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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트립 Dec 06. 2023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운수 좋은 날

그냥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가 좋았다. 이유는 단 하나, 도시 이름이 낭만적이잖아. '좋은 공기'라니. 다녀온 사람들도 하나같이 극찬했다. 이 두 가지가 맞물려, 한도시 체류로서는 가장 오랜 기간인 12일간 머물 예정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날씨가 예술이었다. 공항에서 나오니 선선한 바람과 만발한 보라색 꽃이 반겨줬다. 과연 '기분 좋은 공기'다. 이름값을 하는 도시라고 감탄하며 첫인상에 합격점을 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운수 좋은 날


공항청사 안의 편의점에서 교통카드를 사고 요금을 충전시켰다. 버스도 성공적으로 탔다. 중에 지하철로 갈아타려고 했는데 버스가 숙소 방향으로 향하길래 계속 더 가보기로 했다. 운수 좋은 날인지 버스가 숙소 동네로 가는 게 아닌가.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에어비앤비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 주인도 바로 문을 열어준다는 답이 왔다. 착착 맞아떨어지니 역시 운수 좋은 날이다.  


도로변 건물 앞에서 호스트에게 회신을 보내던 중이었다. 순간, 누군가 내 손목을 치며 폰을 빼앗아 달아났다. 핸드폰 소매치기였다. 조금 떨어져 서있던 남편이 놀라 소매치기를 뒤따라 뛰었고 나는 놀라서 소리쳤다. "로호(Rojo, 빨간색)! 로호!" 소매치기범이 빨간색 티셔츠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길 가던 청년 둘도 갑자기 소매치기를 뒤쫓아 뛰기 시작했다. 남편이 넘어졌고 바지주머니에서 폰을 흘린 것도 모르고 일어나 또 달리고 있었다. 뒤따라 가던 내가 남편 폰을 줍고 뛰었다. 우리 둘은 몇 발자국 뛰다 말고 금세 포기했다. 몸 앞뒤로 배낭도 메고 있었고 빈 몸이라 한들 중년의 우리가 젊은 도둑을 어떻게 잡는단 말인가.


도둑을 뒤쫓던 청년 둘 중 한 명이 되돌아왔다. '못 잡았다'라고 하며 미안해했다. '내 폰은 이제 잃어버린 거다!' 그래, '운수 좋은 날'의 원래 결말은 이런 반전 새드 엔딩이었.


그래도 남편 폰이라도 주웠으니 다행이다. '하마터면 두 개 다 잃어버릴 뻔했잖아.' 숙소 쪽으로 돌아서려는데 소매치기를 쫓던 다른 청년 한 명이 돌아왔다.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그가 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건 바로, 방금 빼앗긴 폰, 그 폰이 아닌가. 이것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운수 좋은 날'의 진짜 엔딩이다.



쇠고기, 축구, 탱고, 그리고 운수 좋은 여행


여행자 사이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는 사고가 핸드폰 사고이다. 지도를 보거나 사진을 찍기 위해 수시로 핸드폰을 꺼내게 된다. 쉽게 노출이 되다 보니 더러 표적이 된다. 소매치기를 당한 후로,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살피고 폰을 꺼냈다. 살짝 위축된 것도 사실이지만 하루이틀 지나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느긋한 공기 속에 나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요광장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의 파리'라고 불린다. 시내에서 유럽풍의 건물과 공원, 백인들을 늘 마주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세 개의 단어로 말하면 '쇠고기, 축구, 탱고'라고 할 수 있다. 질 좋고 저렴한 쇠고기 덕분에 '와인에 스테이크'를 질릴 때까지 먹을 수 있고 거리에서 탱고 공연이 벌어진다. 도심 곳곳에 '메시'가 여러 모습으로 출몰하는가 하면, 등번호 10번의 축구 유니폼을 입은 '걸어다니는 메시들'도 수없이 만났다.  


도시 곳곳에 메시가 있고, 걸어다니는 메시들도 많이 만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우리돈 1만원으로 와인과 스테이크를 먹고 1500원이면 이태리식 커피를 마다. 우리돈 90원 버스와 140원 지하철은 탈 때마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수준높은 박물관, 미술관 공원은 또 어떠한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비용 대비 만족도 최고'의 운수 좋은 여행이 날마다 이어졌다.


라 레골레타 묘지 앞에서


한때 선진국이었던 아르헨티나가 경제가 무너진 채 회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거리에는 노숙자와 구걸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내가 당한 소매치기도 이런 사회 상황과 무관하지 않겠지. 누구든 안전하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운수좋은 날즐길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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