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참 운이 좋지 않은 날이었어요.
1. 아침 출근길에 공기업에서 팀장으로 일하는 친구로부터 카톡을 받았어요. 팀원이 기획안을 정리해서 가져왔는데 너무 맘에 들지 않아서 피드백을 줬더니 열심히 하겠다고 답을 했다며.. 누가 열심히 하랬냐고 잘하랬지 답답해 죽겠다는 거예요. 매번 같은 반응이라고 하면서요.
2. 출근해서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새롭게 시작하는 프로젝트가 있어서 WBS작성 전에 아이디에이션 미팅을 했어요. 내용을 정리해서 프로젝트 관련인들에게 공유했는데.. 그중 한 분이 공유 안 해줘도 되니까 잘하면 된다는 피드백을 주셨어요. 갑자기 출근길 친구에게 받았던 메시지가 오버랩되면서 기분이 묘해지더라고요?
3. 퇴근하고 링크드인 업데이트를 읽다가 누군가가 프로페셔널을 주제로 적은 글을 보게 되었어요. 글의 핵심내용은 우리 모두는 프로니 열심히 대신 잘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분명 좋은 글이었고 배울 부분도 많았는데 그날 있었던 대화들이 겹치면서 기분이 확 나빠지더라고요.
언젠가부터 마치 쿨 병이라도 퍼지듯이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자리에 오래 앉아있어야 소용없다, 결과로 승부해라 등이 세트로 언급되는 문장이고요.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결과만 좋으면 정말 아무 문제없나요?
네. 솔직히 맞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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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결과가 늘 좋을 수 있다면 말이죠.
직장생활, 조직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 저도 돌아보면 아찔했던 순간들이 있어요. 한 번은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사내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행사 하루 전에 진행 시나리오를 모두 바꿔야 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이미 세부 시나리오까지 결재를 다 받고 진행하던 건이라 정말 당황했죠. 변경된 시나리오에 따라 섭외도 다시 해야 했고 필요한 물품도 다시 대여해야 했어요. 한마디로 멘붕이었습니다.
우선순위를 잠깐 정리하고 일단 제가 해결할 수 없는 부분부터 빨리 부탁하기 시작했어요. 이미 퇴근시간이 지났고 아무도 안 해주겠다고 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너무 불안했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전화를 받는 분들마다 "아... 알았어요. 제가 뭐 하면 되는지만 알려줘요" 라며 흔쾌히 승낙하시는 거예요. 급하게 구해야 하는 물품도 누군가가 저 대신 랜탈회사에 연락해서 구해주셨고요. 결론적으로 큰 문제없이 행사가 끝났고 도와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어요. 그 과정에서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에이 뭘요. 종훈 님이 열심히 준비했던 거 아는데 도와줘야죠"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실수나 실패를 했을 때 저를 구해준 건 결과나 성과가 아니라 늘 태도였어요. 제가 평소에 일을 어떻게 대했는지, 동료를 어떻게 대했는지. 바로 이 태도요.
누군가가 저에게 무리한 부탁, 긴급한 부탁을 할 때도 가장 먼저 떠오는 건 그 사람의 평소 태도지, 그 사람의 성과나 결과가 아닙니다. 실제로 팀장, 임원들이 소속 구성원들에 대해 우려나 고민을 이야기할 때도 대부분은 태도에 대한 고민이더라고요. 성과는 조직장과 동료들이 함께 채울 수도 있고 끝내 역량핏이 맞지 않으면 팀을 옮겨줄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태도는 말 그대로 노답입니다. 태도가 별로인 사람을 도와주겠다는 동료도, 받겠다는 팀도 없어요. 일을 잘하는 것만큼이나 삶을 잘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태도의 힘은 평소엔 가려져있다가 위기의 순간 진면모를 드러내는 특성이 있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 같아요. 잠깐만 생각해 봐도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알면서 말이죠.
다시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와서, 출근길 카톡을 줬던 친구에게 위 내용을 정리해서 피드백을 주었어요. 물론 고맙다는 말 대신 팀장하기 진짜 힘들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요. 찐친 대화에 훈훈한 마무리란... 드물죠.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