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의 용골 (1)
[표지 사진: 선박의 진수(왼쪽), 용골거치(오른쪽), 출처: wikimedia]
복잡한 텍스트를 읽는 것은 마치 낯선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두꺼운 계약서, 난해한 고전, 또는 생소한 분야의 전문 서적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종종 길을 잃는다. 이 글에서는 법률 전문가와 금융 실무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복잡한 텍스트를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접근법, 텍스트의 ‘용골거치’를 소개하고, 도덕경의 용골거치(Keel Laying)를 시작한다.
금융이나 기업 인수합병(M&A) 과정에서 계약서 협상할 때 두 가지 스타일의 변호사를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1조부터 차근차근 페이지턴을 하면서 협상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사소한 문제에 지나치게 시간을 소비하게 만들어, 정작 중요한 조항에 이르면 모두가 지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결국 밤샘 협상이 이어지며 협상이 비효율적으로 진행된다.
두 번째는 중요한 쟁점을 먼저 추출하여 논의하는 방식이다. 이 접근법은 핵심 사항에 집중하여 협상을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다. 이후 사소한 문제들은 상호 양보를 통해 해결하면 된다. 고객 입장에서 볼 때, 이 방식은 시간과 자원을 절약할 수 있는 훨씬 효율적인 방법이다.
협상하는 변호사 입장에서는 시간당 비용을 청구하는 구조상 장시간의 협상이 수익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계약서를 화면에 띄워놓고 1조부터 보기 시작해서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를 고쳐가며 협상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되면 변호사의 멋진 계약서 작성능력을 보여줄 수도 있다(그리고 작성할 동안 옆에 앉아 있는 다른 변호사들의 미터기(time charge)도 함께 올라간다). 로펌에 근무할 때는 밤샘 협상을 하면서 협상장에서 바로 계약서를 수정하는 것이 좀 더 있어 보였다.
그러나 금융회사로 자리를 옮겨서 고객의 입장이 되고 보니 1조부터 계약서를 협상하는 방식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분명하게 깨달았다. 물론 시간이 많으면 1조부터 하나하나 자세하게 보고 협상할 수 있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 중요한 이슈에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협상과 비슷한 이유에서 두꺼운 계약서나 텍스트를 볼 때도 해당 텍스트의 구조를 먼저 파악한 뒤, 중요한 부분들을 먼저 파악하고 나머지를 읽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문제는 본인이 익숙한 영역의 경우에는 그런 접근이 가능하지만 생소한 텍스트의 경우에는 그런 접근을 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특히 고전과 같이 많은 배경지식이 필요한 텍스트는 어디부터 어떻게 봐야 할지 막막하고, 그냥 처음부터 도전하는 경우 몇 페이지 넘기기가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읽기 지도’다. 중요한 개념과 흐름을 미리 알려주는 안내가 있다면, 독자는 텍스트의 숲에서 길을 잃지 않고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흐릿한 읽기 지도 초안이 완성되면,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나머지 세부지도를 스스로 채워가면서 본인만의 읽기 지도를 새로 쓸 수 있다.
로펌에서 일하던 시절 선박금융 업무를 담당했던 경험이 있다. 이 분야에는 흥미로운 용어들이 많은데, 특히 선박 건조 과정은 마치 하나의 생명체가 탄생하는 과정과 닮아있다. 나는 주로 금융기관을 대리했었는데, 새로 건조되는 선박의 자금을 대출해 줄 때 금융기관은 일정한 단계별로 대출금을 지급한다.
선박의 건조단계 중 주요한 이벤트는 다음과 같다(출처).
1. 강재 절단(Steel Cutting): 선박에 사용될 철판을 처음 자르는 단계다.
2. 용골 거치(Keel Laying): 인체의 척추와 같은 역할을 하는 선체의 중심이 되는 뼈대인 용골을 설치하는 단계다.
3. 진수(Launching): 완성된 선체를 처음으로 물에 띄우는 순간으로, 엄마 뱃속 같은 독(Dock)에서 나와 선박의 처음으로 숨쉬기 시작한다.
4. 인도(Delivery): 모든 장비와 시스템이 완성되어 선주에게 넘기는 최종 단계다
특히 용골(龍骨)은 말 그대로 ‘용의 뼈’라는 의미고, ‘용골 거치’는 선박의 뼈대를 세우는 과정으로, 이후 모든 구조가 이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현대 선박 건조에서는 블록을 조립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실제로 용골을 설치하는 전통적인 공정은 사라졌지만, 첫 번째 블록을 독에 설치하는 행사를 여전히 “용골 거치식”이라고 부르며 의미 있게 치른다.
선박은 용골거치 시점부터 정체성(Identity)이 형성된다. 법적으로도 의미가 있어, 용골거치 이후 선박금융의 첫 번째 대출금이 집행되고, 선사는 조선소에 선급금을 지급하므로 선급금의 환급을 위한 선박건조보험이 작동한다.
고전을 읽을 때도 선박 건조와 같은 접근법이 유용하다. 먼저 텍스트의 ‘용골’을 파악하면 나머지 내용을 이해하기 쉬워진다. 그런 취지에서 도덕경을 읽기 위한 뼈대 세우기를 아래 도덕경 2장의 새로운 해석으로 시작했다. 단순한 해석을 넘어 내가 해석하게 된 사고 과정 전체를 묘사했다. 일종의 도덕경 ‘용골 거치식’을 ‘변호사 성장기’ 시리즈 안에서 진행한 셈이다.
앞으로 연재를 계속하며 틈틈이 도덕경의 다른 부분들에 대한 ‘용골’을 하나씩 세워나갈 계획이다. 이 과정이 완성되어 도덕경이 진수(Launching) 할 때까지.
과거 선박금융 관련 논문을 작성하며 업계 비밀(?)을 공개한다는 농담 섞인 질책을 받은 적이 있다.
이후 금융회사로 이직하면서 선박금융 업무와 거리를 두게 되었는데, 몇 년 후 그 논문 덕분에 관련 학회들의 공동세미나의 발표자로 초청받았다. 이미 해당 분야를 떠났기에 거절했으나, 적임자가 없다는 강력한 요청에 새로운 발표문을 준비하고 세미나에 참석했다.
발표 후에 한 로스쿨 교수가 내가 썼던 선박금융 논문으로 학교에서 세미나를 했었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고, 보람 있는 순간이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브런치 글도 누군가에게는 ‘업계 비밀(?)’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사실 지금까지 가장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글을 쓰는 매 순간, 글이 살아 숨 쉬며 나와 대화하는 것을 느낀다.
앞으로 지식, 지혜, 진리의 바다로 나갈 선박을 완성하기 위해 고전과 각종 학문들과 경험으로 용골을 하나씩 세워볼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첫 연재물인 ‘변호사 성장기’는 법의 풍경 브런치의 ‘용골(龍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