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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박우유 Mar 16. 2021

[에세이- 비혼잡설] 애매한 연하의 애매한 대시

 J를 처음 만난 건 벚꽃이 흩날리는 4월 어느 봄날이었다.

  바이어 의전 업무를 위해 만난 J는 누가 봐도 쾌남아였다. 180cm가 넘는 키에 어깨가 넓어 누구보다 테스토스테론 분비가 왕성할 것으로 추측되는 그는, 나보다 3살 어렸지만 남성으로서의 매력이 넘쳐흘렀다.


 유창한 외국어 실력에 뽀얀 피부, 그리고 알 수 없이 빛나는 비밀스러운 눈빛. 무엇보다 그를 돋보이게 만든 건 이선균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동굴 저음’이었는데 낮고 굵은 목소리로 외국어를 하는 모습이 그렇게 섹시해 보일 수 없었다. 멀끔한 외모와는 달리 머슴처럼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반전 매력까지 겸비한 그가 가끔 밖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면서 촉촉이 젖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나도 모르게 그를 넋 놓고 바라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연상연하가 흔치 않아 엉큼한 마음을 품은 나 스스로를 엄하게 단속하며(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었음) 냉정한 마음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J에 대한 옅은 호감을 숨긴 채, 나는 그를 철저히 업무적으로만 대했고 1주일간의 업무는 실질적인 수확 없이 종료되는 듯했다. 그러던 중,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나를 흔들어 깨우며 그가 무심하게 툭 던지듯 말을 걸었다.


  “수박 우유 씨, 휴대폰 좀 줘봐요”


  음? 이미 전화번호는 아는데 왜 달라고 하지? 의아해하며 건넨 내 휴대폰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더니 나에게 건네주면서 “페이스북 친구 맺었어요. 나중에 맥주나 한 잔 해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속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군’ 하며 뛸 듯이 기뻤지만 당시 나는 그에게 프로페셔널하고 도도한 커리어 우먼으로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알겠다’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하고선 작별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저녁, 그의 페이스북을 처음부터 끝까지 뒤져보면서 J에 대해 하나둘씩 파악하기 시작했다.


  SNS로 추측해 본 그의 생활은 한류 스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스케줄로 채워져 있었다. 특히 주말에는 이태원이며 압구정이며 온갖 핫 플레이스를 종횡무진하며 찍은 사진을 J 특유의 무심 시크한 코멘트와 함께 (절대 1줄을 넘지 않음) 페이스북에 올리면, 좋아요가 100개는 기본으로 달려있었다.


그중에 내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여성들이 노골적인 관심을 보이며 쓴 댓글들이었다.


J 역시 여성들의 관심이 싫진 않았던지 은근하고 끈적끈적한 그녀들의 댓글에 ‘재치 있는 능구렁이’처럼 대댓글을 달아주며 인기 관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SNS 놀이를 보며 나는 절대 ‘저 여자들처럼 가볍게 행동하지 않겠노라’ 다짐을 하며 J의 게시물에 간헐적으로 좋아요를 눌렀지만 한 편으론 그 여자들의 페이스북을 몽땅 찾아들어가서 J와 어떤 관계인지, J도 그 여자의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는지를 꼼꼼히 모니터링 (이라고 쓰고 스토킹이라고 읽는다)하기 시작했다.  


  내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동안 J는 내가 SNS에 올린 글과 사진에 꼬박꼬박 반응했다. 그가 댓글을 달아준 날엔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기분이 마구 좋았다가 그의 댓글이 없을 땐, 회사에서도 예민해지고 짜증을 부리는 등, 감정의 널뛰기가 나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연락을 하지 않고 그가 말했던 ‘맥주 약속’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소 찝찝하긴 했지만 그건 그가 의외로 연애에 ‘숙맥’ 이기 때문일 것이라며 나 혼자 J이 대한 상상 속의 이미지를 가공한 채 연락이 오지 않는 상황을 합리화했다. 또 앞뒤 맥락 없이 유리한 정황과 J가 sns 댓글에

남긴 이모티콘 하나하나를 친구들과 해석해가며 ‘J도 나에게 관심 있는 게 틀림없다’는 근거 없는 확신을 키워갔다.


  이렇게 결정적인 한 방 없이 두 달간 밋밋한 연락을 하고 있던 중 , 회사로부터 타 지역에 4년간 근무하라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그 당시 가장 먼저 머릿속에 스친 것이 ‘이제 다른 곳으로 가면 J랑 만나기 더 힘들어지겠구나’하는 아쉬움이었다. 그가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서울을 뜬다는 글을 SNS에 올려놓고 댓글을 기다리는데 ‘띠링’하고 페이스북 알림이 울렸다. J가 댓글을 달았다는 알림이었다.


  ‘그동안 수고했어요. 잘 가요! ^^’


  뭐야, 이게 끝이야? 아니, 가기 전에 저녁이나 한 끼 하자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이 자식 이거 뭐지? 원래 밀당을 못하는 스타일이라 연애에 서툰 데다 나에겐 시간도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에 휴대폰을 집어 들고 J에게 가기 전에 맥주 한 잔 하자는 카톡을 보냈다. 한참 후 그에게 온 답변. ‘저랑요? 왜요?’


  J의 답장을 받고 누군가에게 세게 한 대 맞은 듯이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니 그 간 네 놈이 내 글과 사진에 미친 듯이 누른 ‘좋아요’는 무엇이고, 간질간질한 댓글은 다 무슨 의미였던 거지? 분명 여우 같은 여자들은 이 순간에 침착함을 유지하며 쿨하게 당신도 잘 지내라고 응수하거나, 지방에는 친구가 없어서 맥주를 마시기 힘들 것이라며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밀당 바보에 크리스털 유리병처럼 속이 투명한 나란 여자, 당황한 나머지 그 간 혼자서 쌓아온 감정을 폭발하며 기나긴 카톡을 보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출장을 마치고 맥주를 마시자고 했는데 그 간 연락이 없었던 점, 페이스북으로는 연락하면서 개인적인 연락은 없었던 일 등등.


  나의 장문 카톡에 J는 ‘미안해요 ㅠㅠ’라고 짧게 답했다. 미안하다는 짧은 사과와 어울리지 않는, 장난 같은 이모티콘을 보는 순간 그동안 꾹꾹 참아왔던 분노를 그를 향해 토해내기 시작했다. 당황한 J는 그 후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우리의 ‘썸인 듯 썸 아닌 썸 같은 관계’는 머쓱하게 끝나고 말았다. 연애에 서툰 사람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혼자 생각하고 혼자 화를 내다가 혼자 헤어진다’라는 것인데, 문어발식 썸 타기를 일상처럼 하고 있던 J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미친년처럼 감정을 쏟아내는 나의 행동이 매우 ‘연애 아마추어’처럼 비추어졌을 것이다.


  5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는 성인(聖人) 베드로를 능가하는 ‘사람 낚는 어부’ 신공을 펼치며 여러 명의 여성들을 가두리질 하기를 즐기는, 평범한 20대 매력남에 불과했던 것 같다. 무릇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마음을 더 주는 쪽이 관계에 과몰입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혼자 발전시키다가 결국 실망하기 마련이다. 어찌 생각하면 상대방은 ‘썸’이 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긴장감을 즐기고 싶었는데, 성질 급하고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연애하는데 좋은 성격은 아님) 내가 줄을 뚝 끊은 형국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워낙에 명확하고 깔끔한 성격 탓에 나 자신을 갉아먹는 긴장감과 텐션은 사양한다. 아니,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지 뭘 그렇게 피곤하게 사는지 모르겠다.


  영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He’s Just Not That Into You, 2009)‘는 남자란 관심 있는 여자에게 반드시 연락한다는 국 룰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행복한 결말을 기대하는 대부분의 순진한 어장녀들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긍정적인 신호만을 취합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다가 나처럼 싱거운 결말을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남녀 관계는 이성보다 감성이 지배하는 영역이라 100% 객관적인 입장이 되기 힘들지만 이 역시 수많은 인간관계 유형 중 하나이기 때문에 상황을 최대한 냉정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단언컨대 온라인 커뮤니티나 친구에게 고민 상담하게 하는 남자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긴장감 안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상대방의 행동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여  스스로를 갉아먹고, 나 자신이 없어지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다면 그 관계를 과감히 정리하자. 나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보살피고 존중하는 견고함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건강한 관계도 성립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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