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렸다고 볼 수 없는 거리이지만
어제 저녁밥을 거르고 잠에 들어 배고파서 새벽 3시에 잠에서 깼다. 요즘 읽고 있는 한강 작가님 책을 읽다가 다시 4시에 잠들어 6시에 눈을 떴다. 창문을 보니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캄캄한 밤 같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어두운 새벽 동네를 달리고 싶어졌다.
달리기에 대한 로망이 있다. 좋아하는 임경선 작가님이 종종 SNS에 3~4km 달리기 인증 사진을 올린다. 코로나 이후 헬스장과 같은 실내에서 운동할 수 없게 되자 답답하여 바깥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코로나가 몇 달 안에 끝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길어져 그녀의 달리기도 지금까지 이어졌다.
달리기에 대한 로망도 있지만 두려움도 있었다. 초등학생 때 장거리 달리기를 하면 얼굴이 벌게져서 도착지점에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반 친구들이 내게 홍당무라고 놀려댔다. 벌게진 얼굴이 더 시뻘게졌다. 단거리 달리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거리 달리기는 얼굴이 벌게지기 전에 끝났지만 체형이 상체보다 하체에 무게가 쏠려 빠르게 달리는 재주가 없었다. 체육 시간 중에 기록을 재어 달리기가 포함된 모든 운동을 싫어했다. 예를 들면 단/장거리 달리기, 뜀틀, 멀리뛰기 등 도움닫기에 달리기가 들어가는 건 성적이 좋지 않았다. 달리기는 나를 소심하게 만들었다.
난 되지 않는 건 포기하는 편이고 되는 쪽을 더 열심히 하는 것 같다. 당시에 달리기는 못하지만 잘하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유연성이었다. 몸을 젖히거나 숙이거나 등 유연성이 들어가는 체조 같은 건 잘하였다. 체력장에서 앉아서 다리를 펴서 팔, 등, 허리를 앞으로 숙여 기록을 재는 게 있었다. 당시 내 별명은 홍당무임과 동시에 '인간 폴더'였다(당시 폴더폰이 유행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몸을 숙이고 나서도 얼굴이 벌게졌다. 그래도 그것만큼은 자신 있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유연성을 인정받았다. 그때부터 알았던 것 같다. 사람이 다 잘할 수는 없고 하나만 잘해도 되는구나.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걸 느끼고 있다. 허리 라인이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고 옷을 입어도 옷맵시가 살지 않았다. 걷는 걸 좋아하는데 아주 많이 걸은 날은 왼쪽 무릎이 아프기까지 하였다. 벌써부터 이러면 40대, 50대는 어쩌지, 덜컥 겁이 났다. 이럴 때면 꼭 나보다 나이 많으면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게 된다.
최근 20만 부 기념 완결판으로 나온 임경선 작가님의 책 <태도에 관하여>에서 어제 달리기에 관한 부분을 읽었다. 그녀가 왜 달리기를 시작했는지, 지금 삶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차지하고 있는지 등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지만 조금씩 삶에 일부가 되었다는 그녀의 달리기 이야기에 나도 그녀처럼 달리고 싶어졌다.
물세수를 간단히 하고 운동복 바지와 반팔티로 갈아입은 다음 바람막이를 걸쳤다. 헝클어진 머리를 빗질하고 검정 머리끈으로 질끈 묶었다. 초췌한 얼굴을 가리고자 모자를 눌러썼다. 쌀쌀할 것 같아 바람막이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려 잠갔다. 운동화를 신고 바깥으로 나갔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도착해서 문을 열자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추웠다. 나는 바로 뛰기 시작했다. 오늘의 목표는 1km를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다.
동트기 직전이라 그런지 막 어둑하진 않았다. 토요일이라 사람이 아예 없을 줄 알았는데 이미 아파트 광장에는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혼자 어두운 새벽을 달리는 걸 상상하였는데 세상에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다니. 멀리서 달려오는 그들을 보며 혼자 달리는 게 살짝 민망하였다. 나만의 길을 가련다는 마음으로 그들을 지나쳤다. 나는 직진으로만 달렸다. 같은 공간을 돌고 도는 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 같아 앞만 보고 내달렸다.
500m일 때부터 숨이 차기 시작했다. 속도를 줄여 천천히 달렸다. 누가 보면 빨리 걷기 수준일 테지만 내 뇌에게 달리고 있다고 주입시켰다. 반 달렸으니, 반만 더 달리면 되었다. 다시 워치를 보니 700m였다. 또다시 워치를 보니 850m였다. 그래 이제 150m만 달리면 된다. 지금 멈추면 오늘의 계획이 무산이다. 곧 워치에서 진동이 울렸다. 1km가 되었다는 알림이었다. 조금 더 달릴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 있었다. 그래도 무리하지 않기로 한다. 어차피 자주 달리는 게 중요하지 거리가 중요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집으로 왔던 길을 걸어 돌아오면서 달렸다는 성취감 때문인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이폰 피트니스 앱을 켜니 첫 달리기 운동을 했다고 배지까지 주었다. 홍당무라고 놀림당하는 것보다 배지가 낫지 싶다. 이렇게 나의 짧지만 소중한 달리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