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노화를 맞이하는 40살의 처참한 심경
말 그대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제 심정이 그렇습니다.
1, 2, 10, 20... 30, 40.
해마다 1씩 더해지는 이 작은 숫자는 아무것도 아닌 듯 하지만 실체는 아무것도 아닌 게 "절대" 아닌 숫자입니다. 우리나라 같이 나이가 이렇게나 써먹을 만한 무기가 되는 나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시비가 붙었을 때 "너 몇 살인데?"를 묻는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싸움을 시작해 보지>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니까요.
별 것도 아닌 일들에 나이를 운운하다니! 아니 왜? 30이네 40이네 하는 말들이 이해가 안 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성인을 축하하는 20살도 아닌데 왜 이렇게 호들갑인가 싶었던 거죠. 하지만 40을 맞이한 제가 요즘 사십, 사십 살, 마흔, 아줌마, 중년... 이러고 있습니다. (과거의 나에게 꿀밤을 한대 콩!)
40살에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은 급격한 노화를 느끼게 된 이후부터입니다. 노화가 한순간에 진행될 리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늙음, 내일부터 늙을 예정. 이런 게 있을 리 없잖아요. 나는 태어면서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늙어가고 있었을 텐데 왜 이 타격감이 지금은 더 크냐는 말입니다. 외모에 죽고 사는 스타일도 아닌데 제 상심이 이렇게 큰걸 보면 연예인이나 미모 좀 하시는 분들은 그 충격이 얼마나 클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차라리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로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할까요?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뽀얀 얼굴을 기대했습니다. 우중충한 그레이와 색 바랜 브라운 필터를 적용한 듯한 이 피부색. 내가 아닌 것 같은 얼굴입니다. 거울 앞에 서있는 건 나인데 거울 속 사람은 내가 아닌 것 같은 이 묘한 기분이란...? (여기서 공감의 탄성 나와줘야 합니다.) 기분 탓이겠지 하며 로션을 슥슥 바르고 별생각 없이 욕실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꽤 자주... 반복되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걸려온 엄마의 전화에 이때다 싶어 하소연을 해보았습니다. 엄마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휴직 중이라 피곤한 것도 아니고 잠도 잘 자. 잘 먹어서 살도 포동포동 쪄. 그렇다면 원인은 늙. 은. 것! (아무래도 엄마는 T 가 분명합니다.)
그 이후로 어김없이 거울 속의 저는 늙어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더 많으신 분들이 보시면 벌써 그런 소리를 하냐, 그럼 나는 할머니라는 거냐? 불쾌하실 수 있겠지만 확실히 40살은 전후의 변화가 확연하게 느껴지는 시기입니다. 내 의지로 발을 뺄 수도 없고 느리게 느리게 돌고 돌아 피한다고 해도 결국은 40 즈음이면 도달하게 되는 노화. 들어가기 싫다고 되돌아갈 수도 없으며 발을 뺀다고 뺄 수 있는 곳이 아닌 노화의 문턱.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발 한쪽은 이미 그 문을 넘어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발 하나를 서서히 들여놓으며 저는 그렇게 노화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봅니다. 서른을 맞이할 때 기분도 썩 좋지는 않았지만 나쁠 이유는 없었습니다. 결혼한 지 2년 을 막 넘은 아직은 행복한 신혼이었습니다. 이제 서른 살이니 아기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아닌 너무 빠른가? 임신 시기를 고민했고 종종 학생 같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때가 좋았다. 엉엉ㅠ) 고공행진을 하다 적당한 공항에 성공적으로 착륙한 비행기 같았던 나의 서른 살. 앞자리가 바뀐 것에 대한 약간의 서운함으로 하루 이틀 섭섭했던 것 말고는 사실 아무런 타격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피부도 탱탱했고 체력은 쌩쌩했으며 퇴근 후시간은 여유로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경제적으로도 그때가 가장 황금기였던 것 같습니다.
반면 지금의 40은 "말해 뭐 해"라고 표현하면 딩동댕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질 것 같습니다.
주방가구, 생활용품이 나날이 편리함을 추구하며 신제품이 출시됩니다. 그로 인해 혜택을 보긴 했지만 아이는 결코 혼자 자라지 않습니다. 특히 직장맘인 저는 매일이 달리기인 삶이었습니다. 아이를 낳고부터는 제 젊음을 담보로 하루를 버티듯 몸과 마음이 버겁고 힘들었습니다. 잠을 줄이고 더욱 부지런히 움직였고 회사에서는 더욱 열심히 집중했습니다. 몇 년간 매일매일이 참 피곤했습니다. 잠 한번 제대로 자보는 게 소원이다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다고 제 노화가 아이 때문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씩 진행되고 있었던 노화를 제가 바쁘다는 이유로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 실수라면 실수이겠죠.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나만 몰랐던 나의 노화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거울 속 나를 제대로 자세히 관찰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때마침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는 제 얼굴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화장은 불필요했고 오히려 시간을 줄여주는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출근을 하지 않는 날은 거울을 볼 일이 없었습니다. 자기 관리가 너무 심각한 수준인가요? 부끄럽지만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휴직 후 아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온전한 내 시간이 생겼습니다. 텅 빈 집에서 여유롭게 늦장을 부리며 샤워를 하는 사치를 부려봅니다. 그런데 거울 속 나는 매일이 피곤하고 지쳐 보이고 어둡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계속 내내... 무슨 일이 벌 어긴 거죠? 깔깔거리며 웃어댈 때 내 눈꼬리에 주름이 얼마나 길게 잡히는지, 무표정한 표정에서는 얼마나 탄력이 없는지. 목에 주름은 왜 이렇게 깊어졌는지. 오랜 관찰과 냉정한 자체판단으로 길고 가는 주름들을 여기저기서 발견하게 된 것이 공교롭게 40을 맞이한 요즘입니다. 휴직을 하지 않고 여전히 바쁜 하루를 넘겼다면 또 모르고 지나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야 제대로 직면한 나의 노화.
한 번은 우리 집 아이와 같은 유치원을 졸업한 A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모습이 3년 전이니 족히 20센티는 커버린 아이를 보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A의 엄마는 오히려 우리 집 아이를 보고 놀라워합니다. 매일 보는 우리 아이는 그대로인데... 매일같이 일어나는 촘촘하게 작은 변화들에 눈은 참으로 둔감한가 봅니다. 제 노화도 마찬가지이겠죠. 본격적인 육아가 시작되고 회사에서는 주요 인력으로 활약해야 했던 30대를 그렇게 보내는 동안 저는 제 얼굴에 매일 눈도장을 찍을 여유가 없었던 거죠. 훅 지나버린 세월에 여기저기 아픈 팔다리와 자주 고장이 나는 몸속 기관들들까지 쐐기를 박아줍니다. 부정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탑승하게 된 나이의 롤러코스터. 만개한 젊음의 그래프에서 내리막길 꼭대기에 위치했습니다. 롤러코스터 그 꼭대기에서의 공포감과 견준다면 지금이 더 무서울지경입니다. 이제 슈웅- 빠른 속도로 내려가며 비명을 지를 일만 남았겠죠?
그동안 네 변화에 적응하지 않고 뭐 했냐, 준비는 왜 안 했냐 하시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있었던 주름이 조금 더 깊어지는 것과는 다른 수준이라고 방어를 해봅니다. 없었던 주름이 생겼고, 없었던 기미가 내려앉았고, 없었던 위장장애가 생겼습니다. 멀쩡했던 팔은 육아를 하는 도중 닳고 낡아서 번쩍 손을 올릴 수도 없습니다. 모두 새롭게 생겨난 것들입니다.
사람을 가리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나 공평하게 매일 조금씩 가까이 오고 있었을 것인데, 누군가는 일찌감치 알아채고 부지런히 밀어냈을 겁니다. 운동에 관리에 이것저것 나를 가꾸며 지켜내고 있었겠죠. 저는 멍 때리다 뒤늦게 출발한 달리기 선수 같습니다. 방치한 나를 위해 부랴부랴 피부과를 예약해 봅니다. 화장품도 바꿔봅니다. 귀찮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마스크팩이라도 올리고 잡니다. 식단도 조금 더 건강하게 바꾸고 최소한의 수면시간도 지켜냅니다. 이제서라도 이런 여유가 생긴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사느라 조금 바빴어. 눈치챌 겨를이 없었어. 그렇다고 이렇게 훅 들어오기 있니 없니!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 네가 하나도 반갑지 않단다. 부탁하는데...
조금 천천히 와주면 안 되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