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목우씨의 산골일기(190)

제190화 : '까치밥'의 이중성

         * ‘까치밥’의 이중성 *



  <하나>



  그저께 감을 땄다. 올해는 몇 개 열리지 않아 금방 다 땄다. 내가 만든 ‘감 따는 도구’를 활용하여. 감 따는 도구는 인터넷 검색하면 판매용으로 수없이 나온다. 심지어 노무현 전 대통령도 제품 발명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장대로 만든 옛날식에서부터 조금씩 개량한 도구도 나온다. 내가 만든 도구는 원래 홍시를 따려고 만들었다. 토종감은 홍시가 된 상태로 조금만 지나도 떨어져 박살이 난다. 그러니까 떨어지기 전 따기 좋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이번엔 홍시 대신 곶감 만들려고 아직 익기 전에 따봤는데 역시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단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땄으니 말이다. 만드는 방법도 쉽다. 대나무와 굵은 철사와 가는 철사에다가 양파망과 대나무만 있으면 되니까.




  우리 집 감나무는 모두 세 그루지만 그 가운데 대문에 걸쳐있는 100년 된 감나무는 이제 감을 달지 못한다. 뿌리가 완전히 썩어서. 작년까지는 그래도 꽃은 피우더니만 올해는 그것마저 힘에 부치는지 포기했다. 다만 능소화 올라갈 버팀대 역할이 그나마 위안이랄까. 

  언덕 쪽에 나 있는 감나무가 가장 많이 감을 매단다. 거기 감은 크기도 참 우람하다. 대봉감 아닌 토종감치고 이 정도 크기가 있을까 할 정도로. 그 감나무도 50년은 넘었다 하나 아직 감 달기엔 정정하다. 작년에 가지를 너무 쳐서 올해 그 정도지만 아마 내년에는 더 많이 달리리라. 


  집 오른쪽에 감나무가 한 그루 더 있는데, 거기도 태풍에 넘어지면 집을 망가뜨릴까 싶어 가지 치는 바람에 몇 개 달리지 않았다. 아마도 내년에는 실하게 달리리라. 감을 따다가 장대가 닿지 않아 몇 개 남겨두었다. 그게 흔히 말하는 ‘까치밥’인 셈이다. 딸 수 있는데 안 땄는 게 아니라 못 따서.




  <둘>



  우리나라에 감동을 주며 전해오는 얘기가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까치밥에 담긴 우리 선조들의 ‘배려와 나눔’을 담은 아름다운 마음씨다. 이미 많은 글쟁이들이 까치밥을 소재로 수필을 썼고, 강연자들도 심심풀이 땅콩으로 썼으니 다들 한 번쯤 들어봤으리라. 

  수필이나 강연 제목에 인용된 까치밥 일화는 워낙 많으니 밀쳐두고 송수권 시인의 「까치밥」이란 시 한 편 보자.

  “고향이 고향인 줄도 모르면서 / 긴 장대 휘둘러 까치밥 따는 / 서울 조카아이들이여 / 그 까치밥 따지 말라” 


  [대지]란 소설로 너무나 유명한 ‘펄 벅’ 여사(1938년 노벨문학상 수상)가 우리나라를 방문한 뒤 쓴 수필에도 까치밥이 나온다. 감나뭇가지에 몇 개 매달린 감을 보고 왜 저걸 그대로 놔두느냐고 묻자 수행원이 까치밥에 얽힌 얘기를 들려준다. 다 듣고 나서 이리 말했다. 

  “내가 한국에 와서 보고자 했던 것은 고적이나 왕릉이 아니었어요. 이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한국에 잘 왔다고 생각해요!”


(구글 이미지에서 퍼옴)



  이뿐인가, 까치밥은 엄연히 ‘까치 따위의 날짐승이 먹으라고 따지 않고 몇 개 남겨두는 감’이라고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다. 그만큼 까치밥은 우리 민족과 연결된다. 허니 까치밥으로 둔다면 이보다 나은 배려와 나눔의 정신을 찾을 수 있을까? 

  헌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가끔 있다. 까치밥은 감을 따다가 까치 같은 새가 먹을 수 있도록 남겨둘 때라야 진정한 까치밥이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혹 시골길 가다가 까치밥으로 남겨둔 감을 한 번 자세히 보라. 주인의 품성을 알 수 있으니까. 


  까치밥이란 이름을 달기 어려운 감 몇이 달려 있다. 즉 감나무 가지 어느 부분에 달려 있는가를 잘 살펴보시길. 만약 까치밥이 감나무 가지 가운데 가장 먼 곳에 달려 있다면 문제가 된다. 왜냐면 이곳 가지는 다른 가지보다 훨씬 가늘기에. 


(이렇게 가는 가지에 앉으면 부러질 텐데 까치가 어떻게 따먹을 수 있을까)



  까치는 그 정도 가는 가지에 절대 앉지 못한다. 까치가 헬리콥터처럼 공중에서 순간 정지한 상태로 서 있는 재주가 있다면 몰라도. 아마도 거기 앉을 수 있는 새라면 박새 곤줄박이 참새 같은 아주 작은 새라야 가능할까. 그러면 참새밥이나 박새밥이 되었어야 했는데...


  두 번째로 가장 먼 가지에 까치밥이 있다. 퍼뜩 짐작이 가지 않는가. 예전에는 대나무로 감을 땄다. 그러니 길이에 한계가 있었다. 감을 따본 경험이 있다면 길이가 길어질수록 목이 아프고 무거워 힘이 든다. 이런 결점을 두고서라도 장대가 닿지 않는다면 감을 딸 수 없다. 

  이제 내가 말하려는 의도가 보이리라. 그러니까 까치밥이 되려면 제법 굵은 가지에 까치가 앉아 느긋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달려야 한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해 딸 수 없어 그냥 놔둔 감이라면 사람도 못 먹지만 새도 못 먹는다. 그러면 까치밥이라 할 수 있을까.


(올해는 예년에 비해 곶감의 양이 너무 적다. 왜냐면 감이든 곶감이든 혈당스파이크에 좋지 않다 하여 손님접대용으로만 만듦)



  그렇게 맨 끝 가는 가지에 매달린 감은 누구도 먹지 못하고 홍시가 돼 그냥 떨어진다. 운 좋게 얼어붙으면 좀 오래 가지만 그것도 날씨 따뜻하면 떨어지고. 그런 감을 두고 까치에게 자기들을 위해 먹이로 놔뒀다고 하면 (말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고맙다고 할까.



  <셋>



  보름 후면 구세군 자선냄비가 거리 거리에 등장하게 되고, 신문 방송에선 ‘불우이웃돕기’ 관련 뉴스가 쏟아지리라. 올해 여름이 유난히 더웠으니 겨울은 겪어보지 못한 추위가 올 거라고 기상학자들은 경고를 한다. 

  날씨가 춥고, 경제가 안 풀리고, 하는 사업도 적자투성이라니 거기서 자선의 마음이 일어나기 쉽지 않다. 의식(衣食)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고 했지 않은가. 내가 먹고살 형편이 넉넉해야 마음도 풍부해진다. 


(예전에 많이 사용한 대나무로 만든 감 따는 도구, 구글 이미지에서 퍼옴)



  나눔의 본질이 쓰다가 남은 걸 베풂이 아니라 먼저 베풀고 남은 걸 써야 한다지만 어디 그게 쉬운가. 주변을 둘러봐도 사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드물다. 만약에 성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이게 힘들다면 차선으로 가진 것에서 조금 떼내 나눔을 실천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 않은가. 다만 생색내선 안 되겠다. 까치밥이라 하면서도 자기가 따지 못해 가장 멀고 가는 가지에 감을 남겨둔 나처럼. 


  앞으로 저 감이 오래 달려 있기를 빈다. 그래야 그걸 볼 때마다 나의 허위가 드러나니까. 그래야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목우씨의 산골일기(19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