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낮고, 느리게
“따지고 보면 나라는 인간 자체가 장소의 산물이다.
태어난 장소, 살았던 장소, 공부를 했던 장소,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해준 장소 등을 떠올리자
거기에서 또 다른 기억들이 떠올랐다.
나의 사고방식, 행동양식 등 모든 것이 장소에 깊이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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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나 또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점이다.
사람들의 기억의 시작은 늘
장소로부터 시작된다.
결코 떼놓을 수 없는 기억의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내가 장소에 대한 애틋함을 자각했던 것은
고등학교 시절, 10대를 함께 보낸
오랜 집을 떠났을 때였다.
그 집은 내게 여전히 사무치게 그립고,
너무나 애정하는 공간이다.
나의 성장기 시절,
집 안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숨바꼭질을 하고
더운 여름날이면
시원한 대리석 복도에 누워서 잠을 자고
베란다에서 키우던 텃밭을 엄마와 가꾸며
친구들과 물장난을 치기도 하고
현관문 앞에서 텐트 치고 놀거나
고등학교 친구들 전부 불러서 반모를 하거나
그렇게 방, 주방, 베란다, 옷장 안 등
세세한 집 안의 모든 공간에서
가족 또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수 없이 셀 수 없는 크고 작은
기억의 조각들이 존재했고
그러한 공간의 경험들이 모여
현재의 나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 삶이 투영된 희로애락이 담긴
그 집을 떠나오고서 많은 것을 느꼈다.
실제 고등학교 입시 시절 자기소개서에도
장소성에 애틋한 마음을 드러내며 이 집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냈었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추억의 장소로 이루어진
소중한 공간이 있듯이 내게 가장 소중한 공간은
이 집이었다.
house와 home의 차이를 들여다보면
house는 집이 단순히 ‘물리적인 건물’
이라는 뜻을 갖고 있지만
home은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곳’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단순한 건물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
공간의 따뜻함과 소중함을 알려준 것과 동시에
건축 디자이너라는 꿈을 갖게 되었던 계기였다.
구마겐고, 대학 수업 때 듣고 배웠던 기억이 있지만
그가 정확하게 어떤 사유를 하는
건축가인지는 알지 못했다.
실제로 그의 공간을 마주해 본 것은 2017년 여름,
일본 후쿠오카에서였다.
목조 구조의 스타벅스 커피
다자이후 덴만구 오모테산도점.
©Starbucks
목재라는 작은 단편들이 모여 전체를 이룬 모습.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허물듯 짜임식 목조 구조로
벽과 천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는 구마겐고의 건축물들 중
치도리 패턴을 사용한 예이다.
구마겐고는 조각들을 서로 엮어 끼워 맞추는 방식의
일종의 나무 쌓기 놀이인 목재 장난감,
치도리(CIDORI)라는 것을 건축에
응용한 것이라 서술한다.
치도리는 ‘수많은 새’라는 뜻이다.
그는 작은 단편들이 모여
건축이라는 거대한 전체를 이루는 것이
그의 이상이라고 한다.
즉, 새들이 일정한 간격을 이루며 무리 지어 날아가는
모습을 그리며 새라는 작은 단편들을
상상했다는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그의 건축적 신념과
맞닿은 재료로 쓰인 목구조 형식.
실제로 목도했을 때 선적인 언어들이
강렬해서 강한 인상을 남겨주긴 했지만,
자연적 소재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각선형의 직조 방식 때문인지
자연으로부터 오는 아늑함, 편안함의
감정들로부터는 다소 거리감이 있었다.
“도시에 빛이 있고 바람이 불며
비가 내리고 이웃이 있다.
그것만으로 자연이 충분히 존재한다는 의미다.
모든 장소에 자연은 넘친다.
그것이 장소에 대한 나의 기본자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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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장소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하는 건축가,
구마겐고.
이러한 그의 사유도 반추하지만
내겐 너무나 어려운 부정적 시선을 가져야 하는
자세도 일깨워 주었다.
그는 현상을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부하는 자세. 그것이 내게 부족하고 필요한 것이다.
그 거부하는 자세로부터 무엇인가 새로운 것,
여태껏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에서 유의 존재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라고.
구마겐고는 지금도 디자인을 할 때 본인의
기본적 자세가 ‘No’라고 한다.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며
부정을 외치는 자세가 중요하다며.
처음 게시물에도 언급했듯이
브런치 글을 쓰게 된 계기도
부정적인 시선과 생각을 고찰할 수 있는,
그렇게 나의 건축적 사유를 만들어가고자였다.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공감할 수 없었던 내용이 있었다.
20세기 불멸의 건축의 이룬
르꼬르뷔지에, 미스반데어로에 대가들에 대한
구마겐고의 부정적 시선들.
그들은 오늘날의 건축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개념들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선 반론의 감정이 생겨났다.
어쩌면 구마겐고가 주장했던 부정하는 자세가
대가들의 건축에 대해서도 그의 그런 시선이
드러난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전반적으로 그의 성장 배경과 지난 날들,
사회적 배경을 중심으로 건축가의 삶에 영향을 주었던 것들로부터 이야기가 탄생한다.
그의 건축적 세계는 증축적이며, 반유토피아적이며
생각보다 더욱 검소한 사상을 볼 수 있다.
끝맺음처럼 작은 건축을 지향하는 사람.
작고, 낮고, 느리게.
구마겐고는 끝맺음을 이렇게 말한다.
‘나‘라는 확고한 존재는 없다.
수많은 ‘작은 것’들이 모여 있는 것이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