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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진 Jan 24. 2022

건축'가'를 꿈꾸는 건축'사'의
시야 넓히기

늦깎이 유학생의 프랑스 이야기.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ksjnn)

네이버에서 '길쭈욱청년'이라는 건축 일러스트레이터 한정훈 씨의 '길쭉청년'이라는 아이디를 따라한 이름으로 블로그를 운영 중인 건축사 김성진입니다. 브런치라는 매체를 이미 알고 있었고, 몇 번 시도해 보려던 것을 이제야 제 개인적인 이유와 동기와 함께 도전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미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건축에 관련된 콘텐츠, 주로 답사기를 다뤄왔었습니다만, 이 공간에서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와 다른 문체로 글을 써볼까 합니다. 


굳이 제목에서 건축가와 건축사를 구분 지은 것에 대해 의문이 있는 분이 있을 수 있을 텐데, 이것은 어느 한 명칭을 낮추고자 하는 의도는 아닙니다. 다만, 제 기준에 '건축사'는 직업적인 의미로 자격증이 있는 이를 칭하는 것이라고, '건축가'는 직업적인 것을 떠나 건축이라는 분야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를 갖춘 작가에 가까운 명칭으로 구분 지어 생각합니다. 저는 건축업에 몸담으면서 다행히 자격증까지는 취득했기에 저 스스로 건축사라고 소개할 수는 있겠으나, 아직 앞서 말한 후자와 같은 경지는 오르지 못했기에 건축가라 소개 치는 못합니다.


저는 지금 프랑스에 있습니다. 제가 스스로 정한 기준의 '건축가'가 되기 위해 약 1년 전, 이곳으로 올 결정을 내렸습니다. 처음으로 제 이야기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제가 그와 같은 결정을 하게 된 이유, 그 이야기를 조금은 길고 장황하게 하려 합니다. 어느 공간에도 그것을 정리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죠.




저는 중앙대학교의 건축학전공으로 2007년도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건축이라는 전공을 선택한 것은 어렸을 때부터 건축가에 대한 꿈, 혹은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등학교 3학년, 모두들 진로를 고민하는 그때,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 나름의 고민을 하였습니다. 이공계열 학생이었던 저는 아이러니하게 수학, 과학에 소질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언어, 영어 등의 인문학 분야가 더 재밌고 잘 맞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공계열의 다른 학생들처럼 각종 공학계열을 꿈꾸자니 경쟁력도 떨어질 뿐만 아니라 그 분야에서의 미래의 제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도중, '건축학'이라는 전공 분야를 보았을 때는 여타 다른 것과는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좋아했던 저였기에 막연하게 건축 역시 그려냄으로써 구현할 수 있는 것이지 않나라는 지나치게 공학적이지만은 않을 것 같음을 암시하는 입학 조건 등이 저의 선택을 독려했습니다. 결국 생각보다 단순하고, 깊은 고민 없이 제 진로를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막연했던 선택에 비해, 실제로 대학교에서 접한 건축 분야는 제 적성과 취향에 잘 맞았습니다. 숫자보다는 글에 가까운 학문이었고, 정확한 계산보다는 모호한 감각이 우선되는 특징이 아이러니한 이공계열 학생이었던 저에게는 운이 좋게 맞아떨어진 것이지요. 그렇게 신입생으로 1년을 보내고 학교생활이 재밌단 이유로 1년을 미룬 군입대와 함께 2학년까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시절 저는 잘 맞아서 재밌었던 기억은 있지만 열심히 몰두했던 기억은 없습니다. 아직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그 단순한 논리를 깨닫지 못해 철없던 시절이었죠.


그리고 군입대. 항상 남자들이 모이면 한다는 군 시절 얘기를 저 역시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제가 하고 싶은 이 시절 얘기는 다들 하는 무용담과는 다릅니다. 저는 제 전공 덕분에 군에서도 공병대대로 배치를 받았습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면, 전쟁이 나면 다리를 짓고, 평상시에는 부대의 건물을 짓고 보수하는 역할을 맡는 곳입니다. 제가 그곳에 배치받은 이유가 명확해지죠. 서울 소재의 대학에 재학 중이라는 명분 덕에 남들보다 몸은 편한 공사 행정병으로 배치된 저는 군대에서 일을 배웠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전화도 못 걸던 저는 하루 종일 공사업자들과 업무 통화를 해야 했습니다. 덕분에 얻은 사회 경험은 지금도 유익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중요한 이야기는 이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배치 이유 덕분에, 저는 다른 각기 다른 건축과 관련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중 한 명, 한 선임이 타대학에서 저와 같은 전공을 하던 이가 있었습니다. 같은 전공 덕에 저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고, 질문을 했던 그는 저에게 그때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충격을 주었습니다. 저에게 학교에서 무엇을 했고, 어떻게 했냐를 묻던 그는 본인이 했던 공모전에서의 수상, 심지어 군생활 당시에도 진행 중이던 작업물, 그리고 읽고 있고 혹은 읽었던 책들을 저에게 내밀었습니다. 좋아하기만 하고 열심히 할 줄을 몰랐던 저에게 좋아하면 당연히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제 인생의 변곡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군대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 이유가 다른 것입니다. 


나름 충격을 받고 돌아온 학교. 제가 받았던 그 충격 덕분에 저는 달라져 있었습니다. 집에서 한 시간 반 남짓 떨어진 학교였지만, 학교 후문 앞에 자취방을 얻었습니다. 대학생들의 아지트가 될 것을 우려했던 부모님의 걱정과는 달리 저는 자취방을 잠만 자는 침실처럼 취급했습니다. 하루 종일 학교에 마련된 설계실에서 머물다 잠이 필요할 때만 자취방에 들렀죠. 제가 할 수 있는 '열심'이었습니다. 그 한창 열심인 시절, 저는 한 건축가를 만났습니다. 신논현역 사거리 일명 '빵빵이 건물'로 유명한 '어반 하이브'의 설계자이신 건축가 '김인철'님을 제 설계수업의 교수님으로 뵈었습니다. 갓 자취방과 학교만을 오가며 지내는 한 복학생이 어여뻐 보였는지 교수님은 저를 잘 이끌어 주셨습니다. 엄청난 칭찬이나 격려를 겉으로 하진 않으셨지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고, 또 건축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개념에 대한 정립을 하는 데에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때의 인연을 시작으로 해마다 '아르키움'이라는 교수님의 사무실에 인턴을 하기도 하고,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5년제 였던 건축학과 덕분에 복학 후 3년을 더 학교에서 보내야 했지만, 마지막 학년 여름학기부터는 저는 이미 아르키움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내리 7년이라는 시간을 그곳에서 일했습니다. 일을 했다고 표현은 하지만 저에게는 그 시간은 또 한 번의 공부였습니다. 해마다 하나 이상의 건축 프로젝트를 그것도 혼자 담당하도록 기회를 주신 교수님 덕분에 배우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몇 번의 슬럼프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고, 그 덕분에 조금씩 성장했고 경험도 늘었습니다. 서두에서 말한 건축사 자격증도 결국 아르키움 생활을 하면서 취득하였습니다. 이직, 퇴사, 변업 등이 적지 않은 건축분야인데 다행히 별다른 변화 없이 꾸준했고 그 덕분에 결실도 맺었던 것입니다. 


아르키움에서의 실무 경험들

짧지 않은 경력, 그리고 국가 자격증. 이 조건은 사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부족하지 않은 조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음 단계라는 것은 자기 일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건축 설계업을 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꿈을 꿀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고유한 작업을 하는 것. 그런데 그 꿈을 실현하려다 보니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좁았던 제 '시야'입니다. 그것 덕분에, 잘 몰두할 수 있었고, 몰두한 만큼 열심히 할 수 있었기에 성과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생각하려다 보니, 아직 보지 못한 것도 많고 모르는 것도 많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주변 상황을 돌아봐도 저와 비슷한 조건을 갖춘 이들이 적지 않아 보였고, 그로 인해 누군가 저를 보았을 때, 그들보다 나아 보일지는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확신을 갖추기 위한 하나의 결정을 하였습니다.

프랑스로의 출국

아르키움에서 만나 사내커플이었던 아내. 저보다 추진력과 결단력이 좋았던 그 덕분에 그리고 함께 할 수 있다는 안정감 덕에 저와 아내는 프랑스로의 유학을 선택하였습니다. 물론 다른 여타 옵션이 많았지만, 현실적인 문제도 고려하고, 일단 성향적인 것을 따졌을 때, 저에게 남았던 선택지는 프랑스였습니다. 영어가 아닌 불어라는 전혀 배워본 적 없는 언어를 새로 익혀야 하는 리스크가 있었지만, 이왕 하는 도전이었기에 제대로 한다는 생각으로 과감히 결정했고 그 결정으로 인해 이곳에 온 지 1년이 되었습니다. 흔히들 '유학을 떠나면, 해외로 나가면, 시야가 넓어진다.'는 상투적인 말을 많이 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가 그 이야기를 똑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 좁았던 제 '시야'가 이곳에 온 지 일 년 만에 넓어지고 있음을 몸소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고 접하는 문화가 달라짐이 사람에게 얼마나 크게 영향을 끼치는 지를 증명하는 표본이 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건축적으로 보아도 우리 풍토와는 전혀 다른, 또 우리 역사와는 전혀 다른 배경에서 이뤄진 것들을 보고 있기만 하여도 제가 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곳에서의 미래의 삶이 항상 기다려집니다.


파리에 소재하고 있는 건축학교로의 지원을 얼마 전에 마치고, 이제 그 결과를 기다리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곳에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배우는 것이 만하 만족스럽지만, 본 목적은 건축을 더 배우기 위함이기에 결과가 긍정적 이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공간에 제가 겪으며 느끼는 감정고 소소한 이야기를 제 블로그와는 다르게 기록해 보려 합니다. 제 경험과 감정을 나눔으로써 다른 분들에게도 영감과 좋은 영향이 끼쳐지기를 희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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