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갸륵한 인생들과 함께 살아갈만할 것 같다.
#KTX투신자살
엊그제 중요한 미팅이 있어 아침부터 부랴부랴 KTX를 타러 갔는데, 역사 내 전광판이 요란했다. 아침에 누군가 선로에 뛰어들어 사망사고가 발생했댄다. 플랫폼에 주저앉아 무기한 지연되는 열차를 기다리는 수많은 이들의 원성이, 뜨거운 여름날의 뙤약볕보다 뜨거웠다. 나도 물론 미팅에 지각했다.
짜증도 났지만, 아무렴 이유가 있겠지, 하고 며칠 뒤 기사를 찾아봤다. 자살로 추정한다는 것 외에는 사망자에 대한 내용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저 1호선과 KTX 지연에 대한 비난만이 가득했다. 대부분 “죽을 거면 곱게 죽지, 왜 남에게 피해를 주고 난리냐.”는 반응이었다.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궁금한 사람이 이 우주에 나 하나뿐인 것 같았다. 남에게 피해를 줬으니, 사연을 들을 가치가 없다는 걸까, 생각이 복잡했다.
#전장연시위
서울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이들 중 전장연 시위로 지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나 또한 며칠 전 여의도 거리 시위로 중요한 식사 자리에 늦었다. 그나마 식사자리였으니 크게 문제 되진 않았으나, 최근 인터넷에는 가족이나 지인의 임종을 지켜야 하는데 전장연의 시위 때문에 가지 못해 울부짖는 이의 영상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자막에는 ‘장애인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닙니다.’라고 쓰여있었다.
전장연의 시위 목적은 잘 알고 있다. 시위 방식에 대해서는 종종 불만을 제기하고 싶을 때가 있긴 하지만, 자극적이고 직관적인 방법이 아니면 아무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게 내 가족, 내 친구, 그리고 나의 이야기가 언제든 될 수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만약에, 그날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게 나라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DP2 (스포주의)
어제는 잠깐 쉬면서 넷플릭스에서 D.P 2를 보고 있는데 군대에서 폭행과 괴롭힘을 심하게 받던 피해자가 가해자를 살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드라마의 맥락은 가해자를 살해한 피해자에게 그에 걸맞은 벌을 받되, 군대 내 괴롭힘의 심각성을 해결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피해자가 가해자를 살해하지 않았다면, 문제는 해결됐을까? 해결하려는 시도조차 했을까? 그럼 살해된 가해자는 죽어 마땅했나? 사람에게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나?
#그래서내생각은
억울하지 않은 인생이 없고, 가엾지 않은 인생이 없는데, 순식간에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가 되는, 이 혼란한 사회에서 나는 어떤 약자를 옹호해야 하는 지 마음이 늘 복잡하다.
세상엔 명백한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를 수 있는 일보다, 약간의 기울어짐으로 마침내 기울어지고 마는 시소 같은 일로 가득 차있다. 49:51이건 1:99이건 부등호는 달라지지 않는다. 과연 51의 편을 드는 것이 옳은 것이 맞는지, 49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은 옳은 지, 조약돌 하나만 떨어져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이 수많은 일들에 어떤 기준을 가지며 살아가야 할지 어렵기만 하다.
우리는 약자라고 부르는 이들의 입장을 어디까지 배려하고 양보해야 할까. 그들의 비통한 삶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평생 장애우, 혹은 장애우의 가족, 집단 괴롭힘의 피해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있는가. 그들의 저항과 울부짖음이 우리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 게 옳을까. 사실 너무 민감한 문제라 이 글에서 정답을 얘기하기가 참 난감하다.
내 글이 정답을 주는 글이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한참 부족한 인간이라, 내가 사랑하는 한 드라마의 장면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싶다.
#슬기로운의사생활 (스포주의)
전 국민이 사랑했던 이 따뜻한 드라마에서 특히 모두가 함께 숨죽여 울었던 장면이 있다. 외래진료를 온 수많은 산모들이 지나친 기다림에 불평하던 중, 진료실 안쪽에서 아이를 잃은 산모의 울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모두가 한마음으로 불평을 멈추고 유산한 산모의 울음이 그치기를 다 같이 기다렸다. 그 마음, 나는 함께 울어주던 그 마음이면 될 거 같다. 여기까진 괜찮고, 여기부턴 안 되는 기준을 내릴 자신은 없는데, 이 정도 마음이면 나를 비롯한 갸륵한 인생들과 함께 살아갈 만할 것도 같다.
삶이 매번 감성적일 순 없으나, 서로를 측은히 여기며 가끔은 울며 함께 기다려줄 수 있는 마음이 더불어 살아가는 일의 비결이지 않을까, 아주 조심스럽게 얘기해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