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일을 그만두는 순간,
그러니까 회사를 나갈 언젠가 그때를 생각한다.
얼마 전 한강 작가가 작가의 전성기는 50~60세라는
남들 다 알았으면 하는 말도 했고,
근사한 할머니 작가를 꿈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어서 나름 대비를 해놓았다
나갈 때 덜 창피하게, 나갈 때만은
떵떵거리면서 나올 수 있게 짐을 최소화해놓았다.
책 2~3권이 꽂히면 꽉 차는 파일꽂이 하나와
텀블러 두 개가 전부.
당장 내일이라도 나오지 말라고 하면
‘알았다고요 당신 이제 볼 일 없잖아’로
대응할 수 있게끔 해둔 것인데
그리고는 디제이 후배에게 연락을 할 것이다.
“파일꽂이는 버리고,
텀블러 두 개는 챙겨 와 줘. 밥 살게''
파일꽂이에는 회사에서 받은 다이어리와
투명 파일 몇 개가 전부. 예전에는 연말이 되기 전,
회사에서 한 사람당 필요한
다이어리 개수를 조사하곤 했다.
그리곤 인심 좋은 부잣집 곳간 열어젖힌 것처럼
부족함 없이 주곤 했는데
회사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이젠 1인 1개가 됐다.
다이어리 신청 개수를 신청하는 종이에
10개인가 15개인가 써놓은 누군가를 보고
'작작하지. 장사하나’라고 속으로 욕을 한 것도,
서너 개를 받아서 주변 지인들에게 생색내며
하나씩 건넨 것도 모두 그땐 그랬지 일이 돼버렸다.
그래도 안 주면 어쩔 거냐 라는 마음으로
감사히 받아서
두 달 혹은 석 달마다 해야 하는 캠페인 일정과
가끔씩 변동되는 게스트 출연 날짜
그리고 제때 입금되지 않는 캠페인 원고료까지
급하지 않은 내용을 휴대전화가 아닌
다이어리에 적어두고 알뜰살뜰 사용하고 있다.
모든 정황상 텀블러는 한 개가 맞지만
두 개가 된 이유는 하나를 선물 받은 덕분이다.
원래 가지고 있던 건 좁고 긴 스타벅스 텀블러인데
세척하기가 불편했던 차에
키가 작고 주둥이가 넓은 투썸플레이스 텀블러를
캠페인 녹음하러 오셨던
해양경찰서 관계자에게 받아 잘 쓰고 있다.
개인이 준비한 것이 아닌 경찰서에서
외부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었는데
그들의 넉넉한 여유와 유독 조심성 많고
부끄러움 많았던 담당자 인상까지 더해져
해경의 이미지는 나에겐 ‘좋아요’가 됐다.
이렇게 언제든 회사와 연을 끊어도 아쉬울 것 없이
단출한 살림을 두고 있지만
아름다운 이별이 우선이지,
어떠한 형태든 잘리는 것은 낯 뜨거움을 넘어
마음의 진득한 상처가 될 것이다.
피가 나고 딱딱한 딱지가 생겨
산뜻하게 떨어지는 상처가 아닌
피가 났다가 말랑한 딱지가 생기다 말았다가
다시 피가 나는 반복되는 상처.
만약 ‘짤리게’ 된다면 아마 두 가지에서
사단이 생겨서일 텐데,
하나는 내가 미쳐 돌아서 국장이나 팀장에게
이보슈, 이봐요도 아니다
‘이보슈, 당신이나 잘하라고’ 하거나
또 하나는 라디오 상품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일 것이다. 매일 오는 라디오 문자 사연이나
요일마다 있는 코너에 참여한 청취자들에게
식사권이나 주유권, 카페 이용권 등이
선물로 나가는데 매달 당첨자 명단을 정리해서
담당 피디에게 제출하고 공유하면서
투명 필터를 씌운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어느 작가가 라디오 팀으로 할당된
공연 티켓을 가로챘고,
그 티켓을 중고거래사이트에 올렸고,
작가의 남편이 어린아이까지 안고 나와
그 티켓을 판매해서 사부자기
목이 날아갔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이 흉흉한 설화를 듣고 그 작가가
나인 줄 알았다고 면전에다 말하는 피디에게
‘니나 잘해라. 니도 회사에서 욕 처먹고 있더라’
말하려고 하다가 “내가 그런 이미지구나 “라고
착한 척을 했던 기억이 있다.
많이 컸다.
늘 회사 테두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줄 알았는데
살림을 줄이고 이제 언제쯤은 그만둬야겠지 라는
생각이 드는 나이와 연차가 됐다.
라디오 사연을 보면서는 남들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
회사 사람들과 부대끼면서는 선행과 악행을 배웠고
지금도 젖어들고 있다.
신문 한 귀퉁이에서 읽은 백영옥 작가의 글이 있다.
[ 도리스 마르틴의 책 ‘아비투스’ 에는
‘소프트 아이스크림’ 값을 묻는 아이가 나온다.
25 센트라는 점원의 말을 듣고
손에 쥔 동전을 세던 아이는
‘셔벗 아이스크림’의 값을 다시 묻는다.
점원이 20 센트라고 답하자 아이는 셔벗을 고른 후
동전을 탁자에 올려놓고 나갔다.
계산서와 동전을 본 순간, 점원의 코 끝이 빨개졌다.
탁자에는 25센트가 놓여있었다.
팁을 주려고 아이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포기한 것이다. ]
그리고 덧붙인다.
아비투스는 인간이 살아가는 행동과 태도,
습관을 뜻하는데 아이든 어른이든 매 순간의 선택은
지난 삶의 궤적을 압축한다고 말이다.
아이는 부모가 하던 것을 봤을 것이고
아비투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피에르 부르디외의 말을 전한다.
“당신은 볼 수 없는 것이 될 수 없다”
마지막 그날까지,
기왕이면 늦춰질 대로 늦춰진 그날까지,
회사가 주는 햇빛과 비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여태 보지 못한 것을
기민하고 예민하게 보고 싶다.
오랜만에 보면 몰라보게 커진 아이처럼
마음과 내면이 깊고 단단해졌으면 한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