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힐 때 흙도 놀란다 쟁기 삽 괭이 호미 쇠스랑 포클레인… 누가 제일 먼저 괭잇날에 묻은 비명을 보았을까 낯빛이 창백한, 눈이 휘둥그런
겨냥한 곳은 흙의 정수리거나 잠든 미간이거나,
흙의 표정을 발견한 누군가의 첫 생각, 그때 국어사전에 놀란흙이라는 명사가 버젓이 올라갔다
흙의 살붙이, 지렁이 땅강아지 개미 두더지 그것들이 가랑이를 헤집어 집을 짓고 길을 내도 놀라지 않는다 나무뿌리, 바위뿌리에도 덤덤한 흙이 사람만 보면 왜 그리 놀라는지,
흙의 나라 태초에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을 닮은 흙의 심장은 사람을 잘 알고 있다 공사장 주변, 포클레인이 파헤친 땅 매장된 산업폐기물을 껴안고 까맣게 죽어있었다 싱싱하던 흙빛은 흑빛이었다
소심하고 겁 많은 아버지는 흙집으로 들어가 더는 놀라지 않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래서 자주 놀란다. - [사물의 입](2016년)
#. 마경덕 시인(1954년생) : 전남 여수 출신으로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쉰 살이란 늦은 나이로 등단했지만 현재 서울에 살며 여러 문예 강좌에 나가 시 창작 강사로 활동 (혹 이름만으로 오해할까 봐 미리 여성 시인임을 밝힙니다)
<함께 나누기>
정식농부 아닌 저같은 텃밭농부에게 가장 힘든 농사일이 뭐냐 물으면 삽질이라고 대답하렵니다. 물론 괭이질 호미질 쟁기질도 삽질 못지않게 힘듭니다. 이들 일에 공통점 있지요. 바로 땅을 파헤친다는 점. 오늘 시 제목 ‘놀란흙’을 보자 어느 지역 사투리이거나 시인이 창조한 말이라 여겼습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으니까요. 그러다 시 속에 “국어사전에 놀란흙이라는 명사가 버젓이 올라갔다”는 시행을 보는 순간 얼른 사전을 뒤졌습니다. 정말 놀란흙은 국어사전에 실린 우리 토박이말로 '한번 파헤쳐진 흙'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호미질 삽질 괭이질 쟁기질, 심지어 포클레인으로 파헤쳐진 흙을 놀란흙이라 부릅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뒤집힐 때 흙도 놀란다”
세상에! 쟁기, 삽, 괭이, 호미, 쇠스랑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헤칠 때 흙이 놀라리라고 여긴 사람 있을까요? 발상이 특히 번뜩이는 대목입니다. 흙이 놀랐으니 괭잇날 호미날 쟁기날 삽날에 흙의 비명이 담겼다는 표현도 나왔을 터. 제가 오래전 ‘풀비린내를 맡다’란 제목의 글을 배달한 적 있습니다. 예초기로 풀 벨 때 풀이 내는 비명과 아픔을 담은 표현으로 좋을 듯해서. 시인은 한 수 더 떴습니다. 저는 그래도 생명 지닌 존재인 풀을 두고 한 표현이건만 시인은 무생물인 흙을 유정물(감정을 느끼는 존재)로까지 끌어올렸습니다.
“겨냥한 곳은 흙의 정수리거나 잠든 미간이거나”
농기구가 겨냥한 곳은 흙의 정수리 아니면 미간이랍니다. 달리 말하면 급소란 말이지요. 단번에 숨통을 끊으려 드는. 그때 흙의 표정을 발견한 누군가가 퍼뜩 한 낱말을 만들었습니다. ‘놀란흙’. 뒤를 이어 국어사전에 그 낱말이 버젓이 올라갔습니다.
“나무뿌리, 바위뿌리에도 덤덤한 흙이/ 사람만 보면 왜 그리 놀라는지”
흙은 지렁이, 땅강아지, 두더지, 개미가 자기 가랑이를 헤집어 집을 짓고 길을 내도 놀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갑게 맞이합니다. 나무뿌리 바위뿌리마저 자기 몸을 파고들어도 흙은 겁내지 않습니다. 허나 사람만 보면 겁을 냅니다. 자기를 파헤쳐 놀란흙으로 만드니까요. 얼마 전 마을 한 바퀴 돌다 저만치서 또아리 튼 뱀을 보았습니다. 저는 두려웠지만 그냥 걸었습니다. 그러자 녀석이 길을 비켜줬고. 호랑이에게 사자에게 말벌에게 악어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는 저보다 더 덩치가 크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짐승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랍니다.
“흙의 나라 / 태초에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을 닮은 흙의 심장은 사람을 잘 알고 있다”
옛사람들도 호미로 쟁기로 삽으로 흙을 뒤적였습니다. 여기서 ‘파헤치다’란 말 대신 ‘뒤적이다’란 말을 썼습니다. 그분들은 흙이 우리에게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잘 알기에 농기구를 사용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썼습니다. 그래야 좀 더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음을 진작부터 알았기 때문이지요.
“공사장 주변, 포클레인이 파헤친 땅 / 매장된 산업폐기물을 껴안고 까맣게 죽어있었다”
포클레인이 파헤쳐도 놀라지 않는 흙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공사장 주변에 매장된 산업폐기물을 껴안고 까맣게 죽어있는 흙입니다. 싱싱하던 흙빛이 흑빛으로 변하면 흙은 이미 생명을 잃은 몸이 됩니다. 생명을 잃은 흙은 죽은 흙이 되고 놀란흙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놀란흙도 못 되는 흙이 있다니.
“소심하고 겁 많은 아버지는 흙집으로 들어가 / 더는 놀라지 않고 //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래서 자주 놀란다”
사람이 죽으면 놀랄 수가 없습니다. 소심하고 겁 많은 아버지가 죽어서 흙집(땅에 묻힘)으로 들어가 더는 놀라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허나 거꾸로 화자는 흙처럼 자주 놀랍니다.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그렇지만 그렇게 놀라는 일도 오래 가지 않을 겁니다. 이미 흙을 죽여버리고 있기에.
시인은 더 이상 흙을 놀라게 하고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의도를 갖고 이 시를 썼으리라 생각합니다. 흙을 살리는 길이 바로 우리네 삶을 더 건강하고 알차게 엮어가는 길이라 확신하면서.
*. 첫째 사진처럼 폐기물 매립하면 둘째처럼 침출수가 생겨나면서 죽은 흙, 죽은 개울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