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 중에서 마이너로 살아가는 방법
비록 전문직은 아니었지만 대기업, SKY 출신의 안정적인 직장, 그리고 수도권에 있는 집 한 채, 나름 잘하고 있는 재테크로 남부러울 것 없이 한국의 중산층의 생활을 누리던 내가 한순간 미국의 마이너 중에서도 마이너 한 아시안 백수 남자가 되었다. 그 이유는 딱 하나 "도전"이라는 단어. 그렇지만 호기롭게 모든 것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마이너의 삶은 생각보다 헤쳐나가야 할 것들이 많다.
집(HOME)
한국의 집이라 함은 사실 형태는 아파트나 주택이냐 이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크기마저도 거거익선이지만 크게 다른 사람과 비교할만한 것들은 없다. 딱 하나 한국에서 집은 "지역", "학군"과도 중요한 관련이 깊었다. 사람들이 강남에 사는지 강북에 사는지 그거에 따라 그 사람을 보는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미국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한국인이 많은 곳 일 수록 학군을 많이 따지게 되고,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지역의 집값이 비싸다. 이런 미국에서 하나 더 추가해서 계층 아닌 계층이 나뉘는 개념 중에 하나가 바로 집의 유형이다.
세탁기의 소중함
외국인 학생 부부가 그것도 아내 혼자 외벌이인 상태인 아시아인이 먼 한국땅에서 미국에 집을 구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현지의 집이 어떤지도 모르고 그냥 계약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집을 둘러보고 계약하는 한국의 문화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에 이 상황부터가 말이 안 되고 답답하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다. 그냥 우선 살아보고 결정해야 한다. 그렇게 나와 아내는 아파트에 입주하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가장 충격적인 것은 다름이 아닌 세탁기가 공용이라는 점이다. 어릴 적 시골의 할머니 댁에서 세탁기가 없을 때 할머니가 손빨래하는 모습을 본 적은 있어도 여러 사람이 함께 세탁기를 공유해서 쓰는 모습은 처음 본다. 그것도 전 세계 가장 부유한 국가인 미국이라는 곳에서 말이다. 이것이 왜 충격적인지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어떤 날에는 내가 빨래를 돌리고 다시 돌아왔는데 다른 사람의 속옷 빨래가 들어가 있는 경우를 경험한다는 사실을 상상해 보면 그 불쾌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세탁기가 있는 집은 월세가 더 비싸고 아파트에는 잘 없고 대부분 타운 하우스로 한 단계 올라 가야 개인적인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린다.
지하실이 소중해
세탁기를 위해 집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한다는 건 생활비가 한 달에 100만 원 정도 더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파트는 저소득 층을 위해서 집에 가스, 난방비, 인터넷비, 물세까지 모두 포함되어 월세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 벗어나게 되면 갑자기 이 모든 것을 다 따로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단순히 월세가 100불이 올랐다고 해서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타 유틸리티 사용비를 포함한 비용까지 계산하면 거의 500불 정도가 올라간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세탁기 한대값을 매달 더 지불하고 내는 타운하우스의 한 달 월세는 보통 2000불 내외가 내가 사는 지역의 시세이다. 물론 더 대도시로 가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보증금은 한 달 치 월세만 내기 때문에 한국의 전세나 반전세 제도가 없는 미국의 월세살이는 정말 엄청나게 비싼 값을 치르며 살아야 한다. 그렇게 타운하우스라는 곳에 입장을 하게 되면 세탁기뿐만 아니라 차고를 추가로 더 얻는 경우도 있다. 물론 차고가 있고 없고에 따라서 또 월세가 달라진다. 절도 범죄가 많은 미국에서 차고는 보안 차원에서 안전한 보호막이 되어주기도 하고, 겨울철에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의 경우 매번 눈을 치우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는 아주 유용한 옵션이다. 하지만 이 차고의 유무에 따라 또 한 번 계층의 벽이 느껴진다.
타운하우스와 일반 하우스의 차이는 집과 집 사이의 간격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하우스는 이웃집과 내 집 사이에 어느 정도 떨어져 있지만 타운하우스는 집이 옆으로 쭉 붙어있다. 집의 측면 벽을 서로 공유하는지가 개인 하우스와 타운하우스 구분의 시작이다. 개인 하우스와 타운하우스의 집은 크기에 따라 가격이 다른 것은 다양하고, 그 안에 내부가 카펫으로 되어있는지 우드나 돌 같은 마감재로 되어있는지에 따라서 또 집값은 달라지게 되는데 그중에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바로 지하실의 마감 정도에 따라 집값이 또 달라진다. 베이스먼트라고 해서 그 안에 키즈룸이나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두기도 하는데 이곳이 여느 거실만큼 넓어서 상당히 중요한 공간이라고 미국 사람들은 생각한다. 또한 이 베이스먼트가 사람이 출입할 만큼 문이 설치될 수 있거나 채광이 들어오는 경우에도 가치가 부여된다. 이렇게 다양한 옵션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미국 집에 대해 알면 알 수록 재미있게 느껴진다.
수영장은 흔해
미국의 부유한 집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대부분 수영장에서 파티하는 모습이 많이 그려지는데 사실 미국 남부 집에서 수영장은 거의 기본 옵션이다. 수영장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그 집의 가치가 남부 쪽에서는 심하게 바뀌기 때문에 야드가 충분히 있는 집의 경우에는 대부분 수영장을 설치한다. 하지만 공사를 하기에 어려운 구조거나 너무 부담스러운 경우에는 야외에서 수영장을 설치할 수 있는 요상한 것들이 많이 나와있어서 이런 것들을 설치해서 즐기기도 한다.
북부 지방에는 남부만큼 수영장이 있는 집이 많지는 않다. 그 대신에 여름 기간에 오픈되는 동네 수영장이나 헬스 센터에 수영장을 이용할 수 있다. 내가 있는 지역에는 YMCA가 있어서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즐긴다. 요즘 고급 아파트에는 이러한 커뮤니티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이런 것들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지만 나는 수영장 한번 갈려면 대중교통을 타고 엄청 힘들게 갔다가 돌아오는 경험을 했던 사람으로서 이 미국의 하우스 문화가 신선하고 부럽다.
하우스의 끝
내가 미국에서 경험한 하우스 생활은 아직 극히 일부분이겠지만 그래도 소위 중산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하우스에는 곳곳에 도우미가 존재한다. 부유층이 아닌 중산층에서 이런 도우미들을 잘 활용하는 모습이 너무 인상 깊었다. 우선 하우스 청소를 해주는 도우미를 주기적으로 부른다. 아무래도 집의 크기가 크기 때문에 도우미를 활용하는 것이 시간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로도가 적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용은 한번 오는데 150불 정도 하는 것 같다. 아직 나는 그 정도 크기에 살지 않아서 그 비용을 직접 내본 적은 없다. 여기에 수영장이 있다면 수영장 청소 도우미도 추가 옵션으로 넣을 수 있다. 그리고 야드의 정원을 가꿔주는 도우미나 눈이 많이 오면 눈을 치워주는 서비스를 해주는 도우미도 있다. 가사 도우미만 알고 있던 나에게는 신세계였다. 다만 예전 미국에서는 남미 쪽 이주민들이 값싼 노동력을 제공해서 이 모든 비용이 그렇게 비싸지 않았는데 이민 정책에 따라 이런 이주민들이 넘어오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임금이 계속 상승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곳에서 이 모든 것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바라며, 아내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한마디 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