.          


 5년의 시간이 흘렀다. 육아를 전담하고 있는 나날 속 우연히 접한 <고백부부> 영상은 다르게 다가왔다. 독박육아를 하는 마진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이를 재우고 밥에 물을 말아먹는데 충분히 먹기도 전에 아이가 깬다. 배가 아파 화장실을 가면 문 밖에서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문을 열고 용변을 본다. 그런 마진주를 본 남편은 “왜 더럽게 문 열어놓고 똥을 싸냐”며 핀잔을 준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나간 거리에는 젊은 청춘들이 가득하다. 높은 하이힐을 신고 예쁜 치마를 입으며 봄을 만끽하고 있다. 마진주의 옷에는 무언가가 묻어있다. 아이에게 먹이던 이유식이다. 사람들은 깔끔하지 못한 옷차림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아빠가 된 내가 육아를 전담하며 살아가는 삶 역시 <고백부부>의 마진주와 다르지 않았다. 아들 태평이가 자는 시간을 이용해 끼니를 해결해야 했고, 낮잠을 안 자겠다고 보채는 날은 마음이 지옥 같았다. 문을 닫고 볼 일을 볼 수 없었다. 내가 잠시만 보이지 않아도 엉엉 울어댔기 때문이다. 한 번은 분유를 먹이다 배가 너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변기에 앉아 우유를 먹여야만 했다.

         

 태평이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밖에 나가자고 조른다. 전날 입고 잤던 흰색 반팔 티셔츠와 축구유니폼 반바지를 그대로 입고 나간다. 티셔츠엔 아이가 묻힌 바나나 혹은 고구마가 꼭 묻어있다. 운이 좋으면 말짱할 때도 있지만 머리는 주로 부스스한 편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나의 외모는 신경 쓸 여유 없이 밖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대학생처럼 말끔한 니트에 슬랙스를 입고 싶지만 점점 아이를 돌보기 편한 운동복을 찾게 된다. 건조기에 여러 번 돌려도 상관없고 밥풀이 묻어도 신경 쓰이지 않으니까. 그러다 오랜만에 잡힌 모임에 입고 나갈 마땅한 옷이 없을 때면 남몰래 한숨을 쉬곤 한다. 자연스레 <고백부부>를 본 소감을 토해내던 직장선배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젠 선배의 <고백부부> 리뷰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맞장구를 치며 “나도 그랬어요.”라고 해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오늘도 아들의 손을 잡고 놀이터에 나간다. 우리 동네 마진주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엄마 마진주들이 대부분이지만 할머니 마진주들도 있고 나 같은 아빠 마진주들도 있다. 말을 건네진 않지만 마음속으로 안부를 묻곤 한다. 끼니는 잘 챙겨 드셨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혹시 화장실 문을 열고 볼일을 봐야 했던 오늘 하루가 너무 힘들진 않았는지 하고 말이다.


사진출처 : <고백부부> 1화 중

매거진의 이전글 내겐 너무 소중한 육아동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