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런 성인이 된 이유
터널? 무슨 터널? 영화의 내용처럼 터널이 무너져 갇혔다가 살아남은 이야기려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터널에 갇힌 이야기는 맞지만, 구조물 터널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앞으로 말하는 터널은 하나의 단어로 정의할 수 없다. 누군가에겐 상실, 누군가에겐 절망 혹은 외로움, 우울, 슬럼프, 암흑기 등 터널은 세상 사람들에게 각각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미 경험했거나 경험 중이지만 각자 다른 단어로 불리고 있는 그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글은 지극히 사적인 관점에서 쓰여지는 기록이 될 것 같다. 말 그대로 생존기다. 내가 지나온 터널, 지금 들어와 있는 터널에 대한 생존기다. 나는 지금 완전히 살아남아 회고록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어떤 터널에 갇혀 현재진행형으로 기록을 남기는 중이다. 지금 나처럼 혼자 터널을 헤매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우연히 내 글을 읽는다면, 같은 땅 어딘가에서 모양은 다르지만 나 또한 다른 터널을 헤매는 중이라고, 나를 보며 잠깐 안도의 한숨을 돌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내 선택에 늘 확신을 가지고 살던 아이였다. 모든 것이 명확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원하는 것과 거부하는 것,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늘 솔직하게 드러나는 아이였다. 숨겨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꽤 어린 나이부터 내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미친 듯이 파고드는 집요함을 가지고 있었고, 웬만한 것에는 꺾일 줄 모르던 혈기 가득 완강한 아이였다. 나는 나의 이런 성향이 날 외롭게 만들 거라는 것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아무도 나에게 경고해 주지 않았다. 딱 한 사람, 아직 고등학생인 날 보고 ‘독한 년’이라고 말했던 선생님이 있었다. 그땐 ‘어쩌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그 말이 어쩌면 나를 관통하는 말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금에서야 한다.
우리 부모님은 왜인지, 나에게 항상 세상 사람들 모두가 Yes를 말해도 네가 No라고 생각하면 No라고 말하라고, 그렇게 가르치셨다. 앞서 말한 내 성향에 이 가르침까지 더해져 나는 그런 스무살이 되었다. 겉으로는 친구들과 얼추 비슷해 보이게 만들던 교복을 벗고 진짜 내 모양을 세상에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얼떨결에 성인이 된 내가 처음 만난 사람들은 내가 기대한 것과 너무 달랐다.
사람들은 혼자 No라고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가감 없이 드러내는 사람도 좋아하지 않았다. 하고자 하는 것을 혼자 집요하게 하는 사람도 좋아하지 않았다. 모두가 기죽을 때 혼자 고개를 빳빳이 드는 사람도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그 사람들이 이 글을 본다면 ‘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어. 얘는 아직도 모르네.’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그 부분에 대해 염두에 두고 있고 내가 너무 날 것이었음도, 그로 인한 미숙함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을 수도 있을 거란 가능성도, 인정한다. 내가 지금 이야기 하는 것은 고작 스무살의 내가 할 수 있던 생각의 전부를 말하는 것뿐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집단 안에서 애매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더 선호했으며 무엇보다 집단의 입장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만 좋아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단체 생활에서 그런 사람을 선호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고, 너무나 이해가 되며, 어쩌면 나 또한 그런 사람들을 더 편하게 생각한 적이 있지 않았나 싶다.)
내가 성인이 되어 처음 만난 선생님은 그런 나를 보고 ‘못된 마음’을 가졌다고 했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혼자 타지 생활을 하던 나는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내가 정말 이상한지, 내가 정말 못됐는지. 그 당시 우리 가족에게는 무거운 사정이 있어서 고작 이런 내 혼란을 징징댈 형편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창 성숙 중이던 이십 대 초반, 정신적으로도 의지할 곳이 없던 나는 스스로, 생겨먹길 못되게 생겨먹었다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사람들과 조금 다른 뾰족뾰족한 내 모양을 뼈를 깎는 고통을 삼키며 혼자 갈아냈다. 내 이십 대 초반은 고통 그 자체였다.
영화 <겨울왕국>에서 엘사가 스스로에게 Conceal, don’t feel, don’t let them know라고 하는 걸 보고 나는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줄 알았다. 안타깝게도 나는 엘사처럼 Let it go 하지 못했다. 내가 그때 그 영화를 보고 조금만 더 교훈을 일찍 깨우쳤다면 지금의 난 달랐을까?
그때 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볼 여력이 없어서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딜 지나오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모든 것이 어린 나에겐 너무 가혹하고 외로웠다. 그나마 내가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곳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열리는, 손바닥만 한 창문을 가진 작은 고시텔, 한명도 간신히 눕는 작은 침대 하나. 그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도 못 내고 참 많이도 울었다. 그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바다 한가운데를 표류하는 작은 배에 누워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침대와 내가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느낌을 그 몇 년 동안 느낄 수가 없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그렇게 난 터널을 하나 지나왔다. 그 터널은 세 개의 출구가 있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저 나답게 살아가는 출구, 나를 인정하되 사회적 페르소나를 잘 사용하는 출구, 나를 지우고 다른 사람이 되는 출구. 방법을 잘 모르고 이미 너무 지쳤던 나는, 가장 먼저 보이는 세 번째 출구로 나왔다. 그 출구 밖에서는 내가 사회에서 만난, 혹은 앞으로 만날 사람들이 웃으며 반겨줬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 우리 가족, 내 제일 친한 친구들, 나를 사랑하는 이는 없었다. 아마 다른 출구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이걸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선택을 날 오래도록 괴롭혔다.
그 터널은 맹수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지는 곳이었다. 내가 조금만 소리 내면 어딘가에서 튀어나와 나를 물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한발 한발 조용히, 조심히 내디뎌야 했다. 간헐적으로 보이는 깜빡깜빡 희미하고 으스스한 조명은 나를 세 번째 출구로 계속해서 이끌었다. 나는 그런 것도 빛이라고, 그 길을 따라갔다. 가끔 터널에서 보이는 일정하지도, 깨끗하지도, 선명하지도 않은 조명 따위에는 현혹되지 않는 것이 좋다. 빛을 가장한 가짜 조명은 비실비실 굶은 사람을 용케도 알아보고 살살 꼬드긴다. 오랜 시간 여러 터널을 떠돌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된 팁이다. 그런 조명이 이끄는 출구는 항상 결과가 좋지 않았다. 나가봐야 먼지 가득 시커먼 하늘과 풀 하나 나지 않는 쩍쩍 갈라진 메마른 땅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터널에서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출구로 나가느냐도 상당히 중요하다. 기껏 터널을 나와 그 길을 걷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다. 어떤 길은 차라리 터널이 나았다는 생각이 드는 길도 있다. 내가 선택한 세 번째 출구로 나와 걸어야 했던 길은 춥고 외롭고 배고픈 길이었다.
이십 대 초반, 모든 것이 새롭고, 작은 것에 들뜨고, 무대포로 덤벼들 나이에 나는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이 터널의 공포는 10년이 넘도록 잊혀지지 않았고 마음 어딘가 깊은 곳에 칼로 새겨졌다.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흉터로 남았다. 행여 그 비슷한 모양의 날카로운 무언가만 봐도 또 베일까 벌벌 떠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터널에서 나온 뒤 이어진 고된 길 때문에 제때 치유 받지 못한 거 같다. 이제야 그 흉터를 들여다보고 얼마나 아팠을까 만져본다. 아직도 상처가 애린다. 매번 그때의 고통을 회상하며 흉터를 마주하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지만 이제는 가끔 열어보며 연고를 발라준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과정을 지켜보던 친구들이 가끔 나 대신 들러 연고를 발라주고 간다.
사실 아직도 어느 때에 눈을 감았다 뜨면 그 길 위에 덩그러니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아직도 그 길이 끝나지 않은 것만 같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눈에 익어서 조금이나마 가볍게 걷는다. 힘이 닿는 날에는 그 길에서 벗어날 방법도 여러 가지 시도해 본다. 길이든 터널이든 내가 한번 걸은 그 땅은 내 삶의 역사가 되어 지워지지 않는다. 언제든지 다시 그때의 길에 놓여질 때도, 같은 모양의 터널을 만날 때도 있다. 그래도 다행인 건 한번 가본 곳이라 상황 파악을 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처음보다 조금은 수월해진다는 거다. 사실 어느 지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내 내공이 어떻게, 얼마나 쌓이는지 자각하지 못하지만, 언젠가 분명히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예를 들면 내가 상상할 수 없던, 더 크고 깊은 터널을 만났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