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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imeSpace Aug 20. 2021

파우스트, 읽고 마시기

공부하는 삶의 즐거움

  대학 동기들과 홍대에 놀러 가서 처음으로 칵테을 마신 기억 꺼내본다. 메뉴판에는 정체 모를 이름의 술잔뜩 있었다. 처음만큼 칵테일 선정은 신중 이뤄졌다. 오랜 고민 끝에 결국 이름이 예쁜 블루 사파이어를 주문했다. 짐작했던 대로 색깔도 예뻤다.

  그게 다였다. 도수도 기대치보다 낮고 마냥 달기만 했다. 그 맛도 기억이 안 나고 여태껏 단 한 번도 찾지 않은 걸 보면 만족스러운 출발은 아니었나 보다. 테이블 맞은편에 있던 형의 파우스트를 한 모금 얻어 마셨던 일이 기억에 선명하다. 납작한 스트로를 타고 올라온 알코올의 확산이 처음 그리 반갑지가 않았다. 하지만 얼음 층이 녹으며 함의 단계적인 매력 풍겨왔다. 이것이 파우스트와의 첫 만남이다.

  칵테일 바에 갈 일이 생기면 매번 다른 종류의 칵테일을 시도해 본다. 그러나 도수 높은 술이 필요 땐 파우스트를 주문다. 이미 마음 한 편에 파우스트의 자리가 있었나 보다. 다른 술과 달리 특별함을 주는 것은 단지 향이나 색 같은 감각적인(혹은 경험적인, 외적인) 원인 때문만은 아라고 본다. 그것에 끌리는 다른 이유를 찾고 싶었다. 파우스트의 본질에 다가가고 다. 단순히 좋아하는 술이 아닌, 진지하게 음미해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Faust'는 '주먹'의 독일어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하필 도수 높은 술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레시피도 찾아보았다. 오버 프루프 럼, 화이트 럼, 카시스를 각각 1 : 1 : 0.5의 비율로 섞는다. 카시스는 파우스트의 비주얼을 담당한다. 오버 프루프 럼으로는 바카디 151이라는 술을 주로 사용한다. 도수가 매우 높은 이 술은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워 말리부로 대체해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내가 지금껏 마신 파우스트는 모두 말리부를 이용했다. 오버 프루프가 첨가된 것을 마셔보고 싶다. 그리고 이왕이면 독일에 가 실력 좋은 바텐더가 만든 것을 마시고 싶다.


  우스트의 기원은 확실하지는 않으나, 괴테의 역작 《파우스트》의 주인공 파우스트가 마시려던 독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니 칵테일 파우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책 《파우스트》를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파우스트를 음미하기 위해 《파우스트》를 읽었을 뿐인데, 이제는 괴테의 《파우스트》마음이 향다.


  내가 읽 것은 변역 된 책이다. 괴테는 그의 생각을 독일어로 적었는데, 나는 한국어로 읽다. 옮긴이의 번역 능력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서로 다른 언어를 통과할 때 보는 될 수밖에 없고 생각한다. 《파우스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후에  Hirschberger의 《서양철학사》를 읽. 읽으며, 지식이 없을 때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파우스트》 구절 철학적 함의들이 꽤 많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서양철학사 전반을 훑으니 지난 3개월 간 《파우스트》를 직접 읽지 않았는데도, 머릿속에 형성된 지식의 net 테의 문장을 하나씩 다시 꺼내어 예술적 가치  재평가했. 럼에도 분명 아직까지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 많을 게다. 내가 괴테가 되지 않는 이상, 그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아쉬운 대로 독일어 공부 시작했다.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민족의 문화, 역사, 사상 등을 함축하는 수단이라고 생각. 그래서 이 사소한 노력은 한국어로 읽을 때에 비해 괴테의 의도를 더 잘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 믿는다.

  또한 부하려는 분야를 조금 더 넓히기로 했다. 리나라에 특히나 만연한 기조, 즉 문과 지식, 이과 지식 혹은 예체능 지식을 분류하고 편 가르기 하는 일은 도무지 쓸모가 없. 양한 경험을 기반으로 해 형성된 다양한 시선은 한 가지 관찰 사실을 여러 의미로 해석해보는 즐거움을 준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텔레스, Eugène Delacroix (1798–1863)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사유 활동을 하다 보면 눈앞에 잘 다듬어진 길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 길을 따라가 보면 새로운 발견에 목마른 자를 위한 오아시스가 있을 것만 같다. 길을 따라 걷는다. 이 길은 오직 나를 위해 다듬어진 것만 같다. 하지만 길을 어느 정도 걷다 보면 착 상태에 이른 모험가들을 만나게 된다. 사실 이 길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 자연스레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어리석은 혹은 슬기로운 것을 생각해낸들
모름지기 선인들이 기왕에 생각지 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네놈도 얼마나 마음리 쓰리겠나-

괴테, 《파우스트》, 민음사, 6808-6810 행.


   사실을 아는 순간 허무함과 회의를 느낀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머나먼 여행을 떠났는데, 길을 걸으며 주운 것은 '이미 이해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왜 문제가 되는가?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길 위에 올랐고, 필요한 것을 발견해 주웠는데 말이다. 사람은 자신만의 이해 방식을 찾지 못하는 한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여행을 지속하려는 것 같다.


  모든 길은 한 가지의 목적지로 향한다. 혹자는 예수, 싯다르타, 칸트, 니체라는 등의 이름을 가진 사람을 인도자로 내세워 따라가려 한다. 방법은 조금 다를지라도 그들 역시 사람이고, 같은 것을 원한다. 서로 다른 길 위에 있는 사람은 중간에 길을 개통해 만날 수야 있겠지만 모두가 목적지에 도달해 서로를 축하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되려 저편에 있는 모험자를 헐뜯기에 바쁘다.


  '철학을 한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내게 철학을 한다는 말은 이해를 줍는다는 뜻이다. 그렇게 주운 이해를 바탕으로 사유하고 사상을 구축하는 일은 조금 더 수준 높은 일이다.

  나는 지금 '물리학, 철학 이중 전공'이라는 프로필을 보유하고 있다. 이 분명 멋진 성취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나를 '물리학자', '철학자' 또는 '철학하는 사람'이라고 불러준다면 분명 기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목표하는 것은 오히려 이 타이틀에 관심을 두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물리학자', '철학자'라는 호칭을 는 것이 아니다. 파우스트를 잘 음미하고 괴테의 《파우스트》를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이렇게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관찰하고 해석하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삶이 최고의 선이다.


  지식의 역사는 되풀이될지 몰라도, 개인에게 축적된 그 지식들은 상호 보완하며 발전한다. 전은 분명히 있다. 그 결과는 편의 향상,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능력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모든 인류에게 득이 되는 발전을 이룩하면야 좋겠지만, 설령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내면의 발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한 번 사는 인생이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그 시대에 있어서
훌륭한 사나이가 되는 것도 나쁠 것은 없지 않나요.

괴테, 《파우스트》, 민음사, 8333-8334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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