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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Apr 23.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03)

제103편 : 이덕규 시인의 '자서'

@. 오늘은 이덕규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자서(自序)
                           이덕규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 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 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 올린다.
  -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2022년)

  #. 이덕규 시인(1961년생) :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1998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원래 직업은 토목기사이나 현재 고향인 화성으로 돌아와 농사짓는데, 전문농사꾼이 아니면서도 그 솜씨는 농사꾼을 능가한다는 평을 들음. 그래서 자신을 소개할 때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시 농사도 짓는 사람’이라 함




  <함께 나누기>

  우선 이 시에 대하여 먼저 설명을 덧붙인 뒤 이어가겠습니다. 오늘 시(?)는 시집 속에 들어있지만 정식 시가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시인이 2022년에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란 제목의 시집을 펴냈는데, 시집 맨 앞 실린 자서(自序)에 나온 글입니다.
  그러니까 시집 서문이란 말이지요. 서문이지만 시처럼 쓰였고, 그 내용이 다른 시보다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시인이 젊은 시절 어렵게 살 때 겪은 일을 서문으로 올렸지 싶은데 담긴 내용이 사람을 끌어당깁니다.


  아는 이에게 들은 얘깁니다. 그가 고교 동기회에 갔다가 한 벗을 만나 얘기 나누다 동기가 문득 아주 오래 전 있었던 얘기를 꺼냈답니다. 동기가 취업 문제로 걱정하다 먼저 취직한 그에게 도움을 청하려 갔는데 그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냥 점심 한 그릇 사줬던가 봅니다.
  동기는 그때 고마움을 얘기하였지만 사실 그는 전혀 기억나지 않아 그런 말을 들었지만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 그렇지요, 친구가 찾아왔는데 점심 한 끼 대접함은 당연한 일, 그러니까 기억에 담아둘 내용이 아니었지요.
  허나 동기에겐 그렇지 않았던가 봅니다. 취업이 안 돼 부모님은 걱정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나 별 뾰족한 수 없어 그냥 들른 친구 직장. 거기서 얻어먹은 한 끼 점심. 베푼 사람은 잊었으나 별것 아닌 한 끼가 준 따뜻함이 동기에겐 남았다고...

  시로 들어갑니다.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래서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란 표현을 했겠지요. 어쩌면 자기 호주머니를 뒤지려 온 도둑으로 여겼을 듯. 비록 노숙자처럼 누워 있었지만 '거지에게도 훔쳐갈 게 있다'는 속담이 생각났을 지도.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 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단순히 그때 사실을 서술하듯이 기록했더라면 시라고 하기 어려웠을 테고, 시라 하더라도 좋은 시는 되지 못했을 겁니다. 헌데 ‘날 선 칼 한 자루’ ‘맑은 눈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 이런 표현이 이 시를 읽게 만듭니다.

  그리고 당연히 진짜 칼 한 자루 품고 산다는 말은 아니지요. 이때의 칼은 ‘세상에 대한 반감’ 같은 것 아닐까요. ‘맑은 눈물’은 절로 흘러나오는 눈물이니 그만큼 힘들게 산다는 뜻이 되겠고, 이런 게 모여 무량한(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허기가 됩니다.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도둑이 손 넣은 줄 알았는데 아침에 일어나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뜻밖에 오천 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습니다. 그 돈이 아주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화자로 하여금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까요.
  원뜻은 그 돈으로 청춘 시절을 무사히 지나왔고, 그 돈을 밑천으로 잘 먹고 잘 산다는 뜻이지만, 여기에 함축성이 담겼습니다. 그때 받은 베풂의 정으로 세상이 흐리기만 하지 않고 맑기도 하다는 점을 깨달아, 화자도 그렇게 하면서 살아왔다는 뜻으로 봅니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 올린다”
  그 어른의 주소는 모릅니다. 허나 그 어른이 베푼 작은(?) 은정은 한 사람 가슴에 아주 큰 사랑으로 남았습니다. 이번에 펴내는 시집은 바로 그 은공에 대한 보답으로 그런 마음을 담아 노래했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 노숙자에 베푼 일이 어떤 결과를 낳는가를 보여주는 영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pF5E4AL1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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