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호두 팥빵과 데운 우유

by 이하늘 Mar 22. 2025
아래로

한가한 토요일이라, 모처럼 다른 동네에 놀러 가고 싶어졌다.

수원역과 AK플라자를 휘적휘적.

넘치는 사람들, 좁은 공간, 떨어져 가는 체력…

그나마 넓은 편인 롯데몰로 대피하니 숨통은 트였지만, 체력은 바닥이었다.

잠시 앉아서 간단히 열량을 채울만한 걸 먹고 싶은데,

역시 너무 비싸…

식사는 무리라고 생각하고, 카페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발견한 어느 팥 전문 카페.

수많은 맛의 크림팥빵을 뒤로하고, 견과 팥빵 하나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주문해 자리에 앉으니, 곧 진동벨이 울렸다.

너무 달지 않은 팥빵을 잘라 한 입, 포근하게 스팀 된 우유를 한 모금.

데워서 더더욱 고소해진 우유가 팥과 호두와 어우러져 입안을 데운다.

아, 이 가게 주인은 참 센스가 좋아. 따뜻한 우유를 팔다니, 라고 생각하며 또 한 모금.

그렇게 좀 살만해지니, 가만히 앉아 잡다한 생각을 하고 싶어진다.


어디든 사람 많고 건물 높은 곳은 내 기운을 가져가는구나.

강남역, 수원역, 홍대입구역,

방콕 시암파라곤,

멜버른 플린더스 역 앞…

음, 플린더스 역 앞은 앞서 말한 곳들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긴 하지…


한국에 돌아온 지 어느덧 두 달 가까이.

나도 모르게 종종 브리즈번과 한국의 여유를 비교하곤 한다.

다들 우측통행하던 모습, 서두르더라도 개인 공간을 존중하려던 모습.

좋았던 일들만 떠오르는 걸 보면 제법 웃긴다. 분명 그닥이었던 일들도 많았을 텐데.

기억은 참 우습게도 과거의 모든 순간을 곱게 닦아준다.


어쩌면 안 좋았던 기억은 쉽게 닳고 물러져서

그 형태가 온전하게 유지되지 못하나 보다.

누군가는 이상하게 물러진 기억을 보며 역시 그날은 최악이었다고 말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무슨 기억인지 모르겠으니 역시 별일 아니었나보다, 라고 말하곤 한다.


아니, 어쩌면 모든 기억은 쉽게 닳고 물러지는데

사랑하는 기억은 항상 조심스레 꺼내고, 보듬고 아껴줘서 계속 곱게 남아있고,

미워하는 기억은 싫어하면서도 계속 꺼내보며 거칠게 다루어 더 망가지는 것 같네.


차라리 조용히 닳도록 내버려 두어야지.

사랑은 계속 보듬어 주어야지.

우유가 식기 전에 다시 한 모금하며

내 속을 달래주어야지.




작가의 이전글 interview with P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