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조와 이저
[d]azzling stranger
[u]nforgettable moments
[e]xtraordinary people
[t]one and hope
tone and hope
(8)
[이거 너 아님?]
도안의 디테일을 잡던 단조가 모니터에 뜨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또 시작이었다. 체념한 얼굴로 답장을 입력하는데 연달아 메시지가 도착했다.
[카메라 마사지 어땠음]
"혈액 순환 잘되라고 열받게 하는 건가?"
단조는 동기에게, 축하 파티 열어줄 거 아니면 조용히 하라는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는 책상 위로 이마를 떨어뜨렸다. 장시간 작업으로 어깨가 뻐근하고 몸도 무거웠다. 옆으로 돌아간 고개가 짓눌렸다.
"괜찮아. 쪽팔림? 일주일이면 사라져."
지금 느끼는 창피함도 자의식 과잉에 가까울 거라고 단조는 생각했다. 살면서 좋은 경험했다고 치자, 이미 오백 번도 더한 합리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맞은편 거울을 보자 그런 생각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세로로 길쭉한 거울을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밑에 받쳐놓은 화분들이 보였다. 화분에는 '축 개업'이라는 축하 리본이 달려 있었다. 그 옆 화분도 비슷한 모양의 리본을 달고 있었는데 문구가 달랐다. 궁서체로 적힌 네 글자는 다시 한번 단조의 성질을 긁고야 말았다.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발음했다.
"'엔 딩 요 정.'"
누가 봐도 멕이는 건데.
자못 심각한 이저의 얼굴 뒤로 카메라 셔터 소리와 플래시가 쉼 없이 몰아쳤다. 고즈넉한 마을에 낯선 차들이 몰리고 외지인들이 어슬렁대니 동네가 전반적으로 어수선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나와 봤던 이장과 동네 주민들이 이제는 한자리씩 터를 잡고 앉았다. 취재진들이 띄엄띄엄 본인들의 구역을 지키듯 저마다 보도 화면을 촬영했다. 단조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현장을 뜨려는데 이저가 그를 붙잡았다.
"어디를 가시려고."
"전 나중에 유튜브로 볼래요."
"아니, 우리가 뭘 보고 있는지 알아요?"
단조가 주변을 슥 훑었다.
"촬영 현장의 열기?"
"그런 모범적인 답변 말고요."
"운석?"
답답하다는 듯 이저가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가 먼저 알았잖아요. 그때 우리가 들었던 굉음이 가짜가 아니었다고요."
진짜였다. 단조와 이저가 굉음을 듣고 마을을 헤매던 날 운석이 떨어졌다. 운석은 누가 운석이라고 알려주지 않으면 평범한 돌이겠거니 하고 지나칠 모양이었다. 검은빛이 감돌기는 했지만 논이나 흙바닥 한가운데에 있으면 저게 무슨 운석이냐고 코웃음칠 만한 크기이기도 했다.
"사실대로 말할 건 아니죠?"
단조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말 안 해요. 그런데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아요."
무슨 확인이냐며 그를 다급하게 돌려세우려는데 그들 뒤에서 불쑥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뭐 있어요? 뭔데 둘이만 서로 속삭이고 있어?"
이장이 두 사람을 흥미로운 눈으로 관찰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흔한 말로 관심을 돌리려던 단조의 노력이 무색하게 이저가 발빠른 질문을 던졌다.
"이장님. 요근래 이상한 소리 못 들으셨어요?"
"이상한 소리요? 예를 들면?"
"집이 쪼개지는 것 같은 굉음. 그런 거요."
지난 일상을 돌아보느라 이장의 눈매가 가늘게 접혔다.
"아무것도 못 들으셨죠?!"
뜸들이는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지자 그를 지켜보던 단조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러자 이장은, 혹시 그 소리를 말하는 거냐고 했다.
이저는 그저 단조와 본인만 굉음을 들은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남들은 듣지 못한 데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나름의 이유를 추리하다 보면 재미있는 연관성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저는 본인과 단조를 일컬어 '선택받은 자들'이라는 임시적인 결론을 짓는 데 이르렀다. 뭘 선택받았는지 모른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살면서 이런 신묘한 컨셉에 한 번쯤은 몰입하고 싶었다.
"저어 밑에 내려가면 항공기 훈련한다고 시끌시끌해요. 군 항공기 소음 말하는 것 같은데? 우리 마을도 지나가거든. 안 그래도 어르신들이 귀청 떨어진다고 입술이 여까지 나왔어."
이장이 입술을 바깥으로 내밀더니 손으로 발끝을 가리켰다. 불만의 목소리가 꾸준하게 나오는 모양이었다. 겉보기에는 조용조용한데 들여다보면 시끄러운 게 영락없는 사람 사는 동네였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따르기 때문이었다.
어지럽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 놓이면 급격하게 체력이 방전되는 단조는 길바닥에라도 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방송국 로고가 담긴 차량들이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더더욱 집에 가고 싶었다.
단조는 그날의 굉음이 본인과 이저에게만 들렸으리라고 확신했다. 확신은 럭키로 설명이 가능했다. 누가 봐도 지구 생명체가 아닌 럭키를 두 사람이 손수 우주로 돌려보내기까지 했다. 이보다 더한 확신이 어디 있겠는가.
이장은 마을의 대표였으니 자연스레 인터뷰의 적임자로 발탁됐지만 단지 그의 옆에 서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단조는 인터뷰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거절이라는 선택지가 있었지만 승낙을 고른 이유는 순전히 이저 때문이었다. 이저가 취재진에게 말도 안 되는 말을 흘리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취재진의 관심은 운석보다 굉음, 더 나아가 럭키에게까지 뻗어갈 텐데 도저히 그거까지는 감당할 수 없었다. 럭키 일은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는 약속을 한 이상 웬만하면 이저도 굳게 입을 닫겠지만 말이다.
"운석이 떨어지던 날에 혹시 특이점은 없었나요?"
"평소랑 똑같은 하루였어요. 운석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니까 신기하고, 얼떨떨하네요."
인물 조명이 하얀 거짓말처럼 단조를 비추었다.
어느 한 전문가가 말하길, 운석이 떨어지면서 나온 잔해들이 아직 주변에 남아있을 거라고 했다. 그야말로 안 긁은 복권이 도처에 즐비하단 소리였다. 일반인이 눈으로 구별하기 힘들다는 점 빼고는 너도나도 도전해볼 만한 기회였다. 운석은 한동안 포털사이트 메인을 달구는 화젯거리였다. 돌멩이 하나에 머리가 핑핑 도는 숫자들이 오간다는 자극적인 콘텐츠가 쏟아진 탓에 자작극을 벌이거나 괴담을 만드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혹시 내가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주운 돌멩이가 운석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은 우리가 익히 아는 감정이었다. 막연함은 형체를 지니지 않아 두려웠지만, 가늠할 수 없어 두렵지 않기도 했다.
그보다 오싹한 건 인터넷에 퍼지는 단조의 모습이었다. 운석 보도는 틈만 나면 자료화면으로 재탕됐다. 덕분에 그의 인터뷰는 박제된 듯 온라인에 전시됐다. 멀끔한 행색이었어도 부끄러울 판인데, 누가 봐도 집에 있다 나온 모습이어서 민망함은 배가 됐다. 그걸 본 동창들이 꾸역꾸역 연락을 시도해왔다. 작곡 그만뒀다더니 거기서 뭐하고 있냐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작곡을 그만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몰라도 15년 전에 연락이 끊긴 친구들까지 안부를 물었다.
반면 이모는 단조의 근황을 자세히 모르는 듯했다. 꾀죄죄한 인터뷰 화면을 봤다면 이미 놀리고도 남았을 텐데 본인이 먹은 레몬 셔벗이나 자랑하고 있는 걸 보면 아직 모르는 게 확실했다. 이모는 단조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본인 자랑만 늘어놨다. 포지타노 해변의 아름다움을 수십 장의 사진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젊은 애들 체력이면 모를까 염병할 계단은 또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해변이 코앞에 있는데 계단을 오르내려도 끝이 안 보였다면서, 이것이 정녕 휴식인가 훈련인가 고민했다고 이모는 전했다. 해변 근처 숙소에서 이틀 정도 더 머물 건데 남은 시간 동안 데이트를 할 거라며 웃는 이모지를 보내왔다. 누구랑 데이트하냐고 물으니, 윙크 이모지와 쉿! 이모지가 잇달아 나타났다.
가오픈으로 시행착오를 겪는 첫 주가 시작됐다. 방송을 보고 어김없이 연락한 윤의 타투 작업이 바로 내일이었다.
[친구랑 같이 가도 될까요! 파란색 모자 쓴 애 기억하시죠?]
마지막으로 받은 윤의 메시지였다. 안 될 건 없었으니 그러라고 답장한 뒤, 단조는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그런데 실망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일까. 단조는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잡념이 떠다니면 명상을 하라는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스피커에서는 호흡을 가다듬으라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것까지는 쉬웠는데 잡념을 인지하고 천천히 밀어내는 건 쉽지 않았다. 이제는 신체의 일부가 되어버린 수상한 '점'도 잡념에 포함이었다. 단조는 눈을 뜨지 말아야 할 타이밍에 눈꺼풀을 열고 다리를 확인했다.
물 한 잔으로 정신을 깨운 단조는 거실 창문을 열었다. 서늘한 공기가 손님처럼 들어왔다. 그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서서히 숨을 밀어냈다.
피부에 남은 까만 온점.
럭키가 남긴 마침표인지,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인지 도통 감이 안 잡혔다.
오랫동안 골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저는 런던 출장을 앞두고 1인용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보는 시간이 늘었다. 얼마 전 정류장에 탄소 온열 의자가 들어오면서 갈곳을 잃은 소파는 자연스럽게 이저네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몇 개월이 걸려서 낙후된 정류장이 좋아졌으니 다음 변화를 위해서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여전히 그대로인 것도 있었다. 그는 지금도 개운하게 기상하지 못하고, 좋아하는 일에 약간의 권태로움을 느끼며, 떠날 마음이 없으면서도 떠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상한 행운이 삶에 거대한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타인이 갖지 못한 시간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펴졌다. 두려움으로 작아지던 마음의 방에 갇히는 날도 오겠지만 이저는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나민이 별자리를 알려주던 밤이 떠올랐다. 수능을 치른 이저와 나민이 고삐 풀린 일상을 보내던 시절. 그 날은 예정대로라면 나민의 계획대로 옆 동네에 넘어가 자전거를 탈 생각이었다. 칼바람이 부는데 웬 자전거냐고 이저가 대꾸하자, 나민은 그냥 잔말 말고 따라오라 했다. 하지만 눈이 내려도 너무 내려서 모든 계획이 무산됐다. 나민은 굴하지 않고 이저를 불러내 폭설로 뒤덮인 길을 앞장섰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가르며 걷는데도 나민은 지친 기색조차 없었다. 둘은 간격을 두고 걸었다. 나민은 이저가 걷기 편하도록 눈길을 넓혀두었다. 뒤를 따르는 이저 주변으로 뽀득뽀득 기분 좋은 소리가 따라붙었다.
‘땅만 보고 걷지 말고 위도 좀 보라고!’
‘눈이 이렇게 내리는데 어떻게 보라고!’
나민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이저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었더라. 목적을 잊을 만큼 아름다운 설경을 두고 이저는 자꾸만 나민을 돌아봤다. 둘이 24시간 카페에서 언 몸을 녹이는 동안 눈은 멈췄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민은 내일 다시 나와야겠다며 선전포고했다. 다음날, 둘은 인적 드문 공터에서 별자리를 구경했다.
서로 같은 곳을 보는 것만으로 춥지 않던 계절이었다. 또 어느 별자리를 아냐고 물어나 볼 걸. 결국에는 듣고 까먹을지라도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어줄 걸.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인생을 살면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고 들었다.
어쩌면 운석을 발견할 확률보다 희박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운석을 보고 소원을 빈다고 했다. 단조도 소원을 빌었을까?
"그런 거 다 미신이라고 그러는 거 아냐?"
이저는 뒤늦게나마 소원을 빌었다.
먼발치에서 밀어낸 계절이 잊지 않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