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아이들
술에 잔뜩 취해 졸면서 RER B를 타고 파리에서 집을 돌아가는 길이었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팟캐스트를 듣고 싶어 졌고, 처음으로 이슬아 작가님의 이스라디오를 듣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흥미로운 제목이었던 "열여덟 어른"을 무심코 눌렀다. 어른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린. 아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애매한 나이 열여덟. 이 소재가 그냥 궁금해졌다.
이야기는 보호종료아동들의 이야기였다. 18세가 되면 보육원에서는 아이들을 사회로 내보낸다. 이 아이들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방을 구해야 하고, 직장을 잡고 살아나가야 한다.
아이들은 시선과도 마주하고 아파한다. 서류 작업들을 하다 보면 가족관계 작성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 나라에서 다반사이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서로 부모님에 대해 묻는 풍조가 만연하다.
"고아"
외로운 아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용어로써 이미 그들의 정체성을 단정 지어버리는 게 아닐까.
보호종료아동의 입장이셨던 "신선"님께서 하시던 말씀 중에 공감되는 문장들이 있었다.
자신들의 스토리를 들으면 무조건 불쌍하게만 본다는 내용.
"동정"은 상처받은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주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없다고 욕을 하는 행위보다 무조건적인 "동정" 섞인 눈빛과 언행이 그들에게 더 큰 상처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개인적으로도 어린 시절 나는 "동정"의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싫었다.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 그저 자기만족을 위한 공감. 가슴을 후볐다.
난 18살에 무엇을 했고, 첫 자취방 이사는 어떻게 했으며, 가스비, 전기세, 요리 등등 정말 기본적인 것들을 어떻게 배워나갔는지 떠올려보았다. 어찌 보면 나한테는 이 모든 게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것이 생겼을 때,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전기세를 혼자 내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는 스토리를 들었다. 그 사소한 것에서 몰려드는 두려움이 연상되었다.
제도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우리는 보호종료아동들을 품는 것에 미흡한 점이 많다.
우리는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그들을 같은 눈높이에서 존중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