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트립 Mar 16. 2024

사과를 사과로 부르지 못하는 이유

대파 오천 원의 시대에 가계부 쓸 결심

달은 이래저래 지출이 많았다. 설날도 있었고 세뱃돈도 솔솔찮게 나갔다. '이 달을 넘기기 전에는 장 보러 안 나가야지' 결심했다. 당분간 '*냉파족'이 되기로 다짐했지만 막상 밥때가 되어 냉장고를 열어보니 대파와 양파, 풋고추 등 야채칸 한편에 늘 있어야 할 '붙박이 야채'가 다 떨어졌다.(*냉파: '냉장고 파먹기' 줄임말로식비를 줄이기 위해 냉장고에 남아있는 재료들을 활용해 음식을  먹는 현상을 의미하는 신조어)


장바구니 두 개를 챙겨 시장에 갔다. 내 또래 50대 주부들은 크게 두 부류이다. 시장파와 마트파. 나는 지금까지 시장파를 고수하고 있다. 시장은 마트보다 식재료가 더 신선하면서 저렴하고 제철 식품이 더 다양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량 판매와 접근성 등의 편의성 때문에 마트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옛날 얘기다. 비재 시장의 골리앗, 온라인몰의 출현은 쿠팡파를 탄생시켰다. 쿠팡이 신선식품 시장에 뛰어들면서, 동네 터줏대감 마트는 물론, 시장을 위협하던 대형 마트마저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사과를 사과로 부르지 못하는 이유


필수 야채를 사러 나갔지만 비싼 가격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아 빈 바구니로 시장만  바퀴 돌았다. 가장 먼저 충격을 안긴 것은 대파였다. 대파 한 단에 오천 원이다. 대파가 무슨 고기도 아니고, 장식용으로 쓰는 고급 야채도 아닌데 2500원이면 사던 대파가 오천 원이라니, 100% 올랐다.


노지파든 아니든 대파 한 단은 5천원


시장의 배신이다. 한 소쿠리 삼천 원이던 감자나 고구마는 개수는 더 적어진 채 오천 원이 되었고 몇 개 더 담겼다 싶으면 만원이란다. 풋고추는 보통 때 반보다 한두 개 더 담아놓고 같은 가격을 받으니 체감 물가 상승률 40%다. 시장에서 야채 소쿠리 삼천 원짜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웬만하면 오천 원이 시작 가격이었다.


신선식품 고물가의 정점은 과일이었다. 상품성 있는 사과나 배 한 개는 오천 원이고 겨울철마다 이만 원 전후로 사 먹던 귤 5킬로는 최소 삼만 원은 줘야 한다. 사과는 이제 박스나 소쿠리 단위는 커녕, 한 개, 두 개, 낱개로 사 먹어야 하는 과일이 되었다. 예전에는 사과가 비싸면 귤 사 먹고 귤이 비싸면 사과 사 먹었는데 과일들끼리 무슨 가격 담합이라도 했는지 차별없이 비싸니 과일 모두에게 비싼 대접을 해줘야 한다. 그냥 '사과, 배, 귤'이라고 부르면 안 될 것 같다. '금사과, 금배, 금귤'로 불러야 한다.


금사과의 출현



가계부 쓸 결심


해외에 장기 여행을 다녀온 지 한 달이 지났다.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 물가 높기로 소문난 도시들은 듣던대로 서비스 요금이 높고 외식비가 비쌌다. 그러나 마트 물가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저렴해서 마트 나들이는 언제나 즐거웠고 식재료로 가득 채운 장바구니는 행복 그 자체였다. 


여행에서 돌아왔는데도 내 머릿속 물가 시계는 1년 전으로 세팅되어 있는지 적응이 잘 안 된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장바구니 물가만 오른 게 아니었다. 가스와 전기요금도 올랐고 목욕비와 이미용비도 올랐다. 지하철과 버스 요금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주에는 딸아이 자취방을 구하러 서울에 갔었다. 처음에는 딸아이를 독립시키는 부모 마음이라 '상대적으로 더 안전하고 관리가 잘 된다'는 오피스텔을 구해 주고 싶었다. 6평도 안 되는 강남의 오피스텔은 월세 70만 원이 최저가 수준이었다. 비싼 월세값도 놀라웠지만 채광이 나빠 답답한 데다가 한 사람이 겨우 누울까 말까 한 살인적인 크기라 더 경악했다. 결국 보증금 1천만 원에 월세 60만 원짜리 다세대 원룸을 얻었다. 중소기업에 갓 취업한 사회초년생이 적은 월급으로 월세를 어떻게 감당할까 싶다.


서울의 주거비가 높은 건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니 그렇다 치고, 서울과 지방 할 것 없이, 공공요금과 교통비, 서비스요금, 외식비 등 '내 수입 빼고' 모든 게 다 올랐다. 아니다. 가만히 숨만 쉬고 있었을 뿐인데 내 구매력이 줄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내 수입이 안 오른 게 아니라 오히려 내 수입이 줄어들었다.


앞으로 고물가 시대를 어떻게 버텨갈까. 써봤자 별 뾰족한 수 없다고 던져두었던 가계부라도 다시 집어 들어야 하나?



&& 2월에 쓴 글이네요. 지각 발행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3월의 부산과 4월의 거제, 다시 길 위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