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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에서 해찰하다

이탈리아여행

by 배심온

해찰하다.

여행 중에 새로 알게 된 말이다.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일이나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뜻이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이것저것 들여다보고, 시간을 지체할 때 가차 없이 "해찰 그만하고 빨리 갑시다" 하는 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주로 야생화나 작은 꽃들을 만나면 다들 해찰을 한다. 아직도 모르는 말들이 있고, 새로운 걸 배우는 건 재미있다.


세 달 여행 중 가장 해찰을 많이 한 곳을 꼽으라면 단연 폼페이다.


소렌토에서 폼페이를 거쳐서 나폴리로 가야 하니 거대한 케리어가 문제다. 다행히 폼페이 국립공원 안에 케리어를 맡아주는 곳이 있다는 정보를 믿고, 23kg의 케리어를 끌고 이동을 한다. 허벅지를 지지대로 삼고, 한쪽 손은 계단의 손잡이를 잡은 채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그야말로 몸이 휘청거린다. 이렇게 도시 이동을 한 날은 많이 피곤하다.


어마어마한 인파를 뚫고 케리어를 보관해 주는 곳까지 찾아가는 길은 여행 중 최악의 난코스였다. 어떤 분은 케리어를 가지고 폼페이 여행을 하는 건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라고 충고를 하고 지나간다. 우리도 케리어를 맡길 거니까 그분의 충고는 맞고, 거기가 어딘지를 찾아야 했다. 사설로 운영하는 곳은 꽤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고, 2층에 있어서 케리어를 끌고 다시 계단을 오를 수는 없었다. 언니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폼페이 국립공원에 입장하면 그 안에 무료로 케리어를 맡아주는 곳이 있다는 걸 찾아낸다. 네 개의 케리어를 맡기고, 점심 도시락이 든 배낭만 메고, 폼페이 국립공원으로 들어간다.


20년 전 아이들과 패키지여행으로 왔던 기억이 난다. 돌멩이에 움푹 파인 마차 흔적, 공동 식수시설, 오물을 밞지 않게 만들어놓은 징검다리, 부잣집을 지키는 사납게 생긴 모자이크 개, 길거리에서 음식을 팔았던 화덕, 매춘이 이루어졌던 집, 커다란 남성의 성기를 벽면에 그려서 자신의 힘을 과시한 집, 프레스코화로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을 그려 넣은 선거홍보 벽면 등등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고 화려한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지하에 갇혀있던 폼페이는 150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인구 2만 명, 로마의 휴양지로 번성했던 고대 도시는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발굴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당시 폼페이 사람들의 형체는 석고상이다. 발굴 책임자가 완벽하게 남아있는 도시 흔적에 사람만 보이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기던 차에 여기저기 뚫려있는 구멍을 발견하고, 그곳에 석고 반죽을 부어 넣었단다. 화산으로 파묻힌 사람들은 이미 재가 되어버리고 비어있던 공간은 석고틀이 되어, 죽는 순간의 모습 그대로 석고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부둥켜안은 연인, 아이를 보호하는 모정, 혼자 발버둥 치는 개 등 우리가 지금 당장 '그대로 멈춰'라고 하면 보일 포즈들이다.


사람이 증발한 채 비어있는 과거의 도시 공간에는 꽃들이 싱그럽게 피어나고 있었다. 허물어진 벽들 사이사이에서 그들은 선명하게 살아있다.


나는 폼페이에서 끊임없이 해찰한다.


2025년 4월 16일 폼페이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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