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내 소셜미디어 피드에 뜨던 광고 중에 '아트팩토리 참기름 강화'라는 곳이 있었다. 짧은 동영상들을 보니 아이들이 미디어 아트 속에서 폴짝폴짝 뛰며 신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이 부모에게는 '아, 아이들이 뭔가 신나게 놀 수 있는 곳이구나! 예술 체험도 하고!'하는 생각이 절로 나게 하는 광고였다.
이 미술관은 7개 구역으로 만들어진 체험형 미디어아트 전시동, 반고흐 미디어아트 감상관, 특별전관, 아이들이 체험활동을 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상대로, 혹은 후기대로, 아이는 신나게 뛰어다니거나 무서워했다. 부모는 아이에게 끌려 다니고 사진찍기 바빴다.
두번째 건물은 통째로 반고흐 미디어아트를 상영했다. 그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낭독을 통해 보여주었다.
안 그래도 강렬한 반고흐의 그림들이 커다란 세 면의 벽면을 가득채우고도 모자라 천장까지 뒤덮으니 그 체험상의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반고흐의 작품세계에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 색채와 붓칠 속으로 풍덩 빠져드는 느낌.
반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평생 6백통이 넘는 편지를 썼고, 그 내용에는 반복적으로 '돈을 보내달라'는, 예술가의 시름이 담긴 서글픈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낭독은 그의 천오백여 작품중 팔린 작품은 단 하나였다고 말한다.
얼마나 외롭고 고독했을까.
얼마나 고되고 괴로웠을까.
지금이야 이 값비싼 입장료(18,000원)를 내고서라도 이 전시관의 주된 체험인 반고흐 미디어아트를 기꺼이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든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밤낮으로 식사하는 시간까지도 아껴가며 불타오르는 예술혼에 쫓기며 살았던 반고흐는 살아서는 영 빛을 보지 못하고 37세의 나이로 불행하게 죽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작품이 단 하나만 팔릴 수가 있나.
그때 당시에는 '이발소 그림' 수준을 넘지 못하는 평가를 받았다는 말이 아닌가. 그 당시는 앵그르 같은 신고전주의 화가가 사람들의 허영을 채워주는 '보암직한' 그림이 잘 나가던 때였다. 그러니 그 고상한 내용과 색채에 비해 색채가 쨍한 반고흐의 그림들은 유치원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 했을 것이다.
얼마나 이상하고 흉하게 보였을까.
아니,
왜 그 당시 사람들은 반고흐 그림에 담긴 고독과 절망, 타오르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을까.
그러니 '미감'이라는 게 시대상을 반영하고 시대따라 변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은 반고흐가 각광받는, 설득력있고 공감가는 작품이라는 평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생각해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가난하고 고독한 예술가들은 어두컴컴하고 추운 작업실에서 재료값 고민을 해가며 크고 작은 작품들을 그리고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 아닌가.
어떤 것은 실력이나 고민이 덜 된 작품일 것이고, 어떤 것은 기교는 뛰어나나 내용이 별것 없는 '상품'일 것이고, 극히 일부의 것만이, 인간 영혼의 밑바닥으로부터 솟아오른 '명작'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명작들은 잠깐 전시되었다가 창고속의 영원한 어둠 속에 갇힐 수도 있는 것이다. 명민하고 시대정신이 뛰어난 감상자들을 피해서 말이다.
나이가 들다보니, 이젠 저런 전시를 보고 나서도 '장사속'을 치열하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검색을 하며 파악하게 된다. 평점을 확인해보고 내 경험을 견주느라 바쁘다.
그렇다면 참된 예술 체험은 어디로 갔는가. 나의 내면을 발가벗겨 무의식의 세계로까지 안내하거나 격파해버리는 그 힘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온전히 감상해볼만한 경험이었는가.
미디어 아트의 한계인가 아니면 장사속이 주는 한계인가.
아무래도 미디어아트 7개의 방과 반고흐 미디어아트로만 이루어진 이 전시의 한계라는 생각이 든다. 전자는 큰 경험이랄 게 없었고, 후자는 지나치게 오로지 '킬러 콘텐츠' 그것 하나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예술 작품 자체 뿐 아니라, 그것을 전시하는 의도와 공간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체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