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실패할 때마다 아빠에게 지겹도록 들은 말이다. 그리고 나도 어느새 그 말에 100프로 공감하게 되었다.
내 나이 26. 꽤나 우여곡절 있는 삶을 살지 않았나 생각한다. 유년기 부모님의 싸움으로 인한 트라우마, 입시를 포함한 많은 시험에서의 실패, 엄마의 교통사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조울증이라 불리는 양극성 정동장애, 그로 인해 겪은 믿고 싶지 않고 믿기 힘든 일들과 상처.
그중에서도 나를 포함한 가족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일 중 하나인 조울증. 근데 왜일까. 어릴 때부터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고, 그저 주어진 일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일까. 나는 왜 나한테 이런 일이라는 생각은 딱히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일이든, 저런 일이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이번엔 단지 그게 나였을 뿐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가장 아름다울 시기인 23살의 나에게 그 병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원인이 뭔지 몰랐는데, 부모님의 말처럼 아빠 쪽 유전인자 때문일 수 있겠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게 내 운명일지도. 대학교를 다니며 삼수를 준비하기 전에도 별거 아닌 일로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는 일도 겪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울증이 찾아온 나는 그로 인해 많은 변화를 겪었다. 조증이 온 후에 우울이 찾아오는 건 병 자체가 그런 거니까 어찌 보면 당연할 수 있는 것이고, 말을 잃었고, 많은 관계를 잃었고, 자존감을 잃었다. 원래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는데 병을 얻고 나서 감정과 생각이 줄었고 자연스레 말을 잃게 되었다. 머리에 떠오르는 게 없으니 그걸 표현하기도 힘들 수밖에. 그래서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렵고 걱정되었다. 상대방이 불편하고 내가 불편할까 봐. 그리고 그건 실제로도 그런 적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대학을 와서 친구를 활발히 사귀고 놀며 쌓은 관계들은 그렇게 하나, 둘씩 사라져 갔다. 서서히 서서히. 내가 정신적으로 병을 있단 걸 알고도 떠난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 관계는 내 병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그 정도 관계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는 걸 안다. 아플 때 나를 찾아주던 전화도 많이 회피했고 그렇게 내가 저버린 관계들도 있다.
중학생일 때 빼고는 열등감, 시기질투로 휩싸인 적이 없는데, 병이 찾아오고 나는 자존감을 많이 잃었다. 병에 걸리기 전 인생을 살면서 꽤나 주변에서 인기가 많았던 나는 대인관계로 인해 자존감 저하가 가장 컸다. 대학교에서 맺은 관계가 다 피상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은 말수로 인해 주변에서 나의 말수에 대해 언급하면 너무 상처고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나는 그 또한 받아들였다. 원망, 자책 그런 건 내 병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나를 더 위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저 받아들이고 나는 또 거기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어쩌면 긍정적인, 적어도 부정적이진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에는 정말 감사하다. 나를 덜 괴롭힐 수 있으니.
가끔은 나의 이런 병에 대해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도 사회에서 정신적 질환은 다른 병처럼 쉽사리 말하기 힘든 것이라는 걸 안다. 이런 걸 쉬쉬하는 분위기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도, 정신적 질환은 많은 이들에게 찾아오고 쉬이 이렇게 말하듯 감기 같은 거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고 신해철 님이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정신적 질환도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데에 공감하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다. 그걸 말하면 떠날 거라는 두려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다행인 건 나의 병세는 서서히 조금씩 좋아져서 3년 정도가 지난 지금은 어느 정도 말도 늘고 대인관계에 대한 걱정도 많이 줄었다.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는 기대도 있다. 그리고 병이 걸리고 난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소중한 관계는 나에게 꽤나 큰 자신감을 주었고, 참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 나는 그동안 소홀했던 자기 계발로 좀 더 나은 나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까지 잘 받아들이고 흘려보낼 건 흘려보내고 견뎌준 나 자신에게 고맙다. 그리고 나의 병을 위해 최선을 다해준 부모님에게도. 나의 곁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준 친구들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