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타향서 만난 영혼의 친구들
내 친구 김목사, 최사모(목사 아내를 사모라 부르는 게 싫지만 익명성 때문에 이렇게 한다)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김목사네는 내가 한창 학교 일로 마음 고생하고 있을 때, 석사과정 신입생으로 아이들과 함께 미국에 들어왔다. 김목사와 최사모는 첫 학기를 보내느라 바쁠텐데 많은 다른 집을 초대해 집에서 식사대접을 하곤 했다. 가을이 되자 최사모는 김장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누가봐도 사람을 좋아하는 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온 신경이 종합시험 치르는데 집중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초대를 고사하곤 했다. 마음이 너무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석사과정생은 박사과정생과 달라서 서로 그렇게 친할 일도 없기는 했다. 그런데 계속 사람들 초대를 이어가는 그 집을 보면서 ‘참 희한한 집이네…’ 이런 생각이 들기는 했다. 다들 자기 먹고 사느라 바쁜 유학 사회인데 왜 굳이 에너지 들고 얻을 것 없는 일을 할까? 이런 삭막한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한인학생 사회는 묘해서, 서로 교단이 다르면 데면데면하고, 교단이 같아도 선후배를 따지느라 또 그렇고, 이래저래 목사님 아들딸들인 이들은 또 집안 평판에 신경쓰느라 말을 아끼고 꽁꽁 숨기곤 했다. 참 의뭉스러웠다. 사모들끼리 모임이 있었는데 거기 나갔다온 아내는 정말 이상한 모임이라고 했다. 아내는 ‘사모’로서 현모양처 같은 삶은 생각지도 않아본, 활달할 직장인이었기에, 다들 조신하게 말 아끼느라 대화가 뚝뚝 끊어지는 모임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겨울에 나는 끈 떨어진 두레박 신세가 되어 있었다. 박사과정 종합시험에서 최종 탈락. 나는 더욱 웅크러들었다.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고 가족기숙사 아파트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그러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전도사님~’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혹시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 오셔서 식사 하시는 게 어떠신가 연락드렸어요~’ 정중하게 식사초대를 했다. 직접 전화도 받았으니 가야했다.
시카고의 겨울밤은 일찍 시작되어서 우리가 식사하러 가는 길은 이미 어두컴컴한데 흰 눈이 펄펄 나려 무릎까지 빠지는 폭설이 내리던 때였다. 우리집에서 걸어서 오분 거리였다. 컴컴해진 거리를 걷는데 노오란 불빛으로 가득찬 그 집이 보였다.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서오세요 전도사님~ 사모님이랑 아기도, 추운데 어서들어오세요~’ 활짝 웃는 얼굴에 붙임성 좋은 목소리로 김목사와 최사모는 우리를 맞아들였다. 그 집 아이들도 공손하게 인사했다.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거실 한가운데에 커다란 식탁에 정성 가득한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무슨 동화 속에 나오는 뜻밖의 만찬 같았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환대에 깜짝 놀랐다. ‘아니 뭘 이렇게 많이… 차리셨어요? 아이구 참…’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는 여기까지 흘러온 서로의 삶에 대해 이런 저런 질문을 하며 자연스럽게 알아갔다. 그 집이나 우리집이나 말하다보니 그동안의 삶이 구절양장 같았다. 서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옮겨갈 때, 김목사는 말했다. ‘저희가 전도사님과 사모님을 초대한 것은요, 저희가 듣기로… 박사과정 시험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고 들었을 때, 저희도 너무 아쉬웠거든요. 그러면서 얼마나 힘들게 계실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용기 내서 연락드려본 거에요. 저희가 힘내시라고 해드릴 건 이렇게 밥 한끼 같이 먹는 게 다니까요…’
창밖에는 눈이 훨훨, 창틀에도 소복하게 쌓이고 있었고 집안은 보일러가 돌아가 아주 따뜻했다.
시카고의 우울한 긴 겨울에 웅크러들었던 마음이, 쭈글쭈글했는데, 조금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그동안은 정 없는 목사들 사이에서 그렇게 외로워했는데, 박사를 망하고 나니 이런 초대를 받게 되었다. 세상에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구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헤어지고 나서 각자 집에서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저 집 괜찮은 사람들인 거 같아, 그치?’ 우리 두 집 사이에 삶의 여정이 겹치거나 중간에 한다리라도 건너 아는 집도 없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우리는 둘 다 ‘성직자입네 하는 자의식’이 없었고 교회와 사회의 부조리를 직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누군가 마음을 열고 터올때, 똑같이 마음을 트고 신뢰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 집은 숱하게 사람을 초대해서 이야기해봤지만 우리처럼 반응한 집이 거의 없었단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그 뒤로 몇 번 더, 양쪽 집을 오가며 같이 밥을 먹고 맛난 게 있으면 꼭 불러 나눠 먹었다. 융숭한 일이었다.
그러다 우리집은 또 이사를 했고 그 폭설이 내리던 날에, 김목사는 3층을 계단으로 내려가 2층을 다시 오르는 ‘손 이사’를 하루 종일 도와주었다. 우리집 아기는 그동안 최사모네 가 있었다.
그런데 이사한지 두달여 만에, 아내가 애틀랜타에 직장을 구하게 되어 떠나야하게 되었다. 만나자마자 이별이라니.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웠다.
내게는, 차로 쉬지 않고 12시간을 달려야 가는 애틀랜타까지의 ‘타주 손 이사’라는 대과제가 던져졌다. 아기 때문에 이미 집을 한 번 옮겼고 그때 김목사에게 큰 덕을 입은터였다. 미국에서 남의 집 이사 도와주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매우 귀찮기도 하고 때론 위험하기도 한 일이다. 나는 혼자서 빌린 트럭에 짐 싣고 한 2박 3일 내내 달려 애틀랜타로 가야겠다고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두달 전에 우리 이사를 도왔던 김목사가 자기랑 함께 가자고 했다.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아니 그 먼거리를 어떻게 형님 혼자 운전해서 가실라고 그래~ 위험해서 안 돼~ 말이 돼?’ 부부가 이구동성으로 말리고 나섰다. 이런 일에는 보통 아내분 눈치를 보게 되는데 최사모는 듬직한 남편 등을 팡 치면서, ‘여보가 다녀와. 12시간 운전 나눠하면 되지. 다녀와’하고 말았다.
우리 두 집 간에는 다른 점도 있었다. 우리는 최근래 몇 가지 일 빼면 인생을 대체로 순조롭게 살아온 반면, 그 집은 나이에 비해 겪은 일이 너무도 많아 세상 경험에 잔뼈가 굵은 스타일이었다. 그러니 그가 보기에 인생 곱게만 살아온 내가 그간 혼자 이사를 다 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이젠 트럭 몰고 타주 이사 간다니 도저히 안될 말이었나보다. 일을 진행하다보니 처음 해보는 일이 많았다. 특히나 트럭 뒤에 SUV인 우리차를 달고 가게 되어 일이 더 복잡했다. 출발 하루 전날 지점에 가서 트럭을 받아 집에 와서 우리차를 연결했는데 웬걸. 그걸 평행주차를 해둬야 하는데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것이다. 김목사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면서도 다른 차들도 오가는 길을 막고 몇 번 이리 저리 돌리더니 깔끔하게 평행주차를 해냈다! 세상에 할렐루야다. 내가 했으면 당황해서 다른 집 차 여럿 긁어먹었을 일이었다.
다음날이 되어 출발하는데, 아직은 서로 조금 서먹함이 남아있던 터라, 12시간을 어떻게 같이 가나 싶었다. 사실 시간이 지나 보니 트럭 소음이 심해서 서로 길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럭저럭 이야기하면서 갔다. ‘저도 형이랑 어떻게 열두시간 보내나 했는데 이렇게 해서 또 친해지고 좋죠?’ 그런다. 무엇보다도 그는, 내가 거듭된 이사로 무리한 걸 알고, 거의 12시간을 내내 운전을 다 해주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마음 불편할까봐 연신 ‘아 이 트럭 자리가 좋네’하며 사람 좋게 허허 웃으며 갔다. 그리고 애틀랜타에 도착해서 아파트 계약을 마치고 이번에는 짐꾼들 불러 3층까지 짐을 다 올리고 나서 밤이 늦어서야 일이 끝났다. 그리고 그는 그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내가 먼저 쿨쿨 코 골며 깊은 잠에 빠졌는데, 그가 새벽에 혼자 일어나 씻다보니 찬물이 나오더란다. 비누도 없었단다. 그래서 그는 자는 날 깨울까봐, 얼결에 냉수로 목욕재계를 하고 비행기를 타고 휙 가버렸다. (욕먹을까봐 이야기하지만 중간에 1박 따로 자는 것과 비행기는 의당 우리가 냈다)
그 해 여름이 되었을 때, 김목사와 최사모는 아이들과 함께 또다시 열두 시간 길을 운전해서, 우리집이 궁금하다며 와서 며칠 잘 놀다 갔다. 아이들은 아파트 야외수영장에서 신나게 놀았다. 우리는 낮이고 밤이고 맛난 걸 사다먹고 만들어 먹고 하면서 수련회 온거 마냥 밤늦게까지 까르르 웃고 수다 떨면서 놀았다.
그 기억이 서로 너무 좋았었다. 우리 어쩌다 이제 만난 거냐며 아쉬워했다. 그래서 그 다음 해에는 내가 산후우울증으로 애틀랜타에서 혼자 아이랑 어쩌지도 못하고 있을 때, 자기네 집에 와서 한 달 푹 쉬다 가라 했다. 나는 또 염치불구하고 그렇게 아이에게 첫 비행을 선사하고 그의 새 목사관 손님방에서 한 달을 잘 지냈다. 중간에는 아내도 휴가 내서 와서 또 일주일 우리끼리 먹부림 수련회를 하면서 서로 너무 웃기다며 거실바닥을 뒹굴었다.
우리 각자에게 모두 힘든 시간,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시간이었는데, 우리는 그 시간을 서로 집을 오가고 서로 돕고 까불면서 우리만의 영광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만난 우리였다.
내가 가장 힘들 때 그들이 측은지심을 가지고 다가왔고, 그들도 힘들 때에 우리와 함께 하면서, 눈물로 ‘동고동락’했다. 내가 만약 그렇게 힘들지 않았더면? 이런 오고가는 일까지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인생에서 죽으란 법은 없다. 오로지 나쁘기만 한 일도 없다. 우리의 우정이 십년이 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우정은 십년은 족히 넘은 거 같다. 지금은 서로 비록 다른 나라에 살고 있지만, 마음만은 동고동락하며 살고 있다. 박사에 떨어져서 김목사와 최사모를 만났다. 그러니 박사 떨어진 것은 참 좋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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