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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숭밤 Aug 28. 2023

책갈피 같은 일들

23/04/14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창 흥행 중인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고 왔다. 주인공 스즈메가 처음 본 청년 소타를 무모하게 쫓아가거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문 닫는 일에 동참하는 건 그럭저럭 이해했다. 그러나 여행 중 만난 이들이 낯선 스즈메에게 곁을 주고 친절하게 잠자리까지 내주는 태도엔 좀 의아했다. 심지어 목욕탕 청소나 아이 돌보기 같은 역할을 턱턱 맡기기까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번에도 특유의 황홀한 비주얼을 선보이며 설명에 앞선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신화와 현실이 섞인 이야기가 생각보다 유치하지 않고, 미미즈에 대한 묘사는 불길한 예감을 넘어 망연한 공포감을 자아낸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미미즈를 봉인하는 여정에서 스즈메는 일종의 위령제를 수행하는 듯하다. 전작의 인물들보다 부쩍 단단한 동시에 어딘가 위태로운 이 아이.





마지막 여행지에서야 비로소, 까맣게 지운 일기장 속 3월 11일이라는 날짜가 드러난다. 아, 그날. 짧은 탄식과 함께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실제의 상흔, 책갈피 같은 일들. 하나둘 퍼즐이 맞춰지며 나도 모르게 허리가 꼿꼿해졌다.


책갈피 같다는 표현은 문지혁의 단편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에서 읽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에 대해 들은 화자의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



“책갈피 같아, 그런 일들은.”

- 문지혁,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中



재난은 희생자와 그 주변 사람들의 일상을 전복시킨다. 남은 이들은 부서진 일상을 그러모으며 시나브로 페이지를 넘겨보지만, 잠깐만 손을 놓쳐도 책갈피가 끼워진 그날로 돌아간다.


 

1994년은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희미한데, 2014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책갈피가 꽂힌 그날, 나는 모교에서 교육실습을 하는 중이었다. 정장을 입고 뻣뻣한 자세로 교무실에 있다가 소식을 들었다. 모두 무사하다는 뉴스에 안도하며 급식을 먹으러 갔던 수요일.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뉴스와 인터넷상에서 막말과 실언이 오고 갔다. 분노와 참담함을 느끼며 무력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나는 결국 비켜선 존재였음을. 문지혁의 소설에서 나온 말처럼 ‘창문 속이 아니라 그림 밖의 존재. 다리를 다시 짓고, 꽃을 꽂아 둘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다음 계절, 그다음 해가 다시, 쉽게 일상이 됐다.


여행 중에 만난 인물들이 스즈메를 환대하는 모습은 실제로 재난을 겪은 이들에게 함께 살아가자, 그렇게 손을 내미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은은하게 회복과 치유의 희망을 말하는 영화. 그러면서도 진정한 위로와 성장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일‘의 스즈메에게 맡긴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섬세한 그 태도가 나도 참 고마웠다.



한 인터뷰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중요한 건 타인에 대해 상상해 보는 일’이라 말했다. 누군가에 대해 상상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이 사회 전체가 아주 조금은 더 좋은 곳이 되지 않을까 바라고 있다고. 슬픔과 애도, 그리하여 손을 내밀고, 상상하는 자세를 생각하는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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